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향곡 제 5번 (1987)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바리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한스 첸더
1983년부터 1년 주기로 꼬박꼬박 작곡한 교향곡들 중 마지막 작품이다. 4번까지는 순수 기악 작품으로 쓰여졌지만, 여기서는 바리톤 독창이 가세한다는 점에서 외관상 가장 특이하다. 가사는 2집에 들어 있는 '밤이여 나뉘어라' 에서도 언급한 넬리 작스의 반전평화 주제 시를 택했고, 각 악장마다 시의 표제가 적혀 있다. 각각 '기억(Erinnerung)', '우리 구제된 자들(Wir Geretteten)', '호소(Aufruf)', '그대 방관하는 자들(Ihr Zuschauenden)', '평화(Frieden)'. 전반적인 곡의 성격은 이전 교향곡들과 비슷한데, 다만 성악이 들어가는 탓에 교향곡과 교성곡(칸타타)의 이종교배 성격도 지니고 있다.
지금은 무대에서 은퇴했지만,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성악 레퍼토리들을 거의 모두 커버하고 그 수준도 고퀄이라 본좌급으로 손꼽히는 피셔-디스카우의 이름부터 ㅎㄷㄷ하다. 이미 헨체의 오라토리오 '메두사호의 뗏목' 이나 루토수아프스키의 '잠의 정원' 같은 현대곡에서 그 실력을 짐작할 만한 가창을 들어본 바 있어서, 꽤 믿을 만한 노래를 들려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다만 녹음 당시 나이가 나이였던 탓에(62세) 아무리 날리던 성악가라고 해도 발성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윤이상도 어느 정도 타협을 본 모양이다. 속지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데, 몇몇 고음역을 옥타브 혹은 다른 음역으로 낮추거나 아예 빼버리는 식으로 첨삭을 가했다고 주기되어 있다. 물론 이 첨삭은 초연 때만 행해졌고, 이후 보테 운트 보크에서 총보로 출판할 때는 원곡 그대로 간행되었다.
관현악단인 베를린 필의 경우,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클래식 관현악단의 지존으로 손꼽히는 터라 더 이상의 말이 必要韓紙?...겠지만, 이 악단이 동시대의 현대음악 연주에도 최상급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장담하기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게다가 밑에도 쓰겠지만, 단 하루만의 연주회를 담은 녹음이라 그런지 소소한 실수나 불안불안하게 지나가는 대목들이 종종 눈에 띄기도 하고. (피셔-디스카우도 1악장 마지막 독창 구절인 erreicht ist에서 ist를 부르지 않고 지나갔다.)
*가능한한 원보에 충실하고, 실수가 적은 연주로 듣고 싶다면 CPO에서 나온 윤이상 교향곡 전집의 음원이 나을 듯. 킹스 싱어즈 창단 멤버였던 영국 바리톤 가수 리처드 솔터가 독창을 맡았고, 일본 지휘자 우키가야 다카오 지휘로 폴란드의 비드고슈치 포모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녹음은 1987년 9월 17일에 베를린 축제주간(Berliner Festwochen) 일정 중 하나로 필하모니에서 열린 공연의 실황인데, 물론 세계 초연 무대이자 윤이상의 70세 생일 기념으로 마련된 무대이기도 했다. 다른 실황 음원들과 달리 공연 종료 후의 박수 소리도 그대로 살려넣고 있는 것도 특징.
2.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 '무악' (1978)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한스 첸더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 중 연주 빈도가 가장 높은 곡 중의 하나가 이 '무악' 이다. 1년 뒤 작곡한 '서주와 추상' 과 함께 동서양 음악의 강한 대비 효과를 노린 작품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윤이상 작품 분석 때 흔히 등장하는 음양론처럼 두 요소가 대립각을 세우거나 마지막에 서로 융합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마디선 개념이 희박한 정악의 궁중무풍 음악과, 뚜렷한 박자 위에서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서양식 음악이 병치되어 나오는 식의 컨셉인 셈.
개인적으로도 꽤 자주 즐겨듣는 곡인데, 처음 구입한 음반은 카메라타에서 나온 첸더 지휘의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음원이었다. 이어 김홍재 지휘의 음원 두 개를 추가 구입했고, 여기 나온 것까지 합하면 총 네 종류. 현대 관현악곡 치고는 꽤 가짓수를 많이 갖춰놓은 셈이다. 실제 공연에서 들어본 곡이기도 하고.
수록된 음원은 1981년 12월 19일에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열린 공연의 실황인데,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윤이상 생전의 절친한 친구였던 첸더가 지휘했다. 간간이 나오는 오보에 세 대의 피리 스타일 악구가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합주력 자체는 교향곡보다는 좀 더 안정된 편이다. 마지막 부분인 263~266마디 전반부가 생략되었는데, 첸더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다른 '어른의 사정' 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첨삭은 속지에 별도로 기재된 사항이 없다.)
속지에는 윤이상의 오페라 대본을 작성하기도 했고, 윤이상과 관련한 여러 연구 문헌을 발간한 하랄트 쿤츠가 1981년에 베를린 필의 잡지에 기재한 글이 추가로 실려 있다. 베를린 필이 연주한 윤이상 작품과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비교적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발터-볼프강 슈파러가 추가로 정리한 기록과 내가 갖고 있는 음원 정보까지 더해 보면 이렇다;
교착적 음향 (1965년 4월 22일. 고프레도 페트라시 지휘)
예악 (1968년 4월 1일. 라인하르트 페터스 지휘)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71년 3월 17일. 슬라브카 타스코바, 배리 맥다니엘, 에른스트 젠프 실내 합창단 협연. 라인하르트 페터스 지휘)
서곡 (1973년 10월 3일. 한스 첸더 지휘. 세계 초연)
무악 (1981년 12월 19일 한스 첸더 지휘)
교향곡 제 1번 (1984년 5월 15-17일. 라인하르트 페터스 지휘. 세계 초연)
교향곡 제 5번 (1987년 9월 17일.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협연. 한스 첸더 지휘. 세계 초연)
서주와 추상 (1988년 12월 11일. 로린 마젤 지휘)
*이외에 베를린 필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단원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이나 실내악단이 참가한 경우도 추가하자면;
플루트 협주곡 (1977년 7월 3일. 칼하인츠 쵤러 협연. 귄터 바이센보른 지휘. 세계 초연)
→ '히차커 여름음악제 관현악단' 명의로 참가.
목관 5중주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 (1988년 10월 9일. 하인츠 홀리거 지휘. 세계 초연)
→ 베를린 필 실내악 그룹인 '샤룬 앙상블' 이 연주.
물론 동시대 음악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당시 베를린 필의 수장 카라얀이 지휘한 공연은 하나도 없지만, 꽤 여러 곡들이 초연 혹은 재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교착적 음향' 은 원체 곡이 어려웠고 단원들도 그저 의무감에 짓눌려 연주했기 때문인지, '그리 성공적인 첫 만남은 아니었다' 고 인정하고 있다. 1988년 이후의 연주 기록은 확인할 길이 없어서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6집과 7집은 독주곡들과 실내악곡들이 실려 있는데, 기존 음원들과 중복되는 곡들도 있고 해당 작품의 유일한 음원들도 섞여 있다. 역시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