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은 미국 음악계에서 그야말로 경탄과 논쟁을 끝까지 몰고 다니던 거물이었는데,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들처럼 작곡에 지휘, 피아니스트, 교육가까지 1인 4역 혹은 그 이상을 해냈던 인물이었다. 특히 뉴욕 필하모닉 시절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활용해 '청소년 음악회' 를 열어 미국 대중들에게 클래식을 다가가기 쉽게 만든 공적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고.
번스타인은 '본업' 인 클래식 외에도 재즈 등 다른 장르에 대해서도 꽤 박식했던 것 같은데, 재즈가 여흥 음악에서 본격적인 예술로 평가되기 시작한 비밥 시대에 일찌감치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제작한 'What is Jazz?' 라는 프로그램의 녹음도 존재하고 있다(1956.7.12,19,26).
뉴올리언스에서부터 라틴 재즈까지 포괄한 저 프로그램은 물론 번스타인 자신이 해설을 맡았고, 중간중간에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 마일즈 데이비스 등의 연주를 삽입해 이해를 돕고 있다. 심지어 번스타인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재즈의 구성 요소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특히 블루 노트를 설명하기 위해 스와힐리어족의 민요를 직접 부르면서 피아노 음정을 비교하는 장면이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구절로 즉석에서 블루스를 노래하는 대목이 인상적이고.
2부에 걸쳐 총 42분 가량의 분량으로 제작된 저 프로그램은 CBS의 '선데이 애프터눈'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었고, 같은 해 CBS 소유의 음반사인 컬럼비아를 통해 LP로도 발매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니가 컬럼비아를 매입해 탄생시킨 레이블인 소니 클래시컬에서 번스타인 시리즈인 'Bernstein Century' 를 내놓았는데, 이 시리즈 중 'Bernstein on Jazz' 에서 LP 소스를 가지고 최초로 CD화해 내놓았다.
ⓟ 1998 Sony Music Entertainment Inc.
물론 40분 좀 넘는 저 프로그램의 녹음만으로 CD를 냈다가는 분명히 욕을 먹었겠지만, 소니 측은 거기에 마찬가지로 CD로는 최초 출반인 두 가지의 진귀한 녹음을 더해 CD 표준 재생 시간인 75분을 채워서 출반했다.
'What is Jazz?' 다음 트랙으로 실린 녹음은 번스타인이 해당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었던 1956년 7월 14일에 공연한 실황인데, 블루스의 고전이자 재즈 스탠더드이기도 한 윌리엄 크리스토퍼 핸디(William Christopher Handy, 1873-1958)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t. Louis Blues)' 를 합주협주곡 버전으로 편곡한 것이 들어가 있다. (편곡은 알프레도 안토니니가 맡음)
뉴욕 필하모닉은 당시 비시즌기-서구 관현악단들은 대개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를 한 시즌으로 잡아 공연하며, 남는 기간인 7~8월은 정규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지거나 특별 음악회 등에만 출연하는 것이 관례다-에 실외 경기장인 르위손 스타디움(Lewisohn Stadium)에서 대중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뉴욕 필이라는 명칭 대신 르위손 스타디움 교향악단이나 뉴욕 스타디움 교향악단 등의 이름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7월 14일 공연에서 특별히 재즈 아티스트들을 초빙해 클래식 관현악단과 협연하는 콘서트를 기획했는데,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에서 협연한 이들은 바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그가 이끄는 퀸텟(5중주단)이었다;
트럼펫: 루이 암스트롱
클라리넷: 에드먼드 홀 (Edmond Hall)
트롬본: 트러미 영 (Trummy Young)
피아노: 빌리 카일 (Billy Kyle)
베이스: 데일 존스 (Dale Jones)
드럼: 배럿 딤스 (Barrett Deems)
내가 아는 한 번스타인과 암스트롱이 협연한 것은 이 공연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는데, 운좋게 녹음되었을 뿐 아니라 CBS에서 제작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인 '사치모 더 그레이트(Satchmo the Great)' 의 제작을 위한 영상으로도 촬영되었다고 한다(다만 영상은 아직 못봤다). 영상에는 청중으로 참석한 원곡 작곡자인 핸디의 모습도 비춰진다고 하고 있고.
1956년이라면 암스트롱은 이미 비밥이나 쿨 등 재즈사의 중요한 조류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었고, 그 때 쯤이면 대중들에게 트럼페터라기 보다는 주로 독특한 목소리로 팝송을 맛깔스럽게 부르는 가수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대선배인 핸디에 대한 오마주 무대라는 것을 감안했는지 간간이 선보이던 스캣도 하지 않고 트럼펫 연주에만 집중하고 있다. (암스트롱을 포함한 재즈 파트의 연주는 핸디 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딕시랜드'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곡 전체의 연주 시간은 8분 40초 가량이지만, 거기에 연주 직후 행해진 번스타인의 멘트와 암스트롱의 답사가 약 2분 가량 더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번스타인은 멘트에서 자신이 지휘한 악단을 뉴욕 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재즈의 거장과 클래식의 신성이 함께 연주했다는 역사적인 의의 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충분한 물건인 셈이고.
이어지는 곡도 특필할 만한데, 웨스트코스트 쿨 재즈의 명인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이 이끄는 쿼텟(4중주단)이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과 협연해 만든 스튜디오 녹음이다(1960.1.30). 곡은 데이브의 형이었던 하워드 브루벡(Howard Brubeck, 1916-1993)이 작곡한 '재즈 캄보와 관현악을 위한 대화' 라는 곡인데, 정형화된 악보로 연주하는 관현악단과 즉흥 연주하는 캄보가 협연하는 4악장 형태의 작품이다.
멤버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와 달리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은데, 위키의 데이브 브루벡 쿼텟 구성원 연표를 살펴보면 아마 이럴 것 같다 (지금도 명반으로 회자되는 'Time Out' 을 녹음했을 때의 라인업이다);
피아노: 데이브 브루벡
알토 색소폰: 폴 데스먼드 (Paul Desmond)
베이스: 유진 라이트 (Eugene Wright)
드럼: 조 모렐로 (Joe Morello)
앞선 곡과 마찬가지로 번스타인과 브루벡 쿼텟의 유일한 협연 녹음으로 알고 있는데, 같은 해에 브루벡 쿼텟은 번스타인의 최대 인기작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곡들을 가지고 앨범을 내놓은 바 있다. 서로에 대한 답례였을까? 그리고 이 녹음의 프로듀서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비롯한 컬럼비아 재즈 아티스트들의 음반들을 상당수 제작한 테오 마세로(Teo Macero)였다.
악보화된 음악을 연주하는 관현악단과 즉흥 연주가 일반적인 재즈 캄보와 협연하는 곡인 만큼, 둘의 양식을 절충하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캄보의 각 파트가 즉흥으로 연주할 때도 뒤에서 관현악이 연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각 섹션별로 넘어갈 때의 마딧수를 계산해서 그 공간만큼 솔로를 하도록 한 듯. 그리고 곡의 전체적인 색깔은 클래식 보다는 재즈나 블루스 필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녹음 상태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스테레오고, 스튜디오 녹음이라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보다는 더 깨끗한 편이다. 그리고 딕시랜드 스타일의 시끌벅적한 연주보다 더 깔끔하고 이지적인 연주를 선호한다면 오히려 더 인상적으로 느낄 수도 있을 듯 하다.
다만 이 CD는 국내에 수입이 됐는지 안됐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상태다. 대형 음반점들의 클래식 코너와 재즈 코너 모두를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재즈 음반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같이 구하던 디지 길레스피와 현악 앙상블의 협연 음반과 함께 지인을 통해 해외에 직접 주문해 받을 수 있었는데, 가격이 의외로 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0달러도 되지 않았음)
*암스트롱과 번스타인의 협연 당시 사진을 위키 영어판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두 인물의 항목이 아닌, 클라리네티스트 에드먼드 홀의 항목에 걸려 있는게 좀 괴이하고. (그리고 사진을 봐도 홀과 번스타인의 모습이 가장 잘 나와 있다.)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