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의 셋트 두 종류 외에는 낱장 세 종류를 주문해 받았는데, 물론 모두 한국에서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특별히 써둘 만한 물건들로 여겨진다.
여전히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 훨씬 유명한 인물이 바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인데, 작곡가로서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사후에도 간헐적으로 작품 연주가 종종 있었기는 했지만, 상업용 음반이라는 포맷으로 접하게 된 것은 1980년대가 와서였고.
푸르트벵글러 작품의 음반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레이블이 바로 낙소스 산하의 서브 레이블이었던 마르코 폴로였다. 원체 '듣보잡' 만 골라 CD로 만드는 대인배 근성을 자랑하는 레이블이다 보니 '뭘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게 만드는' 물건들이 그득했는데, 지금은 많이 위축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마르코 폴로의 푸르트벵글러 시리즈는 1987년 쯤에 알프레드 발터(Alfred Walter)라는 지휘자가 벨기에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교향곡 제 3번의 4악장판을 세계 최초로 녹음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지금 들어보면 구제불능의 음질 때문에 듣기가 마냥 쉽지는 않지만, 그 동안 3악장 까지만 완성된 미완성곡이라고 여겨진 곡의 제대로 된 모습을 처음 보여주었다는 의의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어 교향 협주곡과 교향곡 1번, 2번의 CD가 차례로 선보여졌고, 1993년에 녹음한 초기 관현악 선집과 여기 소개할 성악 작품집을 끝으로 완결을 보게 되었다. 이후 다른 음반사들도 조금씩 푸르트벵글러 작품들의 녹음을 발매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럭저럭 가짓수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
다만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굵직한 대규모 관현악 작품들의 경우 음질과 연주 모두 후속반들에 확실히 밀리는 모습인데, 해석차 같은 취향의 문제 외에 녹음에 기용된 악단들의 연주력이 아무래도 좀 후달린다는 넘사벽급 약점 탓인 듯. (물론 교향곡 2번의 경우 메이저급 악단인 BBC 교향악단이 기용되어 상대적으로 훨씬 나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교향곡의 경우 염가반 경쟁사인 아르테 노바에서 낱장들로 나온 게오르게 알렉산더 알브레히트 지휘의 바이마르 국립 관현악단 녹음들을 더 쳐주고 싶다.
대작들에서는 밀린다고 하더라도, 이후 지금까지도 다른 음반사들이 그 아성을 좀처럼 넘보지 못하는 초기 관현악곡들이나 성악곡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성악 작품집 CD의 경우 낙소스 본사에서도 CD 발매를 중지하고 MP3 음원만 온라인으로 팔고 있는 상황이라, CD를 꼭 구해야 겠다는 '허영심' 만 커져갔다.
그래서 일본 HMV에서 이 음반의 재고가 있다는 것을 보고 주문 목록에 같이 넣었고, 마침내 도착. 역시 무서운 클덕들의 나라 답다.
ⓟ 1994 HNH International Ltd.
취리히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푸르트벵글러 유고 문서의 목록을 참고해 보면 작품 숫자가 미완성된 것들까지 포함해 120곡에 이르는데, 초기에는 주로 피아노 독주곡을 많이 썼고 1896년부터 첼로 소나타를 비롯해 피아노가 붙은 기악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짤막한 동요 정도의 가곡이나 2중창곡들도 썼는데, 완성작과 미완성작 포함해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가곡들은 21곡에 달한다.
독일어 위키피디아를 참고해 보니 2008년에 우테 노이메르켈이라는 성악가가 피아노 반주까지 겸해서 전곡을 녹음했다고 되어 있는데, 음반 소재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 외에 열한 곡을 발췌한 것이 이 마르코 폴로 CD에 들어 있는데, 수록 순서는 다음과 같다;
슬픈 사냥꾼 (Der traurige Jäger.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시. 1898경)
보물찾는 사람 (Der Schatzgräber.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시. 1898경)
참을성 (Geduld. 파울 하이제 시. 1897)
호수 위에서 (Auf dem See.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 1900)
내게 노래를 보내주는 친구여 (Du sendest, Freund, mir Lieder. 루드비히 울란트 시. 1895)
추억 (Erinnerung.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 1897)
조국 (Das Vaterland. 루드비히 울란트 시. 1896)
갈매기의 비행 (Möwenflug. 콘라드 페르디난트 마이어 시. 1900)
천사가 하프를 탈 때 (Wenn die Engel Harfe spielen. 카르멘 실바 시. 1898경)
기억 (Erinnerung. 테오도어 쾨르너 시. 1898경)
병사 (Der Soldat.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시. 1899)
아직 10대였던 뉴비로서는 꽤 묵직한 시들을 골라서 작곡했는데, 다만 곡들은 대개 3분 이상을 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간소한 규모로 되어 있다. 규모는 작아도 유절가곡이 그다지 많지 않은 점이 특이한데, 그 만큼 가사로 사용된 원시의 해석과 상상력에 많이 의존하는 전형적인 독일 가곡들로 여겨진다.
노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테너인 귀도 피칼(Guido Pikal)이 맡았는데, 속지를 보니 안톤 데르모타와 크리스타 루드비히의 제자라고 되어 있다. 목소리는 상당히 가늘고 얇은 편인데, 너무 간드러지게 부른다는 이미지가 좀 걸린다. 피아노 반주는 그 동안 지휘자로만 나왔던 알프레드 발터가 맡았는데, 반주 파트에 특별히 기교나 심오한 해석을 요구하는 곡들이 아니라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합창곡의 경우에는 다시 취리히 중앙도서관 목록을 참조해 보면 1897-98년에 작곡한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 이 처녀작으로 검색되는데, 같은 제목의 멘델스존 교성곡과 마찬가지로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 에서 가사를 취한 곡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작곡에서 베토벤을, 문학에서 괴테를, 미술에서 미켈란젤로를 우상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첫 대규모 합창곡의 가사로 파우스트가 선택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듯.
파우스트에 대한 천착은 그 이후에 작곡된 후속 합창곡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앨범에서 합창곡으로 수록된 세 곡 중 두 곡이 그렇다. 그리고 맨 마지막 트랙은 푸르트벵글러 최후의 합창곡이 되어 버린 '테 데움' 이 장식하고 있고.
합창과 관현악 '사라져라, 그대의 어두운 전당이여(Schwindet, ihr dunklen Wölbungen.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 1902)
독창(소프라노 & 테너), 합창과 관현악 '종교적 찬가(Religiöser Hymnus.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 1903)
독창(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합창과 관현악 '테 데움(Te Deum. 가톨릭 전례문. 1902-09)'
이탈리아 해적판을 통해 처음 접한 '테 데움' 빼고는 다른 경쟁 녹음이 거의 없는데, 다만 그렇다고 해도 연주의 질까지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첫 곡은 그렇다 쳐도, 관현악 편성이 갑자기 3관 혹은 그 이상으로 증배되기 시작하는 '종교적 찬가' 에서부터 소규모 편성의 합창단이 관현악에 관광당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
특히 '테 데움' 에서 문제가 꽤 심각한데, 해적판에서 느린 템포와 큰 스케일로 중후한 맛을 풍긴 한스 셰맹-프티 지휘의 베를린 필과 합창단 연주와 비교해 보면 훨씬 빠르게 밀어붙이고 있다. (셰맹-프티는 약 33분, 발터는 약 25분이다.) 하지만 템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불균형과 중량감 상실이라는 좀 더 큰 문제가 겹치는 바람에 얼핏 들으면 경박하게 들릴 소지까지 있다.
어쩌면 CD의 수록 시간 때문에 빨리 연주했을 지도 모를 일인데, 가곡까지 같이 담다 보니 77분을 넘는 용량이 된 것을 보면 정말 그럴 지도. 합창단 규모를 좀 보강하고 저음역을 좀 더 강조했다면 너무 가볍고 노래가 벙찌다는 인상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속지의 해설은 초기 관현악 선집과 마찬가지로 미레유 게이링(Mirelle Geering)이 담당하고 있는데, 키스 앤더슨의 영어 번역과 독일어 원문 두 가지 언어로 인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녹음 당시에는 모두 정식 출판되지 않았던 곡들이라 취리히 중앙도서관의 양해를 얻어 복사한 자필 원고를 연주에 사용했는데, 자세한 분류 번호까지 친절하게 기재되어 있다.
해설 뿐 아니라 낙소스 음반 치고는 꽤 드물게 모든 곡의 가사가 속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독일어 원어로만 되어 있고 테 데움은 원문인 라틴어와 독일어가 병기되어 있을 뿐이어서 영어에만 익숙한 이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다. 하지만 독일어 배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나름대로 꽤 괜찮은 부산물이 될 듯.
연주에는 다소 불만이 있어도 나름대로 노려왔던 물건을 입수한 탓에 그렇게까지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CD들은 정말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거나 인터내셔널 릴리즈가 안돼서 참다못해 지른 물건들인데, 다음 편에 '게속'.
*취리히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의 푸르트벵글러 유고문서 목록 (독일어): 클릭 (별도 창으로 뜸. 우선 홈페이지 메인 화면이 뜨고 몇 초 뒤 자동 이동되므로 김대기대기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