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문화사에서 나오고 있는 예술인 평전들 가운데에는 히치콕 같은 영화감독이나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 등도 눈에 띄지만, 의외로 재즈 아티스트들을 다룬 것들이 많이 보인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빌리 홀리데이, 마일즈 데이비스, 빌 에반스, 그리고 쳇 베이커(Chet Baker, 1929-1988).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은 빌 에반스를 제외한 네 권인데, 저마다 뛰어난 업적은 물론이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삶의 질곡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어서 꽤 인상깊게 읽었었다. 다만 막말로 '음악은 위대했어도 인간적으로는 정말 개자식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던 인물이 바로 쳇 베이커였고.
트럼페터 겸 보컬리스트 쳇 베이커는 흔히 바리톤 색소포니스트 제리 멀리건 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서부를 거점으로 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 의 명인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재즈인들의 평이 지금 만큼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비밥의 열정과 스피드에 푹 빠진 이들은 쳇의 연주를 '다 죽어가는 나약해빠진'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재즈신에서의 평가가 어쨌던, 쳇은 당시 기준으로서는 아주 섬세한 미소년 격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여성팬들이 몰려들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면모 뒤에는 지독한 마약 중독이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마약 사건으로 미국 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연주하러 다닌 거의 모든 나라에서 물의를 빚었다.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심지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까지 했다.)
결국 말년에 가서는 음악 보다는 마약이 인생의 필수 요소가 되다시피 했고, 약값을 위해 경찰의 끄나풀로 자처하며 같이 마약을 하던 동료 뮤지션들의 검거에 도움을 주는 치졸한 짓도 했다. 가족들의 부양에 대해서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헛점 투성이의 계약서에 아무렇게나 사인을 해 자신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과거의 매끈했던 얼굴은 70대 노인처럼 주름살이 가득 패여 쭈글쭈글해졌고, 몸도 마약 주사 자국으로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고.
쳇 베이커는 1970년대 후반에서 사망할 때까지 주로 유럽을 돌며 공연했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그의 음악 뿐 아니라 숱한 범죄 경력으로 아주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유럽에서도 쳇이 과거에 누리던 만큼의 명성을 얻기 힘들었는데, 더군다나 마약으로 인해 몸을 완전히 망쳐버린 연주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던 쳇이 생애 최말년이었던 1988년에 자신의 실력을 마지막으로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북독일 방송국(NDR)의 프로듀서였던 쿠르트 기제가 쳇을 위한 대규모 콘서트를 하노버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이었는데, 기제는 이 공연을 위해 방송국 산하의 NDR 빅밴드 뿐 아니라 관현악단-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까지 섭외해 치밀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여러 차례의 리허설이었는데, 다른 뮤지션들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쳇 베이커 자신은 공연 직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쳇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방송국 수위가 자신을 떠돌이 노인 정도로 여겨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하고.
아무튼 기제가 공연 계획을 포기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쳇과 연락이 재개되었고, 연습 부족을 염려한 기제가 리허설을 녹음한 테이프를 제공해 그것을 들으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 공연은 예정대로 1988년 4월 25일에 하노버 방송국의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공연 직전까지도 쳇은 몸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에 오른 뒤에는 큰 문제 없이 연주하고 노래했는데, 물론 예전보다 더 음을 아끼고 있는 인상이었다. (물론 가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는 과시용으로 빠른 비밥 넘버를 연주한 적도 있지만, 쳇의 본령은 깔끔하고 차분한 쿨이나 발라드에 있었다.)
쳇을 유명하게 만든 'My Funny Valentine' 이 특히 감명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연주한 이런 발라드 넘버도 분명히 호소력과 중독성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마일즈 데이비스나 셀로니어스 몽크 같은 밥 계통 작곡가들의 곡을 빅밴드와 연주한 것도 꽤 인상적이었는데, 트럼펫 소리가 너무 연해서 밴드와 같이 코러스를 연주할 때는 거의 묻힌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해도 큰 문제 없이 차분하게 밴드와 보조를 맞춰가며 리드미컬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방송국에서 기획한 공연이었던 만큼, 실황은 NDR에 의해 녹음되었다. 공연을 본 많은 청중들은 자신들의 일생에서 이만한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쳇은 공연 종료 직후 무심히 네덜란드로 가는 차에 올라 마약을 구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쳇의 공연 기록은 파리의 클럽에서 몇 차례 공연한 것과 네덜란드 뮤지션들의 잼 세션에서 몇 곡을 연주한 것이 전부다. 이들 연주는 녹음되었다는 정보가 없고, 해적판도 없는 상황이다. 하노버에서 했던 연주는 마지막 콘서트는 아니었어도, 쳇이 남긴 마지막 녹음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쳇이 1988년 5월 13일에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도 논란이 되는 실족으로 사망한 후, 독일 음반사인 엔야(Enja)에서 하노버 실황이 두 장의 CD에 나뉘어 출반되었다. 이 엔야 음원을 가지고 한국에서 굿 인터내셔널이 길쭉한 패키지를 새로 디자인해 로컬 출반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신나라레코드 용산전자랜드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 2003 Goodinternational
굉장히 수수한 디자인 때문에 말이 많았던 엔야 원본과 달리 이 패키지는-CD 수납장에 넣기가 힘들다는 점이 문제기는 하지만-훨씬 세련된 디자인에 한국어 해설과 연주자들의 이름, 연주곡과 편곡자 등의 정보가 꽤 일목요연하게 기입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도 빠뜨린 것이 하나 있는데, 마지막에 한 번 더 삽입된 'My Funny Valentine' 이다.
(*마지막 트랙의 저 곡은 1988년 4월 25일의 실황이 아니라, 1987년 11월 14일에 함부르크 대학교 강당에서 NDR 빅밴드와 공연한 실황이다. 함부르크 실황도 엔야에서 출반되었는데, 다만 거기에는 이 'My Funny Valentine' 이 빠져 있다.)
뱀다리: 최근에 쳇 베이커가 1953-54년에 현악 합주를 대동하고 녹음한 'Chet Baker with Strings' 가 유럽반 CD로 수입되었다는데, 물론 쳇의 진가가 발휘된 녹음은 아니라는 것이 중평이긴 하지만 찰리 파커와 클리포드 브라운의 현악 합주 협연반을 구입한 터라 왠지 연달아 구입하고픈 충동이 생겨서 질러 버렸다. 앞으로도 피를 열심히 뽑아야겠지...lll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