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과 올해 초에 걸쳐서 그리스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발단은 16세 소년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었고, 격증하던 실업률과 정치인들의 부패, 세계적으로 확산되던-그리고 지금도-경제 위기 등 복합적인 문제가 더해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한국에도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만큼은 아니라도) 대규모 촛불 시위가 벌어졌던 한국에서는 어느 때 부턴가 그 보도가 갑자기 잦아들었고,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현 정권의 언론 장악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제기했다. 정말 그 음모가 사실이었던 아니건, 그리스의 시위 소식은 멀리 떨어진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득권층에 있어서도 매우 껄끄러운 뉴스였을 것이다.
그리스는 예로부터 다른 발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심한 부침을 겪었던 나라였다.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등 외세 밑에서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는 차치하고서라도, 2차대전 때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점령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추축국 군대의 퇴각 후에도 독일군에 맞서 싸웠던 여러 게릴라 조직들이 왕당파, 좌파, 우파 등 갖가지 정치 배경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내전이 발생했고.
현재 그리스의 원로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5-)도 이런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에게해 북부 키오스라는 섬 출신인 테오도라키스는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그 방면에서 꾸준한 자기 계발을 했지만, 동시에 ELAS(좌익 계열의 게릴라 조직)에 가입해 지하 활동을 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테오도라키스는 좌익 조직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조직원들 외에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그리스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고, 강대국들의 사주로 집권한 군사정부의 독재 기간 동안 숱한 시위와 그로 인한 체포, 고문, 투옥, 강제노역 등의 고난을 겪었다.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는 아테네 음악원에서 수학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여러 편의 실내악 작품과 '아시고니아의 제전' 같은 관현악 작품 등 기악 장르에서 중요한 곡들이 작곡되었다. 첫 번째 교향곡도 1948년에 착수했는데, 이 시기에 그리스에서는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 피신해 있던 좌익 게릴라의 잔존 세력들이 다시 돌아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ELAS 출신이었던 테오도라키스는 다시금 수배자 명단에 올라갔고, 1947년에 에게해 서부의 이카리아라는 섬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1948년 6월에 몰래 가족들을 방문하던 중 경찰들이 들이닥쳐 테오도라키스를 체포했고, 같이 체포된 친구는 연행 과정에서 척추가 골절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한 뒤 처형당했다.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이카리아로 돌아간 테오도라키스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던 마키스 카를리스와 바실리스 자노스 두 사람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카를리스는 정부군의 해군 중위였고 자노스는 ELAS의 조직원이었다(카를리스는 게릴라들이 설치한 지뢰의 폭발로 전사했고, 자노스는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음).
도피 중에도 작곡을 계속 하던 테오도라키스는 교향곡을 죽은 친구들과 그리스 내전의 희생자들에게 바치고 싶어했지만, 작곡은 굉장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경찰과 군부는 그를 계속 요주의 인물로 올려놓고 있었고, 결국 '껀수' 를 잡은 군부는 테오도라키스를 '빨갱이 동료들' 과 함께 마크로니소스 섬의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에 감금했다.
마크로니소스의 재소자들은 힘든 노역과 구타, 고문에 시달려야 했는데, 하찮은 이유 만으로 즉결 처분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작곡 활동은 대단히 힘들었고, 테오도라키스 자신도 간수에게 심하게 구타당해 다리가 부러져 군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부모의 거듭된 선처 요청으로 풀려난 뒤에도 소위 그리스식 '녹화사업' 으로 다시 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직속 상관이 그의 범죄 경력을 확인한 뒤 마크로니소스로 다시 보내려고 하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테오도라키스가 상습적인 폭력과 갈굼으로 점철된 군역을 가까스로 마친 것은 1952년 여름이었고, 이 때부터 비로소 작곡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의 9년 동안 지속된 도피 생활과 투옥, 고문 등으로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의사였던 아내의 극진한 간병으로 건강이 점차 회복되었고, 착수한 지 5년 만인 1953년에 아테네에서 교향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교향곡 제 1번은 1955년 11월 13일에 아테네에서 안드레아스 파리디스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라이프치히의 독일 음악출판사에서 총보가 발간되었다(현재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로 판권이 이전되어 있음). 피아노를 포함한 3관 편성의 관현악을 요하는 곡인데,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같은 가요들에서 보여지는 통속성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테오도라키스의 초기 이력을 다소 장황하게 서술한 것도 이 곡의 전체에서 나타나는 분노나 비통함의 감정에 대한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데, 그리스 민속 음악의 어법을 밑바탕에 깔고는 있지만 불협화음이나 다조(polytonality), 선법 등을 차용하고 있어서 꽤 전위적으로 들린다(테오도라키스는 이 곡을 쓰면서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형식 면에서도 고전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 등을 준수하기 보다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교향곡이라기 보다는 영화음악이나 극음악처럼 서사적인 면이 중시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순수 기악용으로 작곡된 이 곡 이후 발표된 교향곡들인 2번(1980-81), 3번(1981), 7번(1983), 4번(1986-87)은 모두 예외없이 독창이건 합창이던 성악이 들어가고 있다.
1000여 곡의 가요를 작곡한 작곡가로서 음악 스스로가 말하게 하는 절대음악 보다는 명확한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가사나 대본이 곁들여지는 곡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그가 작곡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정치 활동에 참여하고 민감한 주제에 대한 입장 표명도 단호히 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테오도라키스는 프랑스에 유학해 파리 음악원에서 올리비에 메시앙과 외젠 비고에게 각각 작곡과 지휘를 배운 바 있었는데, 자작곡들 중에도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아 초연하거나 녹음한 것들이 많다. 이 교향곡도 1995년에 인투이션(Intuition)이라는 음반사에서 테오도라키스 자신이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카펠라 교향악단이 연주/녹음한 CD가 나온 바 있다.
ⓟ 1996 INTUITION Classics / IMM
최근의 녹음이라 음질은 괜찮은 편이지만,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간혹 가다가 기교적으로 어려운 부분에서는 삐걱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가끔 곡의 굴곡에서 헛나가는 것 같은 부분도 있다. 악단의 기량 문제인지 녹음 일정이 빡빡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음반이 출시되어 있는 테오도라키스의 가요 음반과 달리, 기악곡들의 녹음이 적은 편이라 다른 대안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이 교향곡의 경우,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녹음 외에는 유통되는 음반도 없다). 그리고 비단 이 CD 뿐 아니라, 인투이션에서 출시되어 수입된 많은 CD들이 그리 활발히 거론되지 않는 것도 대중들이 '가요가 아닌 테오도라키스의 작품들' 을 어려워하거나 생경해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소장하고 있는 테오도라키스 작품의 음반이 이 교향곡 음반(보스니아 내전 희생자들에게 바친 아다지오가 커플링됨)과 신포니에타+계엄령 음반, 그리고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그리스 가요 모음집 정도인데, 나머지는 이런저런 중고음반점을 뒤져가며 보충할 계획이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라는 오라토리오가 다음 목표로 잡혀 있는데, 인투이션에서 나온 것 외에 알레스 뮤직에서 나온 라이센스반이 충실한 번역 가사가 든 속지가 동봉되어 있다고 해서 그걸로 구입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