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의 작품 목록을 보면, 작곡한 장르가 무척 협소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교향곡과 미사, 테 데움, 레퀴엠, 모테트 등 종교음악, 그리고 실내악이 그나마 주축을 이루고 있고, 오페라나 오라토리오는 단 한 곡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독주곡 분야에서도 브루크너 자신의 장기였던 오르간 독주용 작품은 굉장히 적은 편이고, 피아노곡도 교향곡에 매진하기 전에 남긴 초기작들만 존재하고 있다. 물론 브루크너가 그 이상의 작품을 더 썼을 수도 있지만, 말년에 자기 작품의 악보들을 검토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정X소X환X처럼 땔감으로 써버렸다고 하니 재발굴의 여지도 거의 없는 상태고.
현존하는 브루크너의 피아노 독주곡들 중, 발부르가 리트샤우어(Walburga Litschauer)의 교정으로 국제 브루크너 협회를 통해 출판되어 있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연탄곡이나 두 대의 피아노용 작품은 제외);
창기병 카드리유 (Lancier-Quadrille. 1850?)
슈타이어마르크 춤곡 (Steiermärker. 1850?)
피아노곡 E플랫장조 (Klavierstück Es-dur. 1856?)
가을 저녁의 조용한 생각 (Stille Betrachtung an einem Herbstabend. 1863)
환상곡 G장조 (Fantasie G-dur. 1868)
추억 (Erinnerung. 1868?)
부록: 소나타 악장 G단조의 스케치 (Sonatensatz g-moll: Entwurf. 1862)
피아노곡 장르에서 가장 본격적인 소나타는 미완성인 상태로만 딱 하나가 존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카드리유나 춤곡, 여타 감상적인 소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곡들이 진지한 목적으로 쓰인 것이라기 보다는, 학습용이나 여흥용으로 작곡되었다고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랬고.
브루크너의 현존 피아노 독주곡 중 최초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창기병 카드리유' 인데, 카드리유는 영국 시골의 춤곡인 컨트리 댄스가 프랑스로 넘어가 콩트르당스(Contredanse)가 된 것에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가면극 '코메디아 델라르테' 의 아이디어 등이 혼합된 메들리 식의 춤곡이었다.
다만 브루크너는 그 때까지 카드리유의 형식에 관해서는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카드리유라기 보다는 2/4박자 계통의 콩트르당스들을 모아놓은 연곡의 느낌이 강한데, 곡의 주제들은 로르칭이나 도니체티 등의 당시 유행 오페라들에서 따오고 있다. '도입부(Eingang)' 라고 기재된 첫 곡을 비롯해 모두 네 곡이 묶여 있는데, 조성도 중간부에서 변하는 것을 빼면 모두 C장조로 고정되어 있다.
브루크너가 빈으로 옮기기 전까지 살던 지역은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였는데, 그 바로 밑에는 슈타이어마르크 주가 자리잡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춤이자 춤곡인 왈츠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렌틀러(Ländler)가 이 지방의 이름을 딴 춤곡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초기 왈츠 형식을 확립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인 작곡가 요제프 라너도 '슈타이어마르크풍 춤곡' 이라는 렌틀러를 쓴 바 있다.
오버외스터라이히 사람이었던 브루크너가 왜 자신의 짤막한 렌틀러에 '슈타이어마르크 춤곡' 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소년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위해 술집에서 렌틀러나 폴카 등 각종 춤곡을 연주한 경험을 살린 것은 확실한 듯하다. 물론 훗날 교향곡들의 스케르초에 응용할 정도로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은 아니고.
그리고 이 두 춤곡들은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는 하지 않았어도 헌정 기록까지 있는데, 10대 시절 자신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쳐준 미하엘 보그너의 딸 알로이지아에게 헌정했다고 되어 있다. 알로이지아의 당시 나이가 16세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브루크너의 헌정에는 단순히 '스승과 그의 딸에 대한 호의' 이상의 뭔가 있었을 듯하기도 하지만...(요즘 관점으로 따져보면 브루크너는 진성 로리콘이었다.)
브루크너가 장크트 플로리안에서 린츠로 활동 거점을 옮긴 것이 1850년대 중반 무렵인데,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세 번째 피아노 독주곡이 '피아노곡 E플랫장조' 다. '슈타이어마르크 춤곡' 처럼 연주 시간이 2분도 채 안되는 대단히 짧은 곡인데, 다만 이전 두 곡에서 보여준 '시골풍 춤곡' 에서 탈피해 전형적인 초기 낭만주의의 서정미를 도입하고 있다. 아마 피아노 레슨 때 교재로 멘델스존의 '무언가' 를 사용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멘델스존의 영향력은 다음 독주곡인 '가을 저녁의 조용한 생각' 에서도 강하게 느껴지는데, 전형적인 낭만주의 시대의 표제 피아노곡이라는 점만 봐도 꽤 특이하다. (교향곡에도 제목을 겨우 한 곡밖에 붙이지 않았던 브루크너의 '절대음악 지향성' 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다.) 초고에는 '가을의 탄식(Herbstseufzer)' 이라고 적은 모양이었는데, 이전 곡들과 달리 단조 조성으로 작곡되어 한층 울적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곡도 '창기병 카드리유' 나 '슈타이어마르크 춤곡' 처럼 자신의 피아노 제자였던 엠마 타너에게 헌정되었다.
'가을 저녁의 조용한 생각' 이후 브루크너는 한동안 종교음악과 교향곡의 창작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는 브루크너가 강한 의욕을 보여줬음에도 초연 때마다 실패해 급짜식하는 안습의 신세를 겪었다. 아무튼 이 때도 브루크너는 재정 여건이 그다지 안정적이지는 않았는지 계속 피아노나 오르간의 개인 레슨을 했는데, 나머지 두 곡도 모두 자신의 제자였던 알렉산드리네 조이카에게 헌정했다.
'환상곡 G장조' 는 느린 전반부와 약간 빠른 후반부 두 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느리면서 감정을 담아' 라는 지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히 부드러운 악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멘델스존에 대한 빠심(???)은 어느덧 쇼팽이나 리스트 등 거의 엇비슷한 시대를 살던 이들의 작품으로 옮겨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의 교향곡에서 볼 수 있는 악상 전개나 동기 발전 같은 작곡 기법도 응용하고 있는데, 전반부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갑자기 초기 낭만도 아니고 고전 시대로 타임슬립하는 면모를 보여줘서 듣는 이에게 '뭥미?' 라는 당혹감을 안겨주는데, 물론 급격한 조바꿈 등의 기법은 시대 양식을 뛰어넘지만 모차르트나 하이든 피아노곡에서 수시로 나오는 왼손의 분주한 반주 음형이나 호모포닉 스타일은 전반부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비슷한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추억' 은 브루크너 사후 최초로 출판된 피아노곡인데, 앞의 여러 곡들과 비교해 보면 굉장한 발전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브루크너 초기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구성인데, 브루크너 작품에서 빠지면 앙금 없는 호빵인 특정 음형의 줄기찬 반복이나 성부 간의 강한 대비 등이 꽤 효과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미완성 작품으로 '소나타 악장 G단조' 가 있는데, 브루크너가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배우던 시절의 과제물이다. 단순한 과제 목적으로 쓴 것이라 거의 스케치 수준으로밖에는 정리되지 않은 미완성작인데, 고전 소나타 형식을 확실히 익히도록 내준 숙제였던 탓에 작품 자체가 그렇게 짜임새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리고 악보 자체에도 템포 설정이나 프레이징, 셈여림 등이 거의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연주자의 상상력에 상당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연주 가능한 독주곡들을 모두 모아도 40분이 채 안되는 분량인데, LP 시절이면 몰라도 CD 시대에 한 장에 채워넣어 출반하기에는 너무 인색한 양인 셈이다. 그리고 이들 작품만 모은 음반도 내가 아는 한 딱 두 장 뿐이고.
ⓟ 2001 BIS Records AB
지금 갖고 있는 CD는 일본 피아니스트인 시라가 후미코가 스웨덴 음반사 비스(BIS)에서 2001년에 녹음한 것인데, 표지에는 '세계 최초 녹음' 으로 쓰여져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이다. 딱 하나만 세계 최초 녹음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나머지 여백을 채우기 위해 넣은 듯한 교향곡 제 7번의 2악장 아다지오다.
물론 피아노 독주 앨범인 만큼 원곡 그대로의 편성은 절대 아니고, 브루크너의 제자였던 시릴 히나이스(Cyrill Hynais)가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한 버전을 써서 연주하고 있다. 음반의 발달 때문에 집에서도 손쉽게 대규모 관현악 작품을 들을 수 있는 요즘 세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런 곡은 공연장에 직접 가지 않는 한 제대로 된 편성으로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축소형 편곡이었는데, 수많은 관현악 작품들이 피아노 독주 혹은 연탄, 두 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수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편곡은 감상용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꿩 대신 닭' 식의 대체물이고, 피아노 만으로는 관현악의 음색이나 음량에 절대 필적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히나이스 편곡의 피아노 버전도 쓸데없는 것이 첨가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클라이맥스에서는 관현악이 이끄는 강한 힘과 장려한 음색에 다가가지는 못했다.
세계 최초 녹음 어쩌고 표기한 섣부른 오류는 아쉽지만, 브루크너의 피아노 독주곡을 모은 음반이 극히 드문 상황에서 레어템을 찾는 이들에게 나름대로 어필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물건이다. 시라가는 이외에도 쇼팽이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들의 관현악 파트를 현악 5중주로 축소 편곡한 판본으로 녹음하는 등 매우 색다른 컨셉의 CD들을 계속 내놓고 있는데, 음반 뿐 아니라 공연 무대에서도 시 낭송이 곁들여지는 독주회 등 꽤 기발한 아이디어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뱀다리 1: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피아노 연탄용 작품까지 수록한 CD도 클라시크 프로둑치온 오스나브뤼크(CPO)에서 90년대 중반에 나왔는데, 메인 피아니스트인 볼프강 브루너가 브루크너 생전에 사용되었던 뵈젠도르퍼 모델의 피아노를 복원해서 연주한 '원전 지향' 음반이라고 한다.
뱀다리 2: 수록곡들 중 '창기병 카드리유' 를 제외한 모든 곡들의 악보는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 목록으로 유명한 사이트에서 pdf 형식으로 다운받을 수 있다. 모두 저작권이 만료되어 법적 구속력이 없는 초판을 올린 듯. ('창기병 카드리유' 도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첫머리 몇 장만 스캔되어 있다.) 클릭하면 별도 창으로 뜬다.
피아노곡 다운로드 목록 ('UntitledAllegroGin2-4.pdf' 라고 된 파일은 환상곡의 후반부를 잘못 기입한 것이다. 'Fantasie10sep1868incompl.pdf' 의 'incompl(ete)' 항목도 전반부만 뜬 파일이니, 둘을 합치면 완전한 악보가 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