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뮤 생상(Camille Saint-Saëns, 1835-1921)은 프랑스 작곡가들 중 진정한 의미의 '엄친아' 였는데, 불과 네 살때 처음 작곡에 손을 대 이후 작곡가,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로 프랑스 음악계에서 대활약한 것 외에 철학과 천문학, 지질학, 식물학, 수학 등을 '취미' 로 삼아 책을 간행하거나 직접 망원경을 만들거나 세미나를 개최하고 참여할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다재다능하고 거기에 부와 명예, 장수까지 웬만한 '좋은 것' 을 다 누리고 산 사람은 그다지 큰 가십거리가 없어서 오히려 잘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생상도 그의 작품 외에 인생에 대해 언급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고, 기껏해야 '후로게이설(...)' 정도가 가끔 떡밥으로 던져질 따름이고.
생상은 구조와 법칙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였는데,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자주 연주되는 곡들의 대부분이 협주곡이나 교향곡, 오페라 같은 고전 형식의 것이기도 하고. 물론 유명한 곡들만 봐서는 그렇게만 생각하겠지만, 잘 뒤져보면 서양 음악사 사상 최초로 영화음악을 작곡한 인물이기도 하다(앙리 라브당 감독의 영화 '기즈 공작의 암살(1908)').
다만 교향곡. 생상 교향곡 중에 압도적으로 많이 연주되고 거론되는 곡은 딱 한 곡, 3번 뿐이다. 오르간이 들어가는 것 때문에 '뽀대만빵' 의 스펙터클한 작품으로 애호받고 있는데, 물론 오르간 들어간 교향곡은 이거 말고도 여럿 있지만 이 곡만큼 유달리 강조되는 곡도 없다. 하지만 3번 이전의 곡들은?
생상의 교향곡은 번호 붙은 것이 세 곡, 그리고 번호 없는 것이 두 곡 합해서 다섯 곡이 현존하고 있다(10대 시절의 습작 두 곡도 있지만, 모두 미완성임).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굉장한 장수를 누린 인물임에도 '겨우 다섯 곡' 뿐인데, 그래도 프랑스 낭만시대 작곡가들 중 이 만큼 교향곡을 많이 남긴 인물은 거의 없어서 꽤 이채롭다.
교향곡 A장조 (1850경)
교향곡 제 1번 E플랫장조 (1853)
교향곡 F장조 '로마(Urbs Roma)' (1856)
교향곡 제 2번 A단조 (1858)
교향곡 제 3번 C단조 (1886)
위 목록을 보면 다섯 곡 중 네 곡이 1850년대에 집중적으로 작곡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우 10대 중반~20대 초반의 나이에 몰아서 쓴 셈이다. 그나마 그 중 초기 습작이었던 A장조와, 제목을 봐서는 아마도 당시 프랑스 신예 작곡가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던 '로마 대상' 을 위해 썼을 법한 F장조 두 곡은 생상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출판하지 않았고.
그나마 출판된 곡들 중에서도 1번과 2번은 생상 생전에 반응이 좋았다고는 해도 지금 와서는 거의 연주도, 녹음도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내가 확인해본 3번 이전 교향곡들의 음반도 겨우 조르주 프레트르가 빈 교향악단과, 장-자크 칸토로프가 타피올라 신포니에타와 낱장 녹음한 것이 아주 가끔 눈에 띌 뿐이었고.
3번만 녹음한 지휘자는 무수히 많지만, 나머지 네 곡을 합쳐 전집을 완성한 지휘자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 뿐이다. 바로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인데, 지금은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프랑스 국립방송 관현악단(Orchestre National de l'ORTF)' 의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을 때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프랑스 관현악 작품들의 명반을 많이 내놓아 프랑스 음악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마르티농은 전집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선 가장 인기있는 3번은 제쳐두고 1번(1972.6.11-12)과 2번(1972.9.29-30)을 먼저 녹음했다. 시작부터 대인배 기질을 보여준 셈인데, 다만 미출판작들이었던 A장조와 F장조 두 곡은 그 때까지도 출판되지 않았던 터라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두 곡의 악보가 에디치옹 프랑세즈 드 뮈지크라는 음악 출판사에서 출판되자, 마르티농은 잽싸게 세션을 마련해 녹음했다(1974.9.18-20 & 23). 그리고 남은 3번은 1년 뒤인 1975년 1월 9-10일에 녹음했고, 이렇게 다섯 곡을 합친 최초의 생상 교향곡 전집 세트가 EMI 프랑스 지사인 파테 마르코니를 통해 출반되었다. (이미지 삽입. CD 커버)
ⓟ 1989 EMI Pathé Marconi S.A.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경쟁자가 거의 없는 독보적인 프로젝트였는데, CD로는 1989년에 두 장짜리 세트로 복각되어 나왔다.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빌려와 들은 것도 같은 물건이었는데, 물론 관심사는 '명곡' 인 3번이 아니라 다른 네 곡들이었고.
확실히 생상은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틀에만 안주한 인물은 아니었다. 교향곡만 봐도 1번에서는 전통 4악장제를 취하면서도 베토벤 교향곡 5번처럼 3-4악장을 그대로 이어 연주하도록 하고 있고, 관현악 편성에 당시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관악기였던 색소른-색소폰으로 유명한 벨기에 악기 제작자 아돌프 작스가 발명한 금관악기-을 첨가하는 대담함도 보여주고 있다.
1번과 2번 사이에 작곡한 F장조 곡의 경우에는 생상 교향곡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곡인데, 이 곡에서도 1악장의 느린 서주를 제외하면 전곡에 느린 악장이 없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물론 Moderato assai serioso라고 지정된 3악장이 그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보통 빠르기인 모데라토라는 설정에서 보듯 결코 느린 속도의 대목은 아니다.) 2번도 3악장 스케르초의 A-B-A' 반복 형식에서 A'를 굉장히 축약시키는 파격을 행하고 있고, 열정적인 타란텔라 리듬으로 질주하는 4악장은 멘델스존 교향곡 4번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마르티농은 작곡가로도 활동한 인물이었고, 그 만큼 이지적인 자세로 면밀히 곡을 분석해 공연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휘자였다. 이들 곡도 '듣보잡' 이고 뭐고를 떠나서 독자적인 작품들로 인식하고 녹음한 기색이 역력해서 인상이 좋았고. 다만 3번의 경우에는 좀 문제가 달라진다.
3번은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가는 탓에, 오르간이 있는 콘서트홀이나 교회 혹은 성당 등에서 공연하고 녹음하는 경우가 많다. 개중에는 바렌보임이나 카라얀처럼 관현악 녹음과 오르간 녹음을 따로 만들어 합치는 경우도 있는데, 마르티농의 경우 군사박물관과 나폴레옹 묘로 유명한 파리 앵발리드(Invalid)의 생루이 성당을 녹음 장소로 삼았다. (오르간은 베르나르 가보티(Bernard Gavoty)가 성당에 설치된 것으로 연주함)
하지만 성당에서 녹음했음에도 오히려 잔향이나 공명이 부족한 편인데, 특히 저음역이 너무 약하게 녹음되어 오르간 페달의 장엄한 소리가 굉장히 많이 깎여나가 버렸다. 비단 오르간 뿐 아니라, 관현악 사운드도 마찬가지로 너무 딱딱하고 멀찌감치 녹음된 인상이었고. 그리고 팀파니가 다른 악기보다 너무 튀게 녹음되어 완고한 인상까지 주고 있다.
아마 가장 유명한 곡인 3번을 듣고 싶어서 구입하는 이에게는 꽤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물건인데, 개인적으로는 위에 쓴 바렌보임같이 뛰어난 녹음 기술로 유명한 것을 고르던가 아니면 녹음이 좀 오래되기는 했어도 박력과 카리스마로는 본좌급인 뮌슈 등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현명할 것 같고.
마르티농은 이외에도 폴 뒤카의 교향곡 C장조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후속작인 '렐리오' 같은 또다른 듣보잡도 EMI에 녹음한 바 있는데, 둘 다 계속 재판되고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구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아무튼 아르코예술정보관은 뒤지면 뒤질 수록 보물창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특히 이렇게 오래된 CD들의 경우에는 가짓수가 한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꽤 놀랄 만한 것들을 많이 소장 중이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