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하도 경찰과의 충돌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아마 현장에 가서 직접 보지도 않고 기사들만 접하고 썼을, 특정 인물에 대한 조문 거부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던 '양질의(???)' 양비론 & 계몽주의드립 포스팅들 덕분에 아예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차라리 월요일이 낫다고 생각했고. 주중에는 어차피 독일문화원 가기 위해서라도 외출해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는 것이 차비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불의의 상황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독일문화원에서 덕수궁 앞까지 도보로 이동했다. 평소에 오래 걷는 것을 즐겨 했기 때문에 이동 과정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는데, 숭례문로터리에서 우연찮게 교통사고 장면을 목격해서 좀 꺼림직했고. (부상자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덕수궁앞은 여전히 경찰 버스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조문용 천막들이 두 개 마련되어 있었고, 그 옆에 의무실과 상황실을 겸한 천막이 딸려 있었다. 취재진들은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오가고 있었고, 탄핵소추 서명을 받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현명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해 서명은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평일 낮이라 그랬는지 대기 행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덕수궁 돌담 옆에서 줄을 서달라는 표시를 따라 섰는데, 조문용 천막에 갈 때까지 약 30분 정도 걸렸다. 주말에 조문을 위해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렸다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었고, 큰 돌발 상황이나 무질서함도 내가 봤던 한 없었다.
돌담에는 신문 사설과 유서 정리본, 격문과 추도문 등이 간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자세히 읽어볼 틈도 없이 줄이 계속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에, 그냥 사진만 재빨리 찍어가며 앞으로 걸었다.
돌담에서 두 줄로 서서 기다리던 행렬은 대한문 앞에서 횡대형으로 쭉 펼쳐져서 기다리게 되어 있었는데, 대기선을 두 단계로 나눠서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는 조문용 국화를 1인당 한 송이씩 나눠주고 있었고.
대한문 그늘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앞으로 나서서 다시 기다렸는데, 한 열당 조문 시간은 1분 남짓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다만 뙤약볕이 꽤나 세고 사람들이 몰려 있던 만큼 덥기는 더웠고.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물을 글썽이거나 흐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지막 대기줄에서 찍어본 분향소 왼편과 오른편.
조문중인 사람들. 영정과 향로, 고인의 저서, 막걸리병과 종이컵, 화환과 각종 사진들이 놓여져 있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담배를 찾았다는 증언 때문인지, 국화와 함께 담배 한 개비 또는 한 갑을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차례가 되자 천막으로 들어가 꽃을 놓고, 두 번 반 절을 하고, 상주로 보이는 이에게 반절을 한 뒤 빠져나왔다. 당초의 우려와 달리 너무나 일사천리로, 아무 문제 없이 이루어진 조문이라 오히려 이상하기까지 했는데, 저녁이 되면 또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갔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유언이 어쨌건 다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여기서 나는 굳이 둘 다 잘못하고 있다는 식의 성급한 양비론을 펼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대세가 이러니 그 사람이 싫어도 그냥 추모하겠다는 식의 궁색한 포스팅을 하는 것도 대단히 언짢고.
나는 애초부터 선거철에 이 정권에 표를 던져주지도 않았고, 뇌물 관련 재판 훨씬 이전부터 모든 분야에 걸쳐 하고 있던, 그리고 하고 있는 개드립 때문에 분노를 넘어서 아예 냉소와 무시 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 조문 거부를 당했다면, 거부를 한 사람보다는 거부를 당한 사람들의 됨됨이를 우선 따지고 볼 일이다.
계획과 일정에 차질이 없다면, 아마 나는 올해 안으로 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이 그립네 뭐네 할 것 같지는 않다. 분노와, 그 분노를 일으킨 주체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며 계속 개드립을 하는 한 말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말은 앞으로 잃어버릴 10년, 20년 혹은 30년이 될 것 같아 두렵고 씁쓸하다.
뱀다리: 독일문화원에서는 어학 강좌 외에 강당인 오이로파잘(Europa-Saal)에서 독일 영화 상영이나 세미나, 소공연 등을 개최하곤 한다. 그렇게 크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뮌헨 실내 관현악단 내한 공연과 발맞춰 '음악과 권력' 이라는 테마로 개최했던 세미나 때부터 솔깃했었고(다만 그 때는 세미나 시간이 어학 수업중이라 참석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6월 5일 저녁 7시에 마찬가지로 '음악과 권력' 의 테마를 가지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의 나치 시대 치부를 드러낸 영화 '제국 관현악단(Das Reichsorchester)' 의 상영과 함께 음악학자 이경분의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수업과 겹치지도 않으니 꼭 가서 볼 생각이고. 국립오페라합창단 해단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사퇴 등으로 정치 권력의 예술 개입과 통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나라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꽤 중요한 기회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