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개인적으로 '오페라' 를 보러 간 적은 딱 두 번 뿐이었다. 그것도 꽤 돈을 깨가며 봤었는데, 그 만큼 오페라 하나를 만드는데 드는 인력과 자금은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국립이나 시립 오페라단 같은 단체들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겠고.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분업을 하는 음악인과 단체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흥행이건 예술적인 가치던 논할 수 있다. 유명 성악가 한두 명이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나머지 조연이나 관현악단, 합창단, 발레단이 말면 그걸 가지고 까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많은 오페라단들이 자체적으로 관현악단과 합창단, 발레단을 꾸리고 있는데, 한국의 국립오페라단 같은 경우에는 오페라단 조직 자체와 오페라합창단 두 단체만으로 구성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국립발레단은 독립 조직이고, 국립교향악단도 마찬가지로 콘서트 전문 악단이었던 데다가 전통 집권 후 KBS로 이관된 뒤 지금까지 재결성이나 창단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이니 오페라 공연을 하려면 외부에서 인력을 끌어모으는데 예산을 대야 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그것 마저도 합창단을 없애고 나머지 예술단들의 인력이나 급여도 감축하고 있다는데, 이래서 경제 논리를 앞세워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이들이랑 대화의 가치를 못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국립오페라합창단이 해단된 지 한 달도 훨씬 넘었는데, 15일에 압구정동 장천아트홀에서 해직 단원들이 모여 음악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봤다.
공연장 내 사진 촬영은 금지였기 때문에-내 앞열의 누군가는 열심히 폰카를 찰칵거리고 있었지만-, 인증은 그저 공연 시작 전 로비에서 받은 입장권 짤방으로. 물론 제값 내고 샀다.
사실 해직 음악가들의 공연은 집회 절반, 공연 절반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좀 조심스럽기도 했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다만 프로그램을 보니 음악회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라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고.
일단 '인사' 라는 제목이 붙은 1부 순서가 예정대로 시작되었는데, 그 때까지는 1층 객석의 1/3 정도만 차 있던 상황이라 '흥행' 에는 실패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우선 합창단 테너 단원이자 공공노조 국립오페라단 지부장인 조남은이 간단한 개최사를 했고, 이어 공공노조 이영원 위원장이 나와 발언을 했다. (이 공연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정치적 발언' 이었는데, 다만 우려했던 것처럼 구호를 외치거나 심한 독설이 섞인 발언이 아니라 차분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어 공연에 청중으로 참가한 국회의원 최문순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끝으로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때쯤 뒤를 돌아보니 1층 객석의 2/3 이상이 채워져 있었는데, 물론 장천아트홀이 그렇게 큰 공연장은 아니었지만-1층만 따지면 524석이다-특별히 중앙 언론이나 방송사를 통해 대대적인 홍보가 되지 않은 공연 치고는 꽤 많은 청중이 몰린 셈이었다.
공연은 우선 공공노조 국립극장 지부 전통음악 단원 다섯 명의 찬조 출연으로 시작되었는데, 피리 3중주와 타악 주자 두 명이 연주하는 창작곡이었다(다만 곡명이나 작곡가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이어 한겨레신문 시사다큐 팀이 제작한 동영상이 상영되었는데, 국립오페라합창단의 해단 수일 전 모습과 해단 직후의 거리 공연이 중심이 되어 제작되어 있었다. (중앙 방송사들의 다큐와 달리 특별히 강한 정치적 어조나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동정의 눈빛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것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두 순서에 이어 합창단의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국립오페라합창단 단원 모두가 출연한 것은 아니었고 반주자와 지휘자를 포함해 24명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역시 찬조출연으로 국립오페라단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직된 성악가 두 명-베이스 함석헌과 소프라노 오미선-과 공공노조 세종문화회관 부지부장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정이 공연했다. 연주된 곡들은;
-혼성합창-
1. 김희갑: 향수
2. 홍난파: 사공의 그리움
3. 가에타노 도니체티: 오페라 '라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 (테너 독창 포함)
4.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
-독창 (베이스 함석헌/피아노 박선정)-
5. 프란츠 슈베르트: 가곡 '음악에'
6. 조아키노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비방은 산들바람처럼
-여성합창-
7. 이현철: 푸르른 바람아
8. 사이먼 & 가펑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9. 황철익: 꽃파는 아가씨
-전기바이올린 독주와 2중창 (전기바이올린 김은정/소프라노 정찬희/베이스 이정상)-
10. 롤프 뢰블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독창 (소프라노 오미선/피아노 박선정)-
11.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 지옥의 복수는
12. 자코모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남성합창-
13. 아델버트 스프레이그: 우정의 노래
14. 한국 가요 연곡 (프로그램에는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병사들의 합창이 적혀있었는데, 변경된 것 같다)
15. 리처드 로저스: 뮤지컬 '남태평양' 중 여자보다 귀한 것은 없다네
-혼성합창-
16.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17. 이수인: 내 맘의 강물
18.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 (테너/소프라노 독창 포함)
19. (작곡자 불명): 가스펠 'O Happy Day'
-앵콜-
20. 사랑합니다
21. 동백섬
22. 경복궁타령
꽤 다양한 언어와 배경의 곡들이 조합되어 있었는데, 장중한 오페라나 가곡에서부터 직접 코믹한 연기도 하며 부른 로저스 곡까지를 아우르고 있었다. (연기가 필요한 곡을 넣은 것은 이들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합창 음악은 이러해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도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음악적 호불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대학교 때 합창지도를 잠시 배웠을 때는, 서양 성악의 벨 칸토 발성이 합창에 꼭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들었었다-. 그러나 강한 정치적 의견의 피력을 최대한 줄이고 자신들이 음악인임을 강조하고자 할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역시 공연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들의 음악적 역량에 대해서는 물론 호불호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고, 이들의 노래에 당국자나 해단 문제와 관련된 관계자들의 마음이 쉽게 움직일 것이라고 낭만적으로 예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상이나 음악적인 취향을 떠나, 수 년간의 활동으로 숙련된 합창단이 계약 조항이나 예산 문제 같은 행정적/경제적인 문제와 '인맥 다툼' 으로 해단되는 상황에 분명한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찾아가서 본 것이었고.
동시에 이러한 공연에 대해 음악 잡지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몇몇 잡지를 빼고는 이들의 활동이나 사건의 경과에 대해 집중적이고 연속적으로 보도하는 예를 아직도 찾아볼 수 없는데, 목수정 같은 치기어린 정치꾼들의 돌출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만용보다는 이 사건의 실질적인 위치와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예술계의 움직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