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감이 교차하는 해외 지름 4-일본작곡가선집 14집

낙소스에서 언제부턴가 나라별로 CD 시리즈를 내고 있는데, 가장 많이 나온 '아메리칸 클래식스' 를 비롯해 그 뒤를 잇는 '스패니시 클래식스', '그리크 클래식스', 그리고 '일본작곡가선집' 등이 눈에 띈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시리즈가 바로 일본작곡가선집이다.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이 든 음반이 일본 밖에서 정발되어 팔리는 경우는 그다지 많다고 보기 힘든데, 다케미츠 도루 같이 국제적 지명도가 대단히 높은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아직 일본 로컬반으로만 구해야 하는 음반들이 대다수다. 그런 점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낙소스에서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만을 선별해 음반으로 발매한다는 아이디어가 꽤 파격적이었고.

이 시리즈는 도야마 유조, 이후쿠베 아키라, 아쿠타가와 야스시 등의 작곡가들이 남긴 관현악 소품집을 담은 '일본 관현악 명곡집' 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22장이 발매되어 있는데, 2010년 1월 현재까지 신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어 위키를 참조해 보니 '제반상의 문제로 휴지중' 이라고 되어 있는데, 결국 별의별 음반을 마구 내던 천하의 낙소스도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경제난에 무릎을 꿇은 건지.

아무튼 옥석이 섞여 있는 저 시리즈는 한국에도 수입되었는데, 다만 한 장은 아직까지 일본 로컬로만 발매된 탓에 구할 수가 없었다. 일본 발매 순서로 따지면 14집인 벳쿠 사다오(別宮貞雄, 1922-)의 작품을 담은 CD인데, 기다리다가 지쳐서 연말의 지름 목록에 넣어버렸다.

ⓟ 2005 IVY Corporation & Naxos Rights International Ltd.  벳쿠는 일본에서 '신낭만주의' 유파로 분류되는 작곡가라고 하는데, 초기에는 베토벤 등 독일계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가 프랑스 유학 후 스승들이었던 미요와 메시앙의 영향으로 선법 등을 도입한 명상적인 노선으로 전환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12음 기법을 비롯한 '전위적인' 어법에는 분명한 반대 의사를 보였고, 지금도 계속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유학 시절에는 흠좀무한 에피소드도 있었다는데,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을 때 메시앙의 작곡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신청을 했을 때 딱 한 자리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자리를 놓고 벳쿠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이 같이 신청했는데, 결국 벳쿠가 들어가고 슈톡하우젠은 오리알 신세가 됐다고 한다. 지못미.)

낙소스 CD에는 교향곡 1번과 2번 두 곡이 수록되었는데, 2번의 경우 작곡자 자신이 가장 최근에 개정한 2004년판 악보를 세계 최초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주는 이 시리즈에서 러시아 지휘자인 드미트리 야블론스키와 함께 가장 많은 음반을 녹음하고 있는 일본 지휘자 유아사 다쿠오(湯浅卓雄)의 지휘로 10집(모로이 사부로)에서도 연주했던 아일랜드 국립 교향악단이 맡았다.

최근 나오는 낙소스 CD들은 다소 볼륨이 작게 녹음된 것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이 CD도 좀 그런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인 음질은 썩 괜찮은 편이다. 염가 레이블이라고 소리에 신경을 덜 쓰는 시대도 지났고, 최근에는 메이저 음반사들의 구조조정으로 대거 짤린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들이 낙소스로 이직했다는 소식도 들려오는 만큼 음질 구릴까봐 사기 꺼려지는 일은 앞으로 흔치않을 듯.

속지 해설은 다른 선집 CD들과 마찬가지로 가타야마 모리히데가 담당했는데, 일본 로컬반인 만큼 일본어 해설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영어 번역본이 나오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다만 일본어 해설의 경우, 음반 발매 시점까지 나온 작품 목록이 꽤 자세하게 별첨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심지어 악보가 출판된 작품과 음반으로 출반된 작품까지 p(published)와 r(recorded)로 표기해놨을 정도.

다만 가타야마의 다른 음반 해설도 마찬가지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 고, 손발리 오그라지는 자화자찬 증세가 종종 엿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터링을 하며 읽어야 할 듯하다. (특히 정치적인 목적의 행사를 위해 작곡된 기회음악들의 경우, 너무 음악 자체의 해설에만 집중해 곡의 성립 경위나 객관적인 평가 등은 따로 찾아봐야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시리즈 발매가 잠정 중단된지 1년도 더 넘은 상황이라, 앞으로 계속 진행될 지도 미지수라는 것이 약간 걱정되기는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일본에 비해, 한국 혹은 한국계 작곡가로 낙소스에서 CD가 발매된 이는 겨우 세 명-윤이상, 얼 킴, 류재준-뿐이라는 것도 확연한 비교가 될 따름이고. 하긴, 사진만 찍을라 치면 성질뻗치는 모 아저씨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있는 현실에서 뭘 기대할라고.

낱장으로 지른 마지막 CD도 꽤 충공깽을 선사하는 컨셉인데, 역시 다음 편으로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