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몇 포스팅에서 줄기차게 끄적인 대로 '예술지상주의자' 는 절대 아니다. 전공할 생각까지는 없어도 음악사회학 같은 주변 학문들에 꽤 관심이 많은데, 특히 절대 권력에 이용당한 음악인들에 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아직까지 한국에서 쉽게 입에 올리기는 벅찬 것 같고, 일부 계층에서는 심지어 터부시되는 주제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National Anthem)에서부터 음악과 정치가 절대 무관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이 주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이 분야의 서적이 나왔다는 것은 몇 달전 영풍문고 종로점에 가서 예술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알게 됐는데, 사실 책 자체에 큰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한 지인이 내게 슈베르트가 쓴 시라고 하면서 독일어 원본을 갖다주고 해석을 요청한 일 때문에 들춰보게 되었다.
아직까지 독일어 중급 과정이라는 암초에 걸려 표착중인 내게 완벽한 해석은 분명히 무리였고-더군다나 독일어 시라면 완벽한 문법 지식 외에 문어체만의 규칙까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저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평소 슈베르트의 이미지와는 꽤 다른 '정치적 함의' 를 담은 시임을 파악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분명히 '음악과 정치' 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에 혹시나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해서 슈베르트가 설명된 8장 항목을 찾아봤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완벽히 번역된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의 해석 의뢰를 해결한 뒤에도 책을 조금씩 더 읽어 봤는데, 단순히 넘길 책은 분명 아닌 것 같아 구입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하드커버 장정의 두꺼운 책이 결코 값싼 물건일리 없었고, 어느 설문조사에 참가해 경품으로 받은 문화상품권들을 모아 가까스로 지를 수 있었다. (출판사는 컬처북스고, 가격은 28000원)
책은 독일 음악학자인 베로니카 베치(Veronika Beci)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고, 월간지 '객석' 기자로 활동한 노승림이 번역했다고 나와 있었다. 적어도 음악과 주변 예술을 전문적으로 이해하는 이가 번역했기 때문에, 퀄리티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다만 몇 가지 부분에서 흠결이 지적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데, 독일어 이외의 언어로 표기되는 고유명사의 경우 종종 오역이 발견된다는 점이 그렇다. 아무래도 번역자가 독문학 전공이었기 때문에 가진 한계로 생각되는데, 쇼스타코비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소련군 초기 원수들 중 한 사람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투카트체프스키' 라고 되어 있고 유명한 풍자작가였던 미하일 조셴코는 '조슈트첸코' 로 나와 있다.
*사실 이는 (현재 '위서' 로 평가가 기울고 있는) 솔로몬 볼코프가 집필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 의 최신 번역판에도 나타난 바 있는 문제다. 알파벳으로는 shcha로 표기되는 키릴 문자 Щ는 흔히 '시차' 로 번역되었지만, 실제로는 '슈' 와 '야' 를 한데 뭉친 형태로 발음된다. 흐루쇼프를 흐루시초프로, 보르쉬(러시아 수프의 일종)를 보르시치로 번역하던 관습도 최근까지 남아있었고.
짤막한 도입부인 1장에서부터 베치는 독일 국가를 떡밥으로 던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어 시대 순서나 경중과 관계없이 서양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진행시키고 있는데, 개중에는 정말 음악사 시간에 그냥 지나쳐도 무관하다 싶을 라이하르트나 그레트리, 로르칭, 마이어베어, 알레비 등도 꽤 비중있게 취급되고 있다. 심지어 라이하르트는 5장 전체를 할애할 정도.
제목 그대로 음악가들과 권력층-중세 시대에는 종교 지도자들이겠고, 르네상스 시대부터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귀족층들이겠고, 근대 이후로는 거물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일-사이의 유착이나 반목 관계를 위주로 설명하고 있는데, 다소 딱딱하고 껄끄러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머리뽀개질 정도의 복잡성은 없다.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이나 편지, 기고문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고, 당대 사회상이나 정치력의 변화 등도 병행해 설명하고 있어서 세계사나 음악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으면 그렇게까지 힘들게 읽혀지지는 않을 것 같다.
에피소드들 중에는 베토벤이나 말러,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쇼스타코비치, 아이슬러, 헨체, 윤이상같이 다른 서적이나 기사, 평론 등을 통해 이미 접한 내용을 쓴 것들도 있고, 슈베르트나 라이하르트, 바로크 이전의 작곡가들, 마이어베어나 울만 같이 비교적 새롭거나 아예 새롭게 접한 에피소드들도 섞여 있어서 꽤 흥미로웠다.
저자가 특히 바그너에 대해 꽤 비판적인 것으로 읽혔는데, 바그너에 대한 단락은 11장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단원들에도 등장하고 있다. 대체로 반유대주의 성향의 저술들을 내세우면서 동시대 혹은 후배들이 겪었던 갈등과 연계시키고 있는데, 골수 바그네리안들이라면 읽기 좀 불편할 지도. 하지만 바그너가 독일 음악계에 미친 영향 자체가 대단히 컸기 때문에, 부정적인 측면도 다른 작곡가를 이야기할 때 결국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가 여성인 만큼 여성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나 반페미니즘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서술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요한나 킨켈이라는 여성 작곡가에 대해서는 9장을 빌려 꽤 길게 써놓고 있다. 다른 장에서도 중심 인물로 다뤄지지는 않고 있지만, 클라라 슈만이나 알마 말러 같이 대작곡가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창작 활동에 제한을 받거나 심지어 금지당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물론 써놓고 있고.
요즘이야 카야 사리아호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진은숙 같은 여성 작곡가들도 웬만한 남성들 못지 않게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지만, 18~19세기나 20세기 초중반 까지도 여성들의 예술 활동이라면 그저 아마추어 살롱음악 수준으로 바라보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 문제도 분명 정치/사회상의 변화와 함께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사소하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책은 몰리에르의 음악에 대한 저술 중 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음악을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배운다면 조화와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를 자문하는 내용이다. 물론 음악 교육은 한국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지, 혹은 정치적 이견을 뛰어넘어 위대한 성과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추구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거창한 뱀다리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책의 번역을 통해 온전히 이해한 슈베르트의 시를 적어놓는다. 친구 프란츠 쇼버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시인데, 이 시를 가지고 일본 현대 작곡가인 다카하시 유지가 슈베르트 스타일로 곡을 붙이기도 했다. (슈베르트 자신은 시를 쓰기만 했을 뿐, 거기에 음악을 붙이지는 못한 것 같다.)
민중에 보내는 탄식 (Klage an das Volk)
오 우리 시대의 젊은이여, 너는 죽었구나!
무수한 민중의 힘이여, 그것은 허무하게 소진되었구나,
누구 하나도 민중으로부터 차별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구나.
너무도 크나큰 고통, 그 강력한 고통에 나는 쇠약해지고
결국에는 그 힘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로 인해 행동을 포기함으로써 이 시대 또한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저마다의 위대한 완성을 방해한다.
쇠약한 노년에 이르러 민중들은 하나 둘 무릎꿇고,
젊은이들의 행동은 그것을 꿈으로 착각하고,
그리하여 제각기 반짝이는 운율을 어리석다 조롱하고,
그들 안에 내재한 힘찬 반응은 더 이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오직 그대, 오 숭고한 예술이여, 그대만이 기꺼이 그것을 허락하나니,
힘과 행동의 시대가 묘사된 작품 속에서
커다란 고통은 미약하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가 운명과 화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