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대장정' 이라는 말. 이 말의 어원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어떠한 역사적 사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아마 있을 것이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무려 3년 동안,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국민당군의 대토벌 작전을 피해 다니기 위해 12000km라는 엄청난 거리를 행군했던 것에서 나온 말이다.
장정 기간 동안 이들이 거쳐간 성-한국으로 따지면 '도' 의 개념-은 11개, 산맥은 18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중에 30만여 명의 병력이 보충되었음에도, 장정이 끝나고 산시성에 본거지를 마련했을 때 살아남은 병사들이 겨우 3만 명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험난하고 처절했던 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장정으로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폭정에 지쳐있던 중국 민중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후 이어지는 중일전쟁에서도 항전의 주도권을 잡아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이라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대변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뱀다리로 이 대장정에는 '무정' 이라는 조선인도 참여했는데, 그는 이후 '8로군 포병 사령관' 이라는 직함을 쓰고 다닐 정도로 영웅시되기도 했다.)
역사적인 의미가 큰 만큼 중국에서 이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쓰지 않고 있을 리가 없다. 하긴, 이념을 떠나서 일단 '징하다' 는 말이 먼저 나올 정도의 일이었으니. 음악 쪽에서도 아마 지금까지 나온 중국 교향곡들 중 가장 길고 스케일이 크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이 대원정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딩 샨더(丁善德, 1911-1995)라는 작곡가는 중국의 현대 작곡가들 중 1세대 후반에 속하는 원로격 인물로, 초기에는 상하이에서 비파와 피아노를 배우고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 1947년에는 프랑스로 유학했고, 아스토르 피아소야(피아졸라)를 길러내기도 했던 나디아 불랑제와 아르튀르 오네게르에게 2년 동안 작곡을 배웠다.
딩이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이 되었고 모든 면에 있어서 사회주의 방식이 막 도입되기 시작되고 있었다. 딩은 이에 부응해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 노선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프랑스에서 접한 최신 음악과 그 기법들의 요소를 간간히 응용했다.
예로 피아노 독주곡인 '두 곡의 신장 춤곡' 에서는 불협화음과 다조(polytonality. 두 개 이상의 조성을 같이 쓰는 것)를 일부 사용해서 당대의 작품들과 구별되었고, '신장 춤곡' 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중국에서도 최변방 지역이었던 신장 웨이우얼(위구르) 자치구나 시짱(티베트) 자치구 등의 민속 음악에서 주제를 빌어 와 작곡을 하기도 했다.
딩이 '대장정' 을 소재로 작곡한 '장정 교향곡(長征交響曲. Long March Symphony)' 은 1959년에 착수한 작품인데, 완성하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는 작품 자체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딩 자신이 대장정 루트를 실제로 답사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악상으로 정리하느라 걸린 시간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대장정 교향곡' 은 표제가 붙은 다섯 개의 악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정에 착수-여러 민족들로부터 사랑받는 홍군-루팅교의 재빠른 점령-눈덮인 산과 초원을 지남-승리의 연합 순이다. 대장정 기간 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시간대 별로 배치했기 때문에, 자연히 서사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장정의 출발을 묘사한 1악장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1악장과 매우 유사한 구성인데, 특히 이 교향곡 전체의 메인 테마이기도 한 혁명가요 '3대규율 8항주의(三大紀律八項注意)' 가 통째로 인용된 두 번째 주제가 나올 때가 그렇다. 피아니시모로 저 주제가 시작될 때부터 스네어 드럼이 잘게 리듬을 새겨주는 것은 거의 완벽한 벤치마킹이다.
다만 쇼스타코비치는 음량을 키우면서 단조의 대주제를 넣고 점차 파국으로 치닫지만, 딩은 일단 한 번 유사 클라이맥스를 만든 뒤 다시 음량을 줄여서 목가적인 경과구를 따로 두고 있다. 이 1악장에서도 딩의 현대적인 요소 추가는 계속되었는데, 새롭게 투쟁적인 악절이 추가될 때 간간히 불협화음을 섞으면서 텐션을 주고 있다.
표제부터 노골적인 선전 같은 2악장에서는, 홍군과 공산당이 대장정 기간 동안 인민들에게 민족을 초월하여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소수 민족들의 민속 음악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딩이 현장 답사를 통해 얻은 민속 음악 자료들이 가장 많이 쓰인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는 특히 관악 주자들의 솔로 악구가 많은데, 역동적인 춤곡 풍의 악구와 교차하면서 표제의 의미와 체제가 요구하는 '낙관주의' 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악장에서 선보였던 이 곡의 '혁명가요' 메인 테마도 다시 등장하면서 유기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3악장은 대장정 기간 동안 가장 큰 전환점이 된 '루팅교 전투(1935년 5월 말)' 를 모델로 한 대목이다. 국민당군은 윈난성과 쓰촨성의 경계였던 양쯔강에서 홍군을 저지하기 위해 쓰촨성 쪽 강가에 토치카를 만들었고, 강에 놓여 있던 유일한 쇠사슬 다리인 루팅차오(루팅교)의 판자를 1/3 쯤 걷어내 버렸다.
맞은 편인 윈난성 강가에 있던 홍군의 특공대가 이 부실한 다리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국민당군의 토치카에서 난사되는 기관총탄에 맞아 급류의 밥이 된 병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는 데 성공한 대원들이 토치카에 수류탄을 까넣었고, 홍군은 다리를 수리한 뒤 유유히 강을 건너갔다.
이 극적인 전투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과로 기록되는데, 딩은 이 전투를 빠른 2/4박자의 스케르초로 그려냈다. 스케르초라고는 해도 전통적인 3부 형식이 아니라 변칙적인 론도 형식에 가까운데, 여기서도 딩은 민속 음악 풍의 주제에 대비시키기 위해 경과구를 반음계적인 움직임으로 가져가고 있다.
하지만 홍군의 시련은 계속 됐고, 특히 자연이 주는 시련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들은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티베트 인근의 눈덮인 산맥들을 넘어야 했고, 간쑤성 남부에서는 늪지대가 많은 초원을 지나다가 국민당군의 기습에 많은 병사들을 잃기도 했다. 4악장이 이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작곡되었다.
이 4악장은 당시 소련의 주류 작곡가였던 글리에르의 교향곡 3번 '일리야 무로메츠' 중 2악장인 '도살자 솔로베이' 를 연상케 하는 황량한 공간감을 보여주는데, 눈발이 날리는 장면에서 바이올린 파트를 취급하는 방법이 특히 유사하다. 악장 말미에는 바이올린 독주가 민요 풍의 감성적인 솔로를 연주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교향곡 전곡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원칙에 따른 장엄한 승리의 엔딩이 5악장에 주어졌는데, 국민당군의 공세를 피해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장정의 생존 병력들이 종착점인 산시성에 모여 재결합을 축하하는 것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전반 네 개 악장들보다도 더 낙관적이며, 전체적으로 강한 양기를 내뿜고 있다. 마지막 코다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분명히 '종교적' 이라고 한 소리 들었을) 튜블러 벨이 첨가되어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을 연상케 하며, 또 다른 혁명가요에서 인용했을 멜로디는 브루크너 교향곡의 소위 '코랄' 처럼 부풀어 오르며 끝난다.
물론 이 곡의 '순수성' 혹은 '정치성' 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견이 오고 가는 실정이다. 중국 내에서도 작곡 당시에는 이 곡이 '대장정을 그린 작품 중 최고의 곡' 으로 칭송받기도 했지만, 문화대혁명 때는 양념처럼 집어넣은 현대적인 요소 때문에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 곡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부리는(fanfaronade)' 작품이 되었다고 꼬집기도 한다.
실제로 70분도 넘는 방대한 길이와 스케일에 비해 음악 자체의 질은 좀 희생된 면도 있으며, 스토리 텔링에 신경을 쓰다 보니 서정적인 면이 상당 부분 손해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관현악을 다룬 솜씨는 나름 뛰어난데, 역시 불랑제와 오네게르에게 헛배운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곡의 음반은 내가 조사한 바로는 네 종류가 있다. 그나마 중국이나 홍콩 등지에서만 나도는 것으로 아는데, 천 시양 지휘의 상하이 교향악단 연주와 막 카록 지휘의 러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둘 다 Hugo Productions), 림 켁치앙 지휘의 나고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홍콩 레코드), 그리고 유 롱(余隆) 지휘의 슬로바키아 방송 교향악단(Slovak Radio Symphony Orchestra) 연주(마르코 폴로)다. 여기서 내가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를 통해 들어본 것이 맨 마지막 음원이다(음반 번호: 8.223579).
ⓟ 1995(?) HNH International Ltd.
유 롱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중인 중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데, 몇 년전 랑랑과 함께 피아노 협주곡 '황하' 를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로컬반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과 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 관현악판(쇤베르크 편곡)을 비롯한 두 장의 CD를 도이체 그라모폰 상표로 내놓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코 폴로 앨범이 이 곡의 대표 음반으로 꼽히는 데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바로 유 롱이 딩 샨더의 손자이기 때문인데, 할아버지의 곡을 녹음한다는 데 안이하게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연주도 꽤 우수하고, 외국의 평을 보니 녹음도 낙소스 산하 레이블 치고는 상당히 잘되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본사인 낙소스에서는 이후 '옐로 리버(Yellow River)' 라는 중국 음악 전문 서브 레이블을 하나 더 탄생시켰고, 현재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를 비롯한 여타 음원 판매 혹은 유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많은 중국 음악-전통음악이던 창작음악이건-들이 업데이트되어 있다.
음반값이 오르고 해외 주문도 힘든 이 시점에서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만 듣고도 이런 뻘글을 수십 개는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망하지만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