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 울려퍼진 브루크너 교향곡 5번.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의 교향곡들 중 가장 복잡장대하기로 유명한 곡을 따지자면 두 곡이 특히나 경합하는 상황인데, 바로 중기 작품인 5번과 후기 작품인 8번이다. 악기 편성으로만 따지면 8번이 좀 더 몸집이 크기는 하지만, 대위법의 활용도나 코랄 등 '종교적인' 카리스마의 위용으로 따지면 5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고.

다만 그러한 복잡장대함이 오히려 연주의 설레발을 낳기도 하는데, 특히나 브루크너 음악의 보급도가 아직은 그리 높지 않은 한국에서는 아직도 두 곡의 연주 빈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공연장에서 실연으로 들어본 브루크너 교향곡은 1, 4, 6, 7, 9번 다섯 곡이다.)

그럼에도 저 곡을 각별히 아껴서 여러 종류의 녹음을 남긴 지휘자들도 있는데, 특히 브루크너 교향곡의 1-9번 세트를 두 차례나 완성한 독일 지휘자인 오이겐 요훔(Eugen Jochum)이 그랬다. 요훔은 지휘 활동 초기 시절부터 브루크너 교향곡을 자주 무대에 올렸는데, 심지어 당시 녹음 기술의 현시창에도 불구하고 텔레푼켄 등에 음반 취입까지 했을 정도였다.

2차대전 종전 후 더욱 향상된 마그네토폰(테이프 레코더)의 성능과 미국에서 상업화에 성공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보급은, 입체적인 음향을 요구하는 브루크너 교향곡의 녹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진전이었다.

비록 00번과 0번 두 곡은 모두 누락되어 진정한 전집이 아니라는 핸디캡이 있기는 하지만, 요훔이 그 시기를 잘 맞춰서 도이체 그라모폰(이하 DG.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EMI(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에 녹음한 두 개의 세트는 아직도 브루크네리안들의 필수 소장 품목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세트는 DG의 것인데, 주로 1964년 1월부터 1967년 1월까지 약 4년간 녹음한 교향곡들을 수록하고 있다. 다만 5번의 경우는 집중적으로 녹음 작업을 한 시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시기의 녹음이 들어 있는데, 이후 DG에서 이 곡을 재녹음하지는 않았고 첫 LP 세트 발매 때도 그대로 포함되었다.

1번: 1877년 린츠판(노바크 편집)/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5년 10월 베를린
2번: 1877년판(노바크 편집)/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1966년 12월 뮌헨
3번: 1889년판(노바크 편집)/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1967년 1월 뮌헨
4번: 1886년판(노바크 편집)/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5년 6월 베를린
5번: 1878년판(노바크 편집)/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1958년 2월 뮌헨
6번: 1881년판(노바크 편집)/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1966년 7월 뮌헨
7번: 1885년판(구트만 편집)/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4년 10월 베를린
8번: 1890년판(노바크 편집)/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4년 1월 베를린
9번: 1894년판(노바크 편집)/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64년 12월 베를린
(녹음 장소는 베를린 필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 교회, 바이에른 방송향의 경우 레지덴츠 궁전의 헤르쿨레스잘을 사용함. 단, 8번의 경우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녹음함)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5번의 연주가 약간 못미더운 감이 있었는데, 스테레오라고는 해도 아무래도 초기의 것이라 그런지 녹음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가끔 스테레오 정보가 누실되어 있는 부분도 보이고, 소리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뒤로 물러선 경향이라 5번의 장려함이라는 특색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고.

그래서 DG 세트 녹음 기간 동안 혹시 다른 5번의 녹음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고 요훔의 디스코그래피가 실린 사이트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네덜란드인이 만든 팬사이트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세트에 포함되지 않은 요훔의 낱장 5번 녹음으로 유명한 것은 두 가지인데, 모두 네덜란드의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현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을 지휘한 실황들이다. 그 중 내가 노린 것이 1964년의 공연을 녹음한 필립스 음반이었고. 필립스가 녹음한 실황은 일반적인 공연장에서 진행된 연주가 아니었는데, 그 장소가 이 곡의 '영적인' 면을 아주 잘 살려줬다고 평이 자자했기 때문에 특히 관심이 갔다.

독일의 가톨릭 수도원 중 역사가 1000년도 훨씬 넘은 곳이 하나 있는데, 남독일의 바이에른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오토보이렌(Ottobeuren)에 위치한 베네딕트 수도원(Benediktinerabtei)이다. 수도원에는 요한 미하엘 피셔가 로코코 양식으로 설계해 건립한 바실리카(성당)가 부속 건물로 딸려 있는데, 지금도 전례가 열리는 장소이며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마다 성당에 설치된 오르간으로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기도 한데, 간혹 성가대나 관현악단의 연주회도 열리곤 한다. 수도원 창립일은 기록에 의하면 764년 5월 31일로 되어 있는데, 1964년 5월 31일이 바로 수도원 창립 1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원 측에서는 특별히 네덜란드 굴지의 악단인 콘서트허바우를 초빙했고, 창립제 전야제의 공연을 포함한 이틀 동안의 행사 일정을 준비했다.

지휘자로 섭외된 요훔은 당시 DG에서 주로 음반 작업을 했지만, 악단의 계약은 필립스와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필립스의 녹음 스탭진들이 오토보이렌에 동행해 녹음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요훔이 굳이 5번을 고른 이유는 자신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 외에도, 수도원의 종교적 행사에 쓰기에 가장 알맞는 브루크너 교향곡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요훔은 1975년에 '브루크너 교향곡의 작곡과 연주 양식' 을 주제로 논문을 쓴 바 있는데, 이 논문은 DG 전집의 해설지에 그대로 게재되어 있다. 논문에서 예로 든 곡이 바로 5번이었는데, 여기에는 각종 아티큘레이션이나 프레이징, 다이내믹 등에 대한 자세한 분석 뿐 아니라 실제 연주를 위한 첨삭 사례가 기술되어 있다.

5번은 초연 때 지휘자였던 프란츠 샬크가 브루크너의 공식적인 승인 없이 뜯어고친 '개찬판' 으로 공연되었는데, 샬크는 이 곡의 마지막 코다에서 전까지 계속 혹사당한 금관 주자들이 마지막 코랄의 빛나는 음향을 만들기에는 너무 지쳐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리허설 번호 Z(564마디)부터 특별히 금관을 기존 편성(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 1)에서 두 배로 증배하고(8-6-6-2), 트라이앵글과 심벌즈까지 더해 코다의 코랄 부분을 훨씬 화려하게 가필했다.

요훔도 샬크의 첨삭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은데, 악보 자체는 레오폴트 노바크 편집의 공식 원전판을 사용했다. 대신 4악장 코다에서 샬크처럼 금관 주자를 두 배로 증배했는데, 샬크가 증배한 금관 주자들을 마치 '사도들' 마냥 무대 뒤에 죽 늘어세워 극장풍 연출을 꾀한 것은 지양했다. 대신 원래 연주하고 있던 주자들의 옆이나 뒤에 위치시켜 같이 연주토록 했는데, 이 오토보이렌 실황에서도 마찬가지 방법을 썼다.

(그리고 요훔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한 첨삭도 있는데, 586-588마디에서 제 2트럼펫 파트의 음들을 한 옥타브 올려 주선율로 만들고 있다. 브루크너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뒤에 따르는 프레이징 선율 구조에서는 해당 부분을 확 주저앉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페터들에게는 연주하기 어려운 고음역이고.)

연주의 기본 구도와 진행 방식은 DG 세트의 1958년 녹음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잔향 시간이 긴 성당의 실황 공연이라는 특성과 그 동안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발전 덕에 훨씬 세련되게 들린다. 다만 잔향이 너무 길 경우 소리가 떡이 져서 들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게 되는데, 필립스 기술진들은 프레이징이 확 끊기는 총휴지(Generalpause) 부분이나 각 악장의 끝음을 제외하고는 근접 마이킹을 통해 잔향을 줄이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실황 녹음이기는 하지만, 하루의 공연을 한 방에 녹음한 것이 아니라 이틀 동안의 녹음을 편집한 것이라 크고 작은 실수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듣기에도 한결 편하다. 기침 소리같은 객석의 소음도 많지 않아서 더더욱 그렇고. (공연 끝나면 으레 나오는 박수 소리도 잘랐다. 다만, 종교 시설에서 열린 음악회인 만큼 실제로도 박수를 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 2001 Philips Classics Productions

CD는 필립스 본사에서 'Philips 50' 시리즈로 내놓은 것-위 짤방-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반 혹은 절판 상태인지 신품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그래서 계속 중고음반점들을 뒤지다가 명동 부루의 뜨락에서 중고도 아닌 신품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전에는 아르코예술정보관에 소장되어 있는 CD로 들어봤는데, 만약 Philips 50을 구하지 못한다면 훨씬 비싼 일본 로컬반으로 구하려고 할 뻔했다. 역시 발품은 이 바닥에서도 아직 유효한 구매 스킬인 듯.

*로브 크라위트의 오이겐 요훔 팬페이지 (영문). 1964년 오토보이렌 실황과 관련된 사진이 첨부된 페이지만 보려면 여기를 클릭.

*오토보이렌 베네딕트 수도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