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나 기타 파시즘의 준동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들은 일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고달픈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 뿐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풍토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심리적인 요인도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었을테고.
이미 이 시리즈에서 한 번 다룬 적 있었던 체코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ů, 1890-1959)도 마찬가지로 이주 초기에 곤궁에 처한 바 있었다. 마르티누는 이미 1923년부터 고향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주하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일이나 그 점령지-체코슬로바키아나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예술인들보다는 그리 큰 타격을 입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마르티누는 다급하게 망명지를 찾아야 했다. 그는 1941년에 평소 그리 잘 알지도 못했던 미국으로 프랑스인 아내와 함께 피신했고, 뉴욕에 거처를 정했다. 마르티누는 그 당시 영어 실력도 변변치 못했고, 프랑스에서도 그리 돈벌이가 시원찮았던 터라 돈도 부족한 채로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음악적인 토양이 그다지 탄탄하지 못한 나라였다. 당시 유럽에서 최신 조류를 달리던 음악들도 미국에서는 맥을 못추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작곡가들은 그 나라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타협' 을 해야 했다. '타협' 한 이들은 대개 신고전주의 같은 청중들에게 그리 어렵잖은 성향을 띄는 작품들을 썼는데, 힌데미트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르티누도 정말 절박한 생계가 작품 노선을 바꾸도록 강제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또한 프랑스 정주 후기부터 신고전주의 성향을 띄기 시작했다. 특히 교향곡의 경우, 유럽 정주 시절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던 것을 미국 망명 후 여섯 곡이나 단숨에 작곡했다.
그 중 1-5번 다섯 곡은 1942년부터 매년 한 곡씩 써냈는데, 다행히도 미국 청중들의 구미에 잘 맞았는지 쿠셰비츠키나 라인스도르프, 오먼디, 뮌슈 등의 지휘로 초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물론 마르티누는 신고전주의 식의 틀에만 집착하지는 않았고, 거기에 고향의 민속음악 요소를 적절히 섞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45년 봄이 되자, 연합군은 독일과 이탈리아 등 추축국 영토로 진입해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마르티누도 이런 정세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독립국이 되어 자유로운 음악 활동의 토양이 마련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르티누는 망명 정부를 통해 재건될 프라하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약속받고 있었고, 미국 체류도 마무리지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기대감 때문인지, 교향곡 제 4번은 전작들보다 훨씬 낙관적이고 생기발랄한 악상들로 구성되었다. 예전 곡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4악장 구성에 너무 길지 않은 정도(약 31분)로 긴축되어 있는데, 다만 느린 3악장의 경우에는 이전 작품들의 느린 악장들에서처럼 서정적이고 약간은 울적한 악상을 스트링 연주에 실어놓았다.
초연은 그 해 11월 30일에 유진 오먼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연주로 이뤄졌는데, 그 때까지도 마르티누는 귀국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비록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어정쩡한 형태의 연립 과도정부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던 상황이었기는 했지만.
해방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마르티누가 한 때 단원으로 몸담기도 했던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Česká filharmonie)가 상임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ík)과 그간 연주하지 못했던 유태인/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부활 공연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쿠벨릭은 1934년 1월에 같은 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서 첫 공식 데뷰 무대를 가진 뒤 계속 이 악단을 지휘했고, 심지어 독일의 체코 점령 치하에서도 고난을 함께 한 바 있었다.
적국으로 망명했던 탓에 마찬가지로 금지곡 목록에 등재되었던 마르티누의 곡들도 자주 무대에 올랐는데, 이 교향곡은 1946년 10월 10일에 프라하에서 위의 악단과 지휘자에 의해 체코 초연이 이뤄졌다. 이들은 그 직후 폴란드와 영국 등지로 순회 공연을 떠났고, 이 때도 이 곡이 메인 레퍼토리로 연주되었다. (참고로 체코 필과 쿠벨릭 콤비는 마르티누의 후속 교향곡인 5번도 1947년 5월 28일에 세계 초연했다.)
그러나 아직 미국에 머물고 있던 마르티누도, 그리고 불안한 정세 속에서 고국의 음악계 재건에 앞장섰던 쿠벨릭도 결국 1948년 2월 말에 벌어진 쿠데타 후에는 자신들의 기대와 포부를 접어야 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연립정부 내각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것이었는데, 이는 곧 예술 활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마르티누는 결국 귀국 계획을 모두 포기하고 계속 미국에 머물렀고, 교향곡으로는 마지막이 된 6번을 비롯한 곡을 더 작곡한 뒤 고국에서 비교적 가까운 스위스로 옮겨가 여생을 보냈다. 체코 정부는 그의 활동과 지위를 보장해 준다면서 귀국해줄 것을 수 차례 청했지만, 그는 쿠벨릭과 마찬가지로 고국이 민주화되지 않는 한 갈 생각이 없다면서 제의를 거절했다.
쿠벨릭은 쿠데타 이후 약 4개월 가량은 고국에 머물며 사태 추이를 지켜본 것 같은데, 적어도 6월에는 망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는 그런 속내를 알리지 않은 채로 계속 음악 활동을 했는데, 6월 10일에는 이 교향곡을 체코 필과 함께 프라하 도모비나 스튜디오에서 수프라폰(Supraphon. 이후 국영화됨) 스탭진들과 녹음했다.
단원들과 녹음 스탭진들 대부분은 아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이 녹음은 쿠벨릭과 체코 필의 마지막 스튜디오 녹음이 되어 버렸다. 이들은 7월 1일 공연에서도 이 곡을 무대에 올렸는데, 공연 후 16일 뒤 쿠벨릭은 영국 순회공연 중 망명해 버렸다. 체코 정부는 즉시 쿠벨릭의 국적을 박탈하고 그가 남긴 녹음에 대한 판매 금지령을 내려 응수했고.
이후 이 마르티누 녹음은 반세기가 넘도록 묻혀 있었는데, CD로 나온 것은 2004년에나 가서였다. 그것도 수프라폰을 통해서가 아니라, EMI와 IMG가 공동 기획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들' 시리즈에서 발매되었다.
ⓟ 2004 IMG Artists (UK) Ltd./EMI Records Ltd.
사실 저 CD는 이 곡을 들으려고 산 것은 아니었고, 한 동안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야나첵의 '신포니에타' 때문에 질렀다. 하지만 그 곡의 녹음은 내가 구하고 있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연주의 스테레오 녹음 소스(도이체 그라모폰)가 아니라 빈 필 연주의 모노 녹음 소스(데카)였다. 녹음 상태도 연주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노리고 있던 녹음은, 결국 2주 쯤 뒤에 종로의 '서울레코드' 에서 가까스로 1990년대 중반 나왔던 국내 라이센스 CD를 찾아내 구입할 수 있었다.)
물론 마르티누 녹음은 그보다도 더 오래된 데다가 테이프 녹음도 아닌 SP 시대의 원판 다이렉트 커팅 녹음이었으니, 수록 녹음들 중 음질은 가장 좋지 않다. 하지만 별 기대도 안하고 들었음에도 꽤 마음에 들었는데, 시대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스튜디오 녹음답게 각 성부가 어느 정도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듣는데 그리 짜증이 솟구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애초부터 빈티지 매니아를 자청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쿠벨릭이 이후 이 곡을 다시 녹음했다는 기록도 없으니, 역사적인 기록물의 가치로도 꽤 소중한 아이템이고. 하지만 저 시리즈는 불과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절판 조치되었고, 재판 계획도 없다고 한다. 그나마 대형 음반점들에 남아 있는 재고들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고. (나는 신촌 M2U에서 구입했다.)
뱀다리지만, 1948년 망명 이후 쿠벨릭이 체코 필과 해후한 것은 1990년 5월 12일에나 가서였다. 쿠벨릭은 그 당시 건강 악화로 인해 사실상 반은퇴 상태에서 객원 지휘만 몇 차례 하는 상태였는데,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함께 민주 체제의 첫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의 초청을 받고 '프라하의 봄 음악제' 개막 공연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 때 공연된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전곡은 수프라폰에 의해 실황 녹음되었고, 쿠벨릭이 남긴 해당 작품의 연주 중 최고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1년 뒤인 1991년 11월 2일에 체코 필 일본 투어의 일환으로 도쿄 산토리홀에서 같은 곡을 한 번 더 공연했는데, 이것 역시 일본 음반사인 알투스와 NHK에서 각각 CD와 DVD로 출반되었다. 이것이 쿠벨릭의 마지막 콘서트였는데, 데뷰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같은 악단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