90년대 쯤엔가 모 대기업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베토벤 초상화를 클로즈업하면서 그의 본 시절 스승이었던 네페의 평인 '정열은 있다, 그러나 기본은 없다' 를 내세워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충실한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을 수없이 본 기억이 난다.
생전에도 수많은 논쟁 거리를 만들었고, 사후에는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받다 못해 나치라는 역사상 최악의 정치 집단 중 하나에 의해 이용당할 정도로 한 나라의 예술적 자존심을 굳세게 한 베토벤이었지만, 네페의 말처럼 그도 초기에는 자신의 개성을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던 수업 시기를 거친 바 있었다.
베토벤 작품들 중 현재까지 명곡 소리를 듣는 것들은 절대 다수가 빈에 눌러앉았을 때 쓰여진 곡들이다. 그 이전인 본 수업시대에 쓴 곡들은 대부분 '듣보잡' 으로 여겨져 연주가 별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베토벤의 개성을 찾기 힘들거니와 과거와 그 당시에 현존하던 대가들의 어법을 너무 무질서하다 싶을 정도로 마구 뒤섞어 통일감을 결여한 곡들이 많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베토벤의 본 시기 작품 중 후반기에 쓰여진 두 편의 칸타타는 (물론 지금도 연주와 녹음 기회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베토벤의 작품과 작곡 방식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790년 2월 20일에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요제프 2세가 죽었다는 급보가 4일 뒤 본에 도착했는데, 조용하던 독일의 소도시는 삽시간에 애도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 황제의 죽음에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이해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본의 선제후였던 막스 프란츠가 요제프 2세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에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본의 유력 예술 인사들이 만든 문학 동아리였던 '독서회(Lesegesellschaft)' 에서도 긴급 회의를 소집해 추도식을 열기로 했는데, 그 때 오일로기우스 슈나이더가 당시로서는 완전히 무명에 가까웠던 베토벤에게 추도 칸타타를 하나 쓰게 해서 추도식 때 연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베토벤도 저 '독서회' 회원이었고, 슈나이더는 본 대학에서 베토벤에게 철학을 가르치기도 한 스승이자 친구였다.)
이미 같은 동아리 회원이었던 성직자 제베린 안톤 아버돈크도 요제프 2세의 죽음을 애도하고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위탁을 받은 베토벤은 꽤 빠른 속도로 작곡에 착수해 칸타타 한 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추도식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던 3월 17일에 열린 독서회 회의 기록을 보면 '여러 사정 때문에 칸타타 연주는 취소되었다' 고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독서회에서는 이후에도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어 9월 30일에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를 위한 축제 분위기의 칸타타 작곡과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오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베토벤이 마찬가지로 아버돈크가 지은 시를 가지고 칸타타 한 편을 더 작곡했다. 그러나 이 곡 역시 연주 기회를 잡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곡인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두 곡 중 하나는 이듬해인 1791년 가을에 공연을 위한 총연습 단계까지 가기도 했다는데, 연주자들과 베토벤 사이의 마찰이 계속된 끝에 이것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본 궁정악단의 규모는 현대의 실내 관현악단 수준에도 못미칠 정도의 극소편성이었고, 그나마 그 실력도 뛰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실제로 호른 단원이었던 니콜라우스 짐로크의 경우에는 '베토벤이 곡에 써넣은 모든 기호들이 이례적인 것이었고, 심지어 연주 불가능한 대목도 있었다' 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베토벤은 악보대로 곡이 연주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데, 이렇게 다툼이 있은 후에는 악보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방치해 버렸다.
버림받은 칸타타 두 곡의 악보는 한동안 행방불명 상태였다가, 1884년에 한 경매장에서 사본 형태로 발견되어 뒤늦게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곡들의 작곡자가 베토벤인지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 좀 더 필요했는데, 평생 동안 대선배 베토벤을 의식해온 브람스는 거의 단정적으로 '추도 칸타타는 확실히 베토벤의 작품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추도 칸타타인 '요제프 2세의 승하에 바치는 칸타타(Kantate auf den Tod Joseph II. 약칭 요제프 칸타타)' 와 축전 칸타타 '레오폴트 2세의 황제 즉위에 바치는 칸타타(Kantate auf die Erhebung Leopold II zur Kaiserwürde. 약칭 레오폴트 칸타타)' 두 곡은 19세기 후반에야 뒤늦게 출판되고 초연되었다. 하지만 그 발견이 연주의 대중화까지는 절대 가지 못했다.
칸타타라는 장르는 음악사에서 주로 바흐의 작품들로 많이 설명되곤 한다. 실제로 바흐는 수백 곡의 칸타타를 자신이 봉직하던 교회의 예배를 위해 작곡했으며, 지금도 바흐 칸타타의 전곡 녹음에 도전하는 연주 단체들이 예외없는 주목을 받고 있을 정도로 음악적인 의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바흐가 굳이 칸타타를 종교음악 분야에만 한정짓지 않은 것도 사실인데, 유명한 교회 칸타타들에 결코 꿀리지 않는 '커피 칸타타' 나 '농민 칸타타' 같은 류의 세속 칸타타도 작곡한 바 있다. 특히 이들 작품은 바흐가 한 편도 쓰지 않은 오페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어서, 실제로 무대를 마련해 소오페라처럼 공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종교 의식과 대중들의 오락용으로 주로 작곡되던 칸타타들은 고전 시대에 와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 '구시대 양식' 을 부활시킨 것이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칸타타를 바흐와 같은 용도로 작곡하기 보다는, 어떤 위인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의 '기회 음악' 으로 많이들 내놓곤 했다.
당시 갓 스물이던 베토벤이 프랑스 작곡가들의 칸타타 리바이벌을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계몽 군주' 의 죽음과 즉위를 소재로 한 칸타타를 남겼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 두 곡에서 베토벤은 선각자들과 동시대인들의 작풍을 모방하던 수업 시기를 탈피하듯이 꽤 강한 개성을 발휘했는데, 이 때문에 이 곡들이 결코 완벽하지는 않아도 훗날 베토벤의 창작 성향을 가늠케 하는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다는 점에 많은 음악학자들이 주목하게 되었다.
소프라노와 바리톤 독창,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해 쓰여진 '요제프 칸타타' 는 첫 곡과 끝 곡이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관현악과 합창으로 연주되고 있는데, 비극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의 어법을 답습하고는 있지만 감화음을 예측하지 못한 곳에 갑자기 끼워넣어 (당시 청중들과 연주자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간부를 차지하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합창이 수반되는 아리아들도 모차르트나 하이든 등의 상당히 세속화된 종교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그 때문에 다소 괴리감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음악에서 받는 그런 느낌 외에도, 요제프 2세를 '맹목적인 광신과 야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분' 으로 추켜세우는 가사에서는 나를 포함한 반군주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매우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학자들은 그 시대착오적인 가사와 온갖 사조가 뒤섞인 중간부의 곡들에서도 빈 활동 초기에서부터 심지어 말기에까지 쓰이게 되는 온갖 악상과 아이디어들의 단편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베토벤이 이처럼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놓은 적이 예전에는 없었다는 점에서 특필되는 대목이다.
소프라노와 테너, 바리톤 독창과 혼성 합창, 관현악용으로 쓰여진 '레오폴트 칸타타' 는 곡의 규모 면에서 '요제프 칸타타' 보다는 작지만, 첫 곡과 끝 곡의 관현악 편성에 트럼펫과 팀파니가 추가된 것에서 보이듯 좀 더 장려한 관현악 음색을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악단을 뿔린' 것 외에도, 마치 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첼로를 독자적인 오블리가토 악기로 취급하거나 목관을 솔로 악기로 취급하는 방법 등을 조금씩 건드려보는 식의 시도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축전 칸타타의 중간부도 마찬가지로 다소 모나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바로크/고전 시대 양식을 모방한 어법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이후 작풍들의 파편이 공존하고 있는데, 음악사회학이나 음악심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 두 칸타타에서 이후 닥치게 될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나 베토벤 자신의 모순된 면모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곡은 지금도 연주가 굉장히 뜸하며 앞으로도 그 기회가 적을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레어템의 위치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한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들의 계몽 군주라는 이미지도 결국 독재라는 야만성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노림수라는 것이 '뽀록난' 이상, 이 곡들을 듣고 감동을 먹을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 작품 전집 아니면 음반 찾기도 무척 힘들지만, 꽤 용감하게도 이 두 곡을 CD 한 장에 담아 발매한 것도 찾을 수 있었다. 독일의 코흐 슈반(Koch-Schwann)에서 1995년에 발매한 물건이었는데, 스위스 출신의 지휘자 칼 안톤 리켄바허(Karl Anton Rickenbacher)가 베를린 방송 합창단(Rundfunkchor Berlin)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Rundfunk-Sinfonieorchester Berlin)을 지휘해 녹음한 것이었다. (참고로 앨범 커버에는 폼페오 바토니가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같이 그린 초상화를 아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 1995 KOCH International GmbH
리켄바허는 이 초기 칸타타 외에도 베토벤의 전 생애에 걸쳐 '돈벌이용' 혹은 '애널써킹용' 으로 작곡된 극음악 단편들이나 무도회용으로 쓰인 콩트르당스와 미뉴에트, 독일 춤곡 등의 듣보잡만을 담은 CD들도 같은 레이블에서 발매한 바 있었는데, 틈새 시장을 공략해 보자는 의도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독창자들로는 노르웨이 출신의 소프라노 보딜 아르네선(Bodil Arnesen)과 독일 테너 마르쿠스 셰퍼(Markus Schäfer), 미국 출신의 바리톤 앨런 티터스(Alan Titus) 세 사람이 기용되었는데, 모차르트 스타일의 장식음이 많은 악구나 도약 등 고전 어법과 베토벤 특유의 인성 영역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한 무모한 작곡법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나름대로 잘 부르고는 있는 것 같지만, 잘 불러도 곡의 모순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같이 불러오는 격이 돼서 '잘돼도 못돼도 어떻게든 어색한 느낌은 나는' 아햏햏한 처지가 되었다.
리켄바허의 지휘도 이 곡에서 베토벤 중기 이후의 에너지나 심오함을 굳이 끌어내기 보다는 고전적인 절도 안에서 베토벤의 시도를 관찰하는 듯한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평양냉면마냥 싱겁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심지어 트럼펫과 팀파니가 가세하는 '레오폴트 칸타타' 의 전반과 후반에서도 화려한 느낌을 받기 힘들었다.)
나온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CD들까지 음반 가게의 진열장에서 속속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이 CD의 신품을 구한다는 것이 꽤 발품을 팔 일이라는 것도 구매 의욕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그나마 나는 운좋게 회현지하상가의 한 중고음반점에서 8000~9000원대의 싼 가격에 사들였지만, 신품이 있더라도 환율 불안으로 수급이 불규칙하고 원활하지 못한 마이너 레이블 음반의 특성상 거의 2만원에 육박할 가격이라는 것도 문제겠고.
아무튼 베토벤의 생애나 음악 활동에 대해 그 뿌리부터 추적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꽤 매력적인 아이템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베토벤 명곡 이외의 것에 별로 호감을 느끼지 않는 이들에게는 계륵 정도로 치부될 물건이라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들으면서 이런저런 불평과 실망을 하면서도, 디테일 정교하게 파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모리 카오루 화백의 초기 동인작을 모은 '셜리' 단행본의 한국어판 출간에 열광했던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특권층에 종속된 양산형 작곡가라는 한계를 벗어나 독립심 강한 까탈스러운 대가로 성장하기 전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