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현대음악' 으로 내가 듣고 한 방에 '삘받은' 곡들은 매우 드문 편이다. 당장 생각나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리게티의 '아트모스페르(분위기)' 나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 다케미츠의 '카시오페이아',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그리고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정도.
'투랑갈릴라' 의 경우에는 정명훈 지휘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관현악단 녹음(도이체 그라모폰)으로 처음 들었는데, 선율과 리듬이 꽤 복잡했음에도-특히 리듬은 정말 좌절 lllOTL-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곡의 음향이 매우 다채롭고 화려했기 때문인 것 같았는데, 물론 갖가지 타악기의 소리도 그랬지만 특히 옹드 마르트노라는 전자악기의 소리가 컸고.
옹드 마르트노는 20세기에 전자공학이 발달하면서 발명되기 시작한 '전자악기' 중 1세대 격에 속하는 악기인데, 발명자였던 프랑스 전자공학자 모리스 마르트노가 자신의 성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그보다 조금 전에 러시아 전자공학자 레온 테레민이 발명한 테레민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이었는데, 훗날 해먼드 오르간이나 전기 기타를 비롯한 대중음악에서 쓰이게 되는 악기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악기의 사진이 위키피디아에 있어서 확인을 해봤는데, 모양 자체는 초등학교 때 자주 보던 풍금(하모니움)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전자악기인 만큼 앰프와 스피커가 세팅되어 있고 맨 왼쪽 건반부 밑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기는 금속제 밴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밴드는 프랑스에서 리본을 뜻하는 '뤼방(ruban)' 이라고 칭하고, 이 밴드를 잡아당겼다 풀었다 하면 마치 사이렌 소리같이 왱왱거리는 글리산도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메시앙 작품에서도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던 것이 바로 저 뤼방 주법으로 얻어지는 글리산도 음색이었는데, 아마 녹음 과정에서 프로듀서나 엔지니어가 손을 봤겠지만 관현악단의 시끌벅적한 연주 속에서도 존재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어서 인상적이었고.
다만 이 악기는 건반으로 연주하는 악기임에도 화음을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1980년대에 개량된 모델은 자연배음에 기초한 3화음 정도는 만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저 악기도 지금까지 계속 개량형 모델들이 여러 악기 회사에서 제작되고 있는데, 종주국인 프랑스 외에는 일본에서 많이 만들고 있다고 한다.
옹드 마르트노를 작품에 사용한 작곡가는 메시앙 외에도 여러 사람 있는데, 앙드레 졸리베나 마르셀 란도프스키는 협주곡을 작곡했고 아르튀르 오네게르와 트리스탕 뮤라유 등도 관현악 작품이나 합창곡, 독주곡 등의 장르에서 작품을 남긴 바 있다. 또 고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서도 모리스 자르가 작곡한 OST에서 옹드 마르트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들 작곡가들이 대부분 프랑스인이거나 프랑스계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악기의 기원과 주요 사용 국가를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프랑스 외에 일본에서 옹드 마르트노 보급이 나름대로 보편화된 것도 특이한데, 아마 1931년에 발명자인 모리스 마르트노가 일본을 직접 방문해 악기와 그 조작법, 연주법을 소개했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에도 오자와 세이지가 1962년에 NHK 교향악단을 지휘해 '투랑갈릴라' 를 일본 초연했던 에피소드도 있고, 다케미츠 도루 등도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신의 작품에 종종 옹드 마르트노를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 작곡된 옹드 마르트노 사용 음악은 물론 순음악 계열도 있지만, 특이하게 드라마 등 방송 음악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다케미츠도 NHK의 다큐멘터리에 붙인 배경 음악에 도입했고, '미래소년 코난' 의 음악 작곡자로 유명한 이케베 신이치로도 NHK 대하드라마의 음악을 맡았을 때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저 악기가 애니메이션 OST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사례를 알고는 꽤 흠많무였는데, 2002년에 개최된 SICAF의 영화제에서 보게 된 나카무라 다카시 감독의 '파름의 나무' 가 그랬다. 작품 내용 자체도 초현실적인 가상 세계를 무대로 한 판타지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근대 프랑스 음악 풍의 묘한 색조를 띈 OST를 쓰고 있었다. 뱀다리지만 유카리 선생님과 전직 로사 기간티아, 스노하라, L을 한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작품이기도 하다. (믿으면 유인쫀)
ⓟ 2001 Takashi Nakamura/GENCO & Palme Production Committee
그런데 애니메이션을 계속 보고 있다가 뭔가 익숙한 전자음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건 100% 옹드 마르트노 소리다' 고 생각했고 실제로 맞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저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하라다 다카시(原田節)라는 인물이었다. 하라다는 현재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옹드 마르트노 주자 중 한 사람이고, 그의 스승이 바로 정명훈 지휘의 '투랑갈릴라' 음반에서 옹드 마르트노를 맡았던 잔느 로리오였다. (참고로 잔느 로리오는 마찬가지로 정명훈 음반에서 피아노를 맡았던 이본느 로리오의 여동생이었고, 이본느는 메시앙의 아내이기도 했다.)
하라다는 비단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으로도 꽤 인정받고 있는 것 같은데, 리카르도 샤이가 암스테르담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에서 상임 지휘자로 재직할 때 데카에 취입한 '투랑갈릴라' 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정명훈도 2007년 1월에 도쿄 필을 지휘해 '투랑갈릴라' 를 공연했을 때 솔리스트로 기용했고, 올해 2월 29일에 서울시향이 같은 곡을 한국에서 세 번째로 공연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솔리스트로 섭외되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또 경악한 것이, '파름의 나무' 같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외에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서도 저 악기를 사용한 사례를 알았을 때였다. 그렇다고 그 작품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역작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간에 일컬어지는 '모에 요소' 를 대놓고 노린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점에서 꽤 의외였고.
의인화 하면 못할 게 없다는 일본에서 다름 아닌 숯을 의인화해 화제가 된 '빙쵸탄' 의 미디어 믹스로 탄생한 동명 애니가 바로 그 작품이었다. 저 작품의 음악은 이와사키 타쿠(岩崎琢)가 맡았는데, 이와사키는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화제가 된 작품들인 '바람의 검심 추억편' 이나 '겟 백커스', 'R.O.D.' 등에서 OST를 맡아온 인물이었다. (아마 최근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원돌파 그렌라간' 일 것임)
ⓟ 2006 Frontier Works
이와사키는 도쿄 예술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정공법 스타일의 작곡가인데, 다만 비슷한 경력의 히사이시 조 같은 작곡가들처럼 정통 클래식 작법 보다는 주로 재즈나 팝 음악 스타일의 리드미컬하고 화려한 음악을 주로 쓰는 인물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 '빙쵸탄' 에서 평소 작풍으로 따져봤을 때 굉장히 이채로운 분위기의 음악을 쓴 셈이었는데, 1화의 고즈넉한 숲을 배경으로 깔리던 음악에서부터 옹드 마르트노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판 뉴타입에서 이와사키가 한국을 찾았을 때 인터뷰 기사를 낸 적이 있었는데(2007.4), 그 때도 '빙쵸탄' 의 작업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음악을 맡았을 때 감독이 '캐릭터의 귀여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던가 전체적으로 흐르는 애수를 보여주는 작품' 이라고 설명한 것을 듣고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작업했다고 했다.
감독의 의향을 살리기 위해서였는지, 이와사키는 전자악기나 음향을 전작들보다 덜 쓰는 대신 차분한 스트링을 배경으로 플루트나 오보에, 코랑글레, 클라리넷, 바순 같은 목관악기와 어쿠스틱 기타, 우쿨렐레, 만돌린, 부주키 등의 발현악기, 그리고 옹드 마르트노로 엺게 덧칠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트렌디한 작품에 매우 편안한 느낌의 OST가 깔리는 이채로운 조화를 감상하는 내내 만끽할 수 있었고.
'빙쵸탄' 의 OST에서 옹드 마르트노를 담당한 이는 예의 하라다 다카시였는데, 옹드 마르트노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1번 트랙 'Nostalgia' 와 4번 트랙 '아이의 행복(小さな幸せ)' 에서는 특이하고 개성적인 주법이라는 이유로 남용되기 쉬운 뤼방 글리산도보다는 건반만으로 연주하는 대목이 많은 것도 특이했다. 건반을 아주 섬세하게 눌렀을 때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뒤처져 나는 효과를 나른하면서도 한가로운 분위기의 음악에 적절히 사용한 예로 꼽을 만하다.
*이외에도 잠깐 언급한 테레민의 경우, 가장 유명한 사용 예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 일 것이다. 음악을 맡았던 헝가리계 미국 작곡가 미클로시 로저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스펠바운드 협주곡' 으로 리메이크한 바 있는데, 영화 OST와 협주곡판 모두 테레민이 공포가 표출되는 불길한 대목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 OST 앨범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사무라이 참프루' 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