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그들 중에 이상하리만치 존재감도 없고 현 시점에서도 언급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끼어 있는데, 독일과 유럽에서도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기념 사업이 행해지고 녹음이 발굴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어로는 레프 례비치 보르하르트, 독일어로는 레오 보르하르트(Leo Borchard)라는 인물인데, 두 가지 언어로 표기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1899년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소위 '볼가 독일인' 의 후손으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가족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면서 그 곳에 거주하며 음악을 배웠다.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과 뒤이은 내전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보르하르트 가족은 1920년에 독일로 이주했는데, 일거리를 좀처럼 찾지 못하던 이 젊은 지휘자를 구원해준 인물들이 바로 오토 클렘페러와 헤르만 셰르헨이었다. 클렘페러는 당시 베를린의 오페라극장들 중 가장 현대적인 레퍼토리를 많이 상연하던 크롤 오페라(Krolloper)의 음악 감독이었고, 보르하르트는 그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셰르헨도 보르하르트를 당시 자신이 이끌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방송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기용했고, 보르하르트는 이 두 지휘자 밑에서 일하면서 그들이 다룬 많은 현대음악 레퍼토리를 계승했다. 견습 시기를 마친 뒤에는 베를린에 정주하면서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이나 베를린 필 등을 객원으로 지휘했고, 소품 위주이기는 했지만 텔레푼켄 등의 음반사에서 녹음을 만들기도 했다.
1933년에는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과 연주 영상까지 제작했는데, 그 당시 저 악단을 지휘해 영상물을 만든 지휘자들은 원로급이었던 막스 폰 실링스나 중견 지휘자들이었던 프리츠 부슈와 브루노 발터, 레오 블레흐 정도였다. 그들에 비하면 아직 경력이 일천한 30대 지휘자였던 보르하르트가 영상물 제작에 기용된 것은 꽤 파격적이었는데, 앞의 네 지휘자보다 영상 분량도 더 길고 여러 곡을 담고 있다.
*총 17분 가량의 영상으로 남겨진 작품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과 같은 오페레타의 노래들을 짜맞춘 왈츠 '당신과 당신', '트리치 트라치 폴카' 세 곡이다. 이 영상은 일본의 드림라이프(Dreamlife)에서 발매한 '세기의 지휘자 대음악회' 라는 DVD에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클릭)
하지만 히틀러의 수상 취임과 동시에 시작된 나치 정권 아래에서 그의 음악 이력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나치는 그가 혈통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아리아인이기는 했지만, '구제불능의 유태인' 클렘페러나 '문화 볼셰비키' 셰르헨과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경력을 문제삼아 공적인 음악 활동에 계속 제재를 가한 것이었다.
결국 텔레푼켄과 마지막 음반을 만든 1937년 이후, 보르하르트는 베를린의 자택에 칩거하면서 개인 레슨과 동료 음악인들의 지원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에밀 아저씨(Onkel Emil)' 라는 이름의 반나치 조직이 벌이던 지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좀 특이한 이름의 저 조직은, 나치가 공공의 적으로 분류한 유태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아리아인으로 가장시키거나 안전한 은신처와 생필품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에밀 아저씨' 같은 지하 조직 덕에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에 숨어살던 유태인들은 편안하고 아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로 연명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전후에도 목숨을 건진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담을 책이나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공개했는데, 그들 중에는 콘라트 라테라는 음악학도도 있었다. 라테 역시 유태인이었는데, 그는 숨어 살면서도 스위스 피아니스트였던 에트빈 피셔나 보르하르트에게 몰래 음악 교습을 받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라테에 관한 에피소드는 독일 교민과 유학생을 위해 개설된 사이트인 '베를린리포트' 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클릭)
보르하르트도 전황 악화와 베를린 공방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좋게 살아남았고, 종전 직후 베를린 필의 생존 단원들을 불러모으고 소련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 공연할 장소를 물색했다. 필하모니와 운터 덴 린덴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두 군데는 이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전소되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티타니아 팔라스트(Titania-Palast)라는 영화관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베를린 필의 전후 첫 공연이 1945년 5월 26일에 개최되었고, 음악에 목말라 있던 청중들은 열광했다. 보르하르트는 연주곡들을 주의깊게 선정했는데, 우선 반유태주의 정책으로 금지되었던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서곡으로 시작해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5번, 그리고 독소전쟁 개전 후 적국 음악으로 금지곡이 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 4번으로 끝맺도록 했다.
(*이는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 대한 일종의 서비스이기도 했다. 소련군 점령지에 속해 있던 빈 필이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등도 마찬가지로 전후 첫 공연에서 모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메인 레퍼토리로 골랐다.)
연주회 후 약 1주일 뒤, 보르하르트는 베를린 주둔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베르자린의 공식 허가를 얻어 베를린 필의 임시직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반나치 저항 활동을 했던 것과 러시아어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 큰 플러스 요인이었는데, 부임 직후 거의 매주 공연을 개최할 정도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보르하르트는 첫 공연에서처럼 나치 기간 동안 연주되지 못한 수많은 작품들의 재연에 집중했는데, 그나마 폭격과 포격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방송국 건물이 남아 있었던 덕에 방송용으로 몇 곡을 녹음할 기회도 있었다. 그 중 글라주노프의 교향시 '스텐카 라진' 은 소련군이 본국으로 가져간 테이프로 음반화되었는데, 한동안 푸르트벵글러 지휘의 빈 필 연주로 잘못 소개되었다. (멜로디야나 러시안 디스크 등 대다수의 음반이 그렇게 표기하고 있고, 밑에 소개할 타라의 추모반에서야 정확한 정보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보르하르트와 베를린 필의 전후 활동은 3개월도 되지 않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것도 타의에 의한 것이었는데,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8월 23일에 베를린 필과 전후 통산 22회 째의 공연을 마친 보르하르트는 '에밀 아저씨' 의 동료 조직원이기도 했던 저널리스트 루트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와 함께 평소 친분이 있던 영국군 장교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장교는 운전병이 딸린 자신의 군용 지프를 보냈는데, 당시 연합군 점령 지구에서는 어디에서나 엄격한 야간 통금 조치가 실시되고 있었다.
보르하르트 일행을 태운 차는 빌머스도르프 지구의 미군 검문소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미군 보초가 차에 정지 신호를 보냈지만 영국군 운전병은 이를 무시했는지 아니면 오인했는지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미확인 차량이 그대로 통과하자 보초는 경계 수칙대로 차에 위협 사격을 가했는데, 타이어에 총을 쏴 강제로 차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라서 그랬는지, 조준을 잘 맞추지 못한 채로 사격이 가해졌다. 총탄은 타이어가 아닌, 뒷좌석에 타고 있던 보르하르트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추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필은 자신들의 전후 첫 지휘자를 잃어버렸고, 다시금 후임을 물색해야 했다.
그나마 베를린 필 단원 중 한 사람이 젊은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를 천거해서 곧바로 초빙할 수 있었는데, 바로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다. 첼리비다케 역시 임시직이기는 했지만, 전임자였던 보르하르트와 마찬가지로 푸르트벵글러 없는 베를린 필을 열성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첼리비다케마저도 비나치화 심사에서 활동 허가를 받고 복귀한 전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인기를 쫓아갈 수는 없었고, 결국 종전 후 악단의 존립에 크게 기여한 두 지휘자는 공로에 걸맞지 않게 직위를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 자체도 사실상 활발히 언급될 기회가 없었고.
*그나마 첼리비다케는 1954년 결별 후 한참 뒤인 1992년에 베를린 필을 다시 지휘해 '화해 콘서트' 를 열 기회가 있었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화해였는지, 아니면 그 이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는 의문이고.
보르하르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은 한참 뒤에야 이뤄졌는데, 1988년 10월 20일에 베를린 거주 경력이 있던 유명 인사들이나 단체, 사적지에 붙이는 '베를린 기념 명패(Berliner Gedenktafel)' 가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 지구의 나치 시대 거처였던 집에 부착되었다(참고로 같은 거주자였고, 비명횡사의 순간에도 함께 했던 루트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의 이름 밑에 병기됨).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최초의 기념 사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 4월 5일에는 역시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 지구에 있는 음악학교가 '레오 보르하르트 음악학교' 로 개칭되었다. 사후 50년이 되던 1995년에는 베를린 필이 상임 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말러의 교향곡 제 6번을 연주하는 추모 공연을 가졌고, 1999년 8월에는 마티아스 스트레스너가 쓴 독일어 전기가 트란지트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베를린 기념 명패 사진: 클릭 (위키피디아 독어판)
*레오 보르하르트 음악학교 홈페이지의 보르하르트 약력: 클릭 (독일어)
그리고 2003년에는 프랑스 복각 음반사인 타라(Tahra)에서 보르하르트가 전쟁 전과 후에 남긴 녹음들을 섞어서 기념 음반을 발매했다. 원래는 그가 남긴 거의 모든 녹음을 집대성한 CD 두 장짜리 세트로 발매할 예정이었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한 장짜리로 발매되었다. 포함되지 않은 것들 중에는 작곡자 자신이 피아노 협연을 맡은 장 프랑세의 피아노 소협주곡과 보케리니, 들리브, 주페, 그리그, 레비코프 등의 소품들이 있는데, 후속 음반의 발표와 수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