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딱 한 번이지만, 대학교 아마추어 관현악단을 지휘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연주를 생업으로 삼고자 전공한 이들은 엑스트라로 초빙한 연주자들을 제하면 전무했기 때문에, 리허설도 꽤 애로사항이 많았고 막판에는 내 책임 하에 여러 군데에 가필까지 해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난관 속에서도 뭔가 얻어낸 것은 있었는데, 적어도 관현악단에 참가한 아마추어 단원들 중에 연습이나 공연에 참가하기 싫다고 빠진 사람들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들 자신의 전공이 있고 취업도 해야 하는 와중에 시간 쪼개고 푼돈 보태서 1년에 한두 번 공연을 여는 입장에서는, 그 공연들이 꽤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리라.
한국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이렇게 아마추어 활동으로 관현악단이 꾸려지는 경우는 꽤 많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에는 아예 프로 악단에 버금가는 상설화된 악단도 있을 정도인데, 이들 악단이 정기연주회 때 올리는 곡들을 보면 말러나 브루크너 등의 대곡이 의외로 많이들 보여서 꽤 놀랍고. (물론 연세대 아마추어 악단인 유포니아의 경우에도 베토벤 교향곡 9번이나 말러 교향곡 1번 등을 공연한 바 있었다.)
심지어는 그 동안 일본에서 연주되지 않던 작품들의 초연까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소재도 거기서 따왔다.
예전에 '레어 애청곡선' 시리즈의 초반부에서 다룬 바 있었던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1925-1989)는 작곡 활동 외에도 저술과 지휘 활동을 병행했는데, 지휘의 경우 자작자연에 그치지 않고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의 관현악 작품이나 다른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 소개에도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아쿠타가와가 지휘한 관현악단은 도쿄 교향악단 같은 프로 악단도 있었지만, 그가 가장 각별히 아낀 악단은 신교향악단(新交響樂團)이라는 악단이었다(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같은 이름의 신교향악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
신교향악단은 1955년에 일본 노동자 음악단체인 '로온(勞音)' 의 산하 기악 앙상블에서 파생된 단체인데, 이듬해에 아쿠타가와의 주도로 '도쿄 로온 신교향악단' 이라는 이름의 정규 관현악단급 규모로 확대되어 재창단되었다. 아쿠타가와는 창단과 동시에 음악 감독도 맡았고, 이듬해 11월에 첫 정기 연주회를 개최했다.
1966년에는 로온으로부터 독립했고, 이름도 현재 명칭으로 개칭했다. 그 해 9월부터 12월까지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개최했고, 이듬해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창단 최초로 소련에서 해외 연주여행을 진행해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 아쿠타가와 외에도 고노에 히데마로나 야마다 가즈오 같은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지휘했고, 특히 야마다의 경우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일본 아마추어 악단 사상 최초로 시도한 바 있었다.
서양 작품 연주 외에도 아쿠타가와의 기획으로 1976년부터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만으로 연주회를 여는 '방인(邦人)작품 시리즈' 를 개최했고, 1987년에는 중국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을 소개하는 공연도 개최한 바 있다. 1989년에 아쿠타가와가 타계한 뒤로는 단원들이 행정 업무도 겸임하고 있으며, 일본 내 유명 지휘자들을 객원으로 섭외해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관현악단이겠구나 싶겠지만, 이것이 아마추어 악단으로서 일궈낸 업적이라는 것이 꽤 ㅎㄷㄷ하고.
1989년 아쿠타가와 타계 후 몇달 뒤에 일본 음반사인 폰텍(Fontec)에서 고인이 남긴 작품과 지휘 음원을 가지고 '아쿠타가와 야스시의 세계(芥川也寸志の世界)' 라는 CD 셋트를 내놓았다. CD들 중에는 영화 주제가 모음집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 이외의 많은 녹음들은 아쿠타가와 지휘의 신교향악단 연주로 녹음된 실황들이었다.
신교향악단은 198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같이 프로 악단들도 버거워하는 난곡까지 레퍼토리를 넓힌 바 있었는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6년에는 '일본 초연' 에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도전곡은 바로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의 교향곡 4번이었는데, 1986년 7월 20일에 아쿠타가와의 지휘로 도쿄 신주쿠 문화센터에서 열린 연주회를 통해 첫 일본 공연 기록을 세웠다.
쇼스타코비치는 10대 후반에 레닌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으로 1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초연해 '소련의 무서운 신예' 로 각광받았는데, 이후 내놓은 2번과 3번은 합창이 붙는 단악장 형태의 교향시풍 작품이었다. 4번에 와서 좀 더 정통적인 교향곡에 도전한 셈이었는데, 불행히도 작곡 시기가 스탈린의 철권통치 시작 기간과 맞물려 25년도 넘게 미발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4번 교향곡이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모스크바 필 연주로 처음으로 공연된 것이 1961년 12월 30일이었고, 이후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영국 초연 등이 계속되면서 '정권의 폭압 하에 묻혀졌던 대작' 으로 재평가가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후로도 다시 25년이 더 지나서야 초연된 셈이었고.
사실 이 곡은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연주하기 굉장히 버거운 곡이라는 점 때문에 아직도 연주 빈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 관현악 편성부터 대규모의 변칙 4관 편성-플루트와 클라리넷은 각기 6대씩, 호른은 8대가 들어감-이고, 각 파트별로 굉장히 숙달된 연주 기교와 극단적인 악상 대비 등의 소화를 요구받는 곡이고.
이 때의 실황이 위에 언급한 CD 셋트의 다섯 번째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데, 윤이상 초기 실내악 작품들의 초판본 악보들을 구하러 부산까지 내려갔을 때 국제시장 근처에 있는 '먹통닷컴' 이라는 중고음반점에 들러 입수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부산 여행기 포스팅 참조)
ⓟ 1989 Fontec Inc.
사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리 인상이 좋지 않았다. 녹음 자체도 음반 제작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 방송 녹음이 소스라 그런지 음역대도 좁은 편이고, 단 한 번의 공연 실황으로 제작되었다 보니 곳곳에서 실수가 눈에 띄고 있고. 콘드라신의 이상하리만치 흥분과 싸늘함이 공존하는 연주도, 하이팅크처럼 균형잡힌 음향과 냉철한 시각의 연주도 아닌 좀 어정쩡한 결과물이 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이 연주가 아마추어 악단의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평가가 좀 달라진다. 1악장 중반부에서 현이 미친듯이 질주하는 푸가 부분처럼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였으면 하는 대목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토록 어렵고 복잡한 곡을 크게 주저앉거나 하는 일 없이 한방에 연주해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약 62분의 교향곡 외에 필업 곡으로 두 곡이 더 붙어 있는데, 1987년 4월 5일에 도쿄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중국작품전' 에서 연주된 곡들이 들어 있다. 리 후안지(李煥之, 1919-2000)의 '춘절 모음곡' 중 서곡과 우 주창(吳祖强, 1927-)의 관현악 '이천영월(二泉映月. 원곡은 '아빙' 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했던 화 옌쥔(華彦鈞, 1893-1950)의 얼후 독주곡)' 두 곡인데, 사실 연주력으로 따지자면 이 두 곡이 쇼스타코비치보다는 좀 더 낫다. (곡들이 훨씬 통속적이다 보니)
일본 현지에서도 절판된 지 꽤 된 물건이라 부산에나마 중고반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는데, 물론 프로 악단들이 훨씬 정밀하고 강렬하게 연주한 음반들이 수두룩한 상황에 '경쟁반' 으로 자리잡기에는 확실히 역부족이다. 다만 '신교향악단' 이라는 아마 악단 자체나, 그 악단의 음악 역량에 관심있는 이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