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일본 HMV 회원인 어느 지인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못구하는 것들만 골라서 주문을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특별히 모 회사에서 열흘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결국 원한 바를 거의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장의 CD 중에 우선 포스팅 거리로 찾은 것이, 제목대로 일본의 롬 뮤직 파운데이션(Rohm Music Foundation)이라는 재단에서 주관해 복각한 시리즈 세트 중 2집과 3집 두 종류였다. '복각 왕국' 으로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라가 일본이지만, 저 세트를 특별히 노린 것은 일본인 음악가나 일본에 온 외국인 음악가들이 일본 음반사에 녹음한 SP 음원들을 선별해 만든 것이라 희소 가치가 꽤 있는 물건이라는 점이었고.
롬의 세트는 모두 4집까지 발매되었는데, 세트당 납작한 싱글용 케이스에 든 CD 6~7장에 두툼한 해설서가 첨부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해외 구매객들도 노렸는지 해설서의 언어에 따라 일본어 버전과 영어 버전 두 가지로 발매했는데, 내가 구매한 것은 모두 영어 세트다. 곡목 해설에 낙소스의 일본작곡가선집 시리즈의 편집과 작품 해설 담당인 카타야마 모리히데가 참여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해설서의 두께만 봐도 이 세트가 나름대로 꽤 공들여 만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데, 실제로 안에는 음악가들에 대한 프로필과 곡목 해설 뿐 아니라 복각을 담당한 엔지니어의 해설과 사용한 원판의 정보들이 꽤 체계적으로 실려 있다. 심지어 각 CD 커버와 해설서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우에무라 쇼엔의 일본 미인도들에 대한 해설까지 들어 있을 정도.
다만 음질의 경우, 'SP의 원음' 을 살린다는 복각 취지에 따라 지글대는 표면 잡음(surface noise)을 거의 제거하지 않고 만든 터라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짜증스러울 수도 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웬만하면 잡음을 줄여서 복각하는 것이 듣기에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각 퀄리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고.
원체 관현악 덕후다 보니 노린 것들도 대부분 관현악 음원들의 가치를 가늠하고 고른 것들이었는데, 물론 개중에는 정말 음악적으로 기념할 만한 것도 있고 '듣고 비웃을' 물건도 있다.
총 여섯 장 세트인 2집에서 내가 노린 음원들은 다음과 같았다;
-CD 1- (일본인 음악가 국내 녹음 1)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4번
키타자와 사카에/신교향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10009-14. 1930년 녹음)
말러의 교향곡 녹음은 전기 녹음 기술이 상업화된 1926년 이후에도 상당히 뜸한 편이었다. 물론 전기 녹음 이전에도 2번을 녹음한 대인배이자 용자인 오스카 프리트 같은 지휘자도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대규모 관현악이 요구되고 연주 시간도 긴 탓에 음반사 입장에서는 함부로 발을 담그기 힘든 상황이었다.
1930년에는 독일 파를로폰의 일본 지사에서 4번의 전곡 녹음을 취입한 기록이 있었는데, 이것이 프리트의 2번 이후로 역사상 두 번째의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레어템이다. (전기 녹음 기술로 만들어진 첫 번째 말러 교향곡 녹음이자 이 곡의 세계 최초 전곡 녹음이기도 함)
형이 일본 총리를 두 차례 역임한 코노에 후미마로이기도 해서 유명한 코노에는 일본 지휘자들 중에서 선배인 야마다 코사쿠 다음으로 국내외에서 선각자로 여겨지는 인물인데, 말러 교향곡도 신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의 전신-을 지휘해 1번과 4번을 각각 1928년과 1929년에 일본 초연하는 등 연주 곡목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 일본을 휩쓸고 있는 말러 붐의 시초로 볼 수 있을 듯.
다만 세계에서 두 번째에, 해당 작품의 첫 녹음이라는 역사적인 가치에 비하면 연주나 녹음의 질에 대해서는 무턱대고 칭찬하기가 뭣하다. 아무래도 걸음마 단계였던 신교향악단의 연주 실력으로는 이 어려운 곡을 연주하기가 분명히 버거웠을 텐데, 녹음에서도 자주 금관의 삑사리가 들리고 곳곳에서 어기적 거리며 넘어가는 패시지가 속출한다. 그리고 3악장의 287-314마디는 지휘자의 판단으로 생략하고 있고.
그리고 복각 단계에서도 좀 문제가 있었던 물건인 것 같은데, 덴온(Denon)에서 1990년대 초반에 나왔던 CD보다 훨씬 수록 시간이 짧은 편이라 좀 켕겼다. 실제로 들어보니 음높이(피치)가 다소 높은 편이라 WAV 파일로 뜬 뒤 보정해서 가능한한 정상 피치로 맞춰놓고 듣는 중이다. 하지만 이렇게 맞춰도 SP 바뀌는 시점마다 음정이 오락가락 하는 편이라, 전공자로서는 굉장히 신경쓰이는 탓에 편히 듣기는 힘든 물건이다.
음질 문제 외에도, 영어판 라이너 노트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밑의 세 번째 CD에 수록된 하이든 교향곡 91번의 것을 이 곡의 각 악장 템포 지시로 인쇄하는 병크가 발휘되어 있기도 하다. 군데군데 다소 어색한 단어나 관용구는 그렇다 쳐도, 이건 대체 뭐하자는 건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 서곡 '명명축일'
신교향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10001. 1929년 녹음)
신교향악단과 코노에 콤비의 음원들은 말러 교향곡 같이 묵직한 곡목 보다 이러한 서곡이나 간소한 협주곡의 녹음이 그나마 좀 나은 편인데, 이 서곡의 경우 전기 녹음 방식으로는 첫 녹음으로 기록되고 있는 물건이다. (세계 최초 녹음은 1924년에 프리더 바이스만 지휘의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이 만듬) 마찬가지로 일본 파를로폰 녹음인데, 요즘 연주들에 비하면 템포가 느린 편이지만 합주력은 말러에서 보여준 위태위태한 수준보다는 훨씬 낫다.
-CD 2- (일본인 음악가 국내 녹음 2)
요제프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 제11번
히가시후시미 쿠니히데/신교향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폴리도르 1201-3. 1932년 녹음)
위의 말러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세계 최초 녹음이라고 한다. 게다가 피아니스트는 일본 왕족 출신인 히가시후시미 백작이 맡았는데, 이후 불교에 귀의하면서 음악 활동을 접다시피 해서 남긴 녹음도 상당히 적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도 굉장한 레어템.
마찬가지로 연주 자체는 좀 느린 템포에 표정 관리 많이 하는 올드 타입이고, 말러에서처럼 지휘자 자신의 의사인지 아니면 음반 장수를 줄여보려는 의도였는지 관현악 리토르넬로 부분을 꽤 많이 가지쳐내 연주하고 있다. 음반사는 독일 폴리도르-현 도이체 그라모폰의 모체-의 일본 지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제2번
이와모토 마리/도쿄 교향악단/사이토 히데오
(일본 빅터 NH2018. 1944년 녹음)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캐관광으로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도 아주 드물게나마 음반 제작이 진행됐다고 하는데, 이 녹음도 마찬가지다. 아직 18세였던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 출신으로 훗날 '사이토 지휘법' 을 보급한 지휘자가 호흡을 맞춘 물건인데, 품질이 상당히 막장이었다던 당시의 음반들 치고는 꽤 괜찮은 소리를 들려준다.
참고로 악단인 도쿄 교향악단은 현재 활동 중인 같은 이름의 악단과는 관계없고, 정명훈이 특별 예술 고문으로 재직 중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모체인 관현악단이다.
-CD 3- (일본인 음악가 해외 녹음)
키시 코이치: 일본 모음곡 중 도톤보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키시 코이치
(일본 텔레풍켄 10635. 1935년 녹음)
키시 코이치: 일본 모음곡 중 꽃놀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키시 코이치
(독일 텔레풍켄 020711. 1935년 녹음)
키시 코이치: 일본 스케치 중 시장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키시 코이치
(일본 텔레풍켄 20625. 1935년 녹음)
키시 코이치: 일본 스케치 중 축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키시 코이치
(독일 텔레풍켄 020707-8. 1935년 녹음)
2집의 세 번째 CD는 일본 지휘자가 베를린 필을 지휘해 남긴 녹음들만으로 채워놨는데, 1930년대 초반에 독일에 유학해 음악과 영화 촬영을 배웠던 키시 코이치의 음원들이 포함되었다. 키시가 자비로 제작한 녹음들인데, 이외에도 가곡 여러 곡과 일본 스케치 전곡-여기에는 1번과 4번 곡만 수록됨-등 CD 두 장 분량의 음원들을 남겼다.
원본 제작사가 독일 텔레풍켄으로 표기된 음원들은 일본 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정식 발매되지 않은 채 테스트 프레스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에 일본 빅터에서 키시의 유족들로부터 허가를 받아 처음 복각한 바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빡빡한 녹음 일정이었다 보니 천하의 베를린 필이라도 가끔 버벅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옥의 티.
야마다 코사쿠: 교향곡 '메이지 송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야마다 코사쿠
(일본 콜럼비아 SW170-2. 1937년 녹음)
기시 외에 야마다 코사쿠도 1937년에 관변 단체인 '일독회' 의 후원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했는데, 이 때 녹음된 음원이다. 제목 그대로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메이지 덴노를 기리는 작품인데, 일본인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저 인물의 통치 기간 동안 경술국치를 당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게 볼 수는 없을 테고.
아마 정식 스튜디오 녹음이 아니라 방송녹음 혹은 실황녹음을 잡아서 만든 것 같은데, 음질이 상당히 탁하고 잡음도 심한 편이다. 이런 탓인지 음반 발매도 1950년에야 성사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SP 생산이 중단된 것이 1952년 쯤이라니 꽤 막바지에 나온 셈이다.
요제프 하이든: 교향곡 제91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코노에 히데마로
(독일 폴리도르 62792-4. 1938년 녹음)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민둥산의 하룻밤 (관현악 편곡: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폴리도르 E-180. 1938년 녹음)
키시나 야마다보다 먼저 베를린 필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코노에였는데, 음악 역량으로 평가받은 것인지 아니면 '3국동맹' 같은 정치적 배경이 강하게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음반까지 몇 종류 남긴 바 있었다.
이 녹음은 독일 폴리도르에서 제작한 물건인데, 하이든 교향곡의 경우 아마 세계 최초 녹음이라고 여겨진다. 무소륵스키 녹음은 일본 SP반을 복각 소스로 썼는데, 독일반보다 잡음이 좀 심한 편이지만 전반적인 음질은 대동소이하다. 코노에가 일본에서 제작한 녹음들과 달리, 하이든 1악장의 통상적인 제시부 반복 생략 등을 제외하면 특별히 잘려나간 악구가 없다는 것도 추가 사항.
-CD 4- (일본인 작품)
노부토키 키요시: 교성곡 '해도동정'
아사쿠라 하루코/야마우치 히데코/치바 시즈코/후지이 노리아키/
와타나베 타카노스케/나카야마 테이이치/쿠리모토 타다시/
도쿄 음악학교 합창단과 관현악부/키노시타 타모츠
(일본 빅터 A504-11. 1941년 녹음)
'듣고 비웃으려고' 한 음원. 초반에는 모더니즘에 천착했다가 후반에 민족주의 경향으로 돌아선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의 서사시에 곡을 붙인 합창 작품인데, 소위 '황기 2600년' 이 된 1940년에 쇼와 덴노에게 헌정된 '기회 음악' 이다.
키타하라의 시가 애초부터 '코지키' 나 '니혼쇼키' 같은 다소 구랏발 쩌는 신화나 역사서에 의거했기 때문에 객관성과 사실성을 담보로 한 텍스트는 아니었는데, 게다가 중일전쟁이라는 병크를 일으키던 때에 '덴노 중심의 국민 통합' 을 목적으로 내건 행사의 일환으로 작곡된 작품이므로 정치적 문제의 소지는 충분하다.
CD 해설서에는 다소 담담하게 작품 자체에 집중하면서 적어놓고 있지만, 작품의 성립 단계부터 정치적 목적이 뚜렷했던 데다가 패전 후 덴노가 초국가적 존재에서 평범한 입헌군주제의 상징으로 내려온 현재 상황에서도 어필할지는 글쎄올시다.
그리고 여담으로 원판 SP 세트는 총 여덟 장=15면으로 제작됐는데, 한 면이 남는 것을 이용해 노부토키의 노래 한 곡이 더 녹음되었다. 그 노래가 바로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의 뉴스영화에서 일본군의 옥쇄 소식 등 비장한 뉴스가 나올 때 BGM으로 쓰였던 군가 '바다로 가면(海ゆかば)' 이었는데, 이 세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행인 건가?
하시모토 쿠니히코: 교성곡 '황태자 전하 탄생 봉축가'
사와자키 사다유키/아사노 치즈코/아오키 히로코/키타 마타베이/이토 타케오/
도쿄 음악학교 합창단과 관현악부/하시모토 쿠니히코
(일본 콜럼비아 A185-7. 1934년 녹음)
노부토키의 교성곡과 마찬가지 취지로 들었던 음원. 하시모토는 유럽에서 배운 12음 기법을 비롯한 모더니즘 어법을 상당히 진취적으로 흡수한 작곡가였지만, 일본의 우경화/군국화와 더불어 꽤 비뚤어진 민족주의(라고 쓰고 군국주의라고 읽는다)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가 전후 제대로 관광당한 케이스였다.
아직 유럽 유학을 가기 전이었지만 당시 '도쿄음악학교 공동 창작' 으로 발표되었던 이 곡에서도 그런 방향 전환의 움직임이 읽혀지는데, 1933년 12월에 태어난 황태자 아키히토-현 일본 덴노-를 위해 쓴 기회 음악이다. 물론 작품 자체만 따져놓고 본다면 평이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군주제를 옹호한 음악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일본의 대내외적 정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쇼비니즘에 걸터앉은 음악일 뿐이라는 비판도 충분히 가능하다. 내 입장이 그렇고.
-CD 5- (외국인 음악가 국내 녹음 1)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제1번
에프렘 짐발리스트/일본 방송 교향악단/니콜라이 시페르블라트
(미국 컬럼비아 68596-D. 1930년 녹음)
20세기 초중반의 본좌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했던 짐발리스트가 일본 방문 중 녹음한 음원인데, 복각에는 미국에서 출반한 SP가 쓰였다. '일본 방송 교향악단' 이라고 표기된 악단은 사실 신교향악단이었는데, 방송 출연 때만 저 명칭을 사용했었다. 시페르블라트는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였는데, 체코 출신인 독일계 지휘자 요제프 쾨니히와 함께 초기 신교향악단의 외국인 지휘자로 자주 출연했던 인물이었다.
이외에 독주곡이나 실내악, 성악곡 등도 듬뿍 담겨 있는데, 일본인 음악가 뿐 아니라 내일한 외국 음악가들의 음원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짐발리스트 외에 조셉 시게티라던가 자크 티보, 미샤 엘만, 에마누엘 포이어만,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같은 ㅎㄷㄷ한 대가들의 일본 녹음이 수록된 것만 해도 수집가들의 구매욕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을 듯.
3집도 다른 세트와 컨셉은 대동소이했는데, 다만 '듣고 비웃을' 작정으로 산 음원들이 많다는 것이 후새드.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