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티 가곡집과 나폴리 칸초네집 뒤에도,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는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English Chamber Orchestra)를 대동하고 독집 앨범 몇 장을 더 발매했다. 그 중에 가장 이색적인 기획으로 생각되는 것이 이번에 소개할 앨범인데,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와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의 가곡들을 담은 물건이다.
ⓟ 1991 Philips Classics Productions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가 발굴해 녹음한 수많은 관현악 소품집을 비롯해 꽤 여러 장르에 손을 댄 인물이기도 하다. 가곡의 경우에도 가짓수는 적지만 이런저런 곡을 남기고 있는데, 그 중에 여덟 곡을 골라 수록했다.
1. 외딴 방에서 (In solitaria stanza)
2. 걸인 (Il poveretto)
3. 비밀 (Il mistero)
4. 방랑 (L'esule)
5. 오 슬픔의 여인이여 (Deh, pietoso, oh Addolorata)
6. 황혼 (Il tramonto)
7. 별에게 (Ad una stella)
8. 건배 (Brindisi)
파야의 가곡 혹은 그에 준하는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일곱 곡의 에스파냐 민요(Siete canciones populares española)' 인데, 원래 독창과 피아노용의 작품이지만 에르네스토 알프테르를 비롯한 동료 혹은 후배 작곡가들이 관현악 반주용으로 편곡한 것으로도 연주되고 있다.
이 두 묶음을 이탈리아 현대 작곡가인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 1925-2003)가 관현악 반주로 편곡해 직접 지휘했는데, 베리오의 이름만 봐도 꽤 범상치 않은 작업물이었다. 베리오는 '슈베르트 리모델링' 이라는 제목으로 여기서 진행한 시리즈의 말미에도 언급했지만, 생전에 꽤 여러 종류의 편곡물들을 만든 바 있었다.
베르디의 경우 '테너와 관현악을 위한 여덟 곡의 로만체(Otto Romanze per tenore e orchestra)' 라는 제목으로 편곡되었는데, 제목만 봐서는 알 수 없겠지만 베리오는 각각의 가곡들을 따로따로 보지 않고 한데 뭉뚱그려 취급했다. 그래서 CD 상에서도 각 곡이 크게 중단되는 일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데, 심지어 1번과 2번 트랙은 아예 끊김없이 계속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베리오는 기본적으로 베르디의 원전을 존중하고 있지만, 곳곳에 자신만의 해석을 담은 창작 이행부를 넣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노래가 함께 가는 대목은 비교적 전통적인 방식으로 편곡했지만, 각 노래로 이어지는 관현악의 전후반부나 간주에서 특히 이런 '현대적인' 접근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 가령 두 번째 곡인 '걸인' 의 초반부에는 굶주림을 묘사하는 듯한 희미한 불협화음 악구가 잠시 나오고 있고, '별에게' 의 관현악 후주도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파야 곡은 해설지에 비교적 소상한 편곡 사유가 나와 있는데, 한 때 부부 관계로 지냈던 캐시 버베리언을 위해 1978년에 편곡했다고 한다. 버베리언은 전통적인 성악 발성을 쓰지 않으면서 의성어와 몸짓, 다양한 억양 등으로 노래를 '연기하는' 독특한 가수였는데, 특히 브레히트 등 신랄하고 풍자적인 가사에 붙인 곡들에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했다.
다만 이 편곡이 베리오와 버베리언 간의 관계 만으로 한정된 것은 아닌데, 같은 기간 동안 베리오는 세계 각지의 민요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짜깁기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국민악파의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른 식의 민요에 대한 접근이었고.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 민요나 찬송가를 가지고 마구 뒤섞는 콜라주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아이브스 스타일을 좀 더 현대적이고 전위적으로 응용했다고나 할까.)
일단 들어보고 나니, 이 파야 편곡은 베르디의 것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일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원곡도 기껏해야 1분을 안넘는 곡들이 대부분이라, 베르디처럼 반주나 경과구에서 베리오만의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여지가 많지 않은 원초적인 한계가 있었고.
하지만 원곡에서도 그러듯이, 이 곡은 나긋나긋하게 불러서는 별 소용이 없는 곡이다. 에스파냐 특유의 약간 동양적이고 음울하면서도 굉장히 정열적으로 흐르는 노래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내 불러야 제맛이 나는데, 노래 연기의 대가였던 버베리언이 직접 노래한 것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을 정도다.
버베리언 만큼 파격적이지는 않겠지만, 오페라 가수로 성공했던 카레라스도 이 곡에 극적인 모습을 부여하려고 애쓴 모습이 역력하다. 더군다나 카레라스는 파야와 동향인이고, 언어에 대한 이해력도 훨씬 강했을 것이고. 하지만 백혈병을 앓고 난 뒤의 녹음이라, 아무래도 목소리 처리가 좀 힘에 부치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CD가 사실상 대세가 된 90년대 초반의 물건임에도 LP 시대의 수록 시간인 40분대를 자랑하는 물건이라는 약간 이해하기 힘든 한계도 있고, 무엇보다 폐반 상태인 이 앨범을 구하기가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카레라스와 베리오의 공동 작업도 이것이 아마 유일한 것 같고.
뱀다리: 독집 앨범은 아니지만, 에스파냐 현대 작곡가인 레오나르도 발라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으로 위촉받아 쓴 오페라 '크리스토발 콜론(크리스토퍼 콜롬부스)' 의 1989년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 세계 초연 실황이 최근 낙소스를 통해 발매되었다.
카레라스와 70년대에 자주 호흡을 맞췄던 몽세라 카바예가 오랜만에 함께 주연으로 출연해 공연했는데, 소니에서 녹음을 했다가 수지타산이 안맞는다고 생각했는지 푹 묵혀두고 있다가 낙소스에 녹음을 인계해 발매된 것 같다. 카레라스가 오페라 경력 최후반기에 도전했던 볼프-페라리의 '슬라이' 와 함께 레어템으로 남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