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앨범 커버는 독일 현대 화가 귄터 리스가 그린 '로즈비타 슈테게를 위한 스케치북' 이라는 추상화로 꾸며져 있다.
1.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
로즈비타 슈테게(플루트), 란돌프 슈퇴크(피아노)
같은 해에 좀 더 일찍 완성한 바이올린+피아노 듀엣곡인 '가사' 와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곡인데, 12음 기법의 의존도가 아직은 높은 편이지만 특정 음을 중심으로 곡을 전개시키는 '주요음 기법(Haupttontechnik)' 이 실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의 작품으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길게 끄는 음을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정적인 부분과 빠르게 음을 쏟아내며 역동감을 나타내는 동적인 부분의 대비라는 요소가 꽤 강조되어 나오는 것도 특징.
윤이상 실내악 작품의 단골 연주가인 슈테게와 협연한 피아니스트는 독일 출신의 란돌프 슈퇴크로, 만하임 음대와 뉴욕 줄리어드 음대에서 배우고 지금은 모교인 만하임 음대와 자르브뤼켄 음대 피아노과 강사로 활동중인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수록 음원은 2007년 11월 10일에 베를린 콘체르트할레 분데스알레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
2.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두 개의 소품 '대비' (1987)
콜랴 레싱 (바이올린)
반주 악기 없이 단일 악기만으로 곡을 쓰는 일은 그리 녹녹치 않은 과제인데, 윤이상의 경우 의외로 이런 영역에서 꽤 여러 편의 작품을 남긴 바 있다. 무반주 바이올린곡은 1976년에 처음 쓴 '대왕의 주제' 부터 1984-85년의 소품 모음집인 '리나가 정원에서', 그리고 이 곡까지 세 편이 있는데, 가장 많이 연주되고 녹음되는 곡은 바흐 주제로 작곡한 '대왕의 주제' 인 듯 하다.
'대비' 의 경우 카메라타에서 나온 타츠미 아키코 연주의 음원으로 처음 들었는데, 두 개 악장으로 구성되어 악장 사이의 대비 효과도 노리고 있지만 개별 악장 내에서도 상반된 요소들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대비 효과 외에도 느리고 음이 움직임이 적은 쪽이던, 아니면 수없이 음표를 쏟아내며 후다닥 지나가는 쪽이던 연주하기 참 어려운 곡이라는 인상도 컸고.
앨범 속지에는 발터-볼프강 슈파러의 해설 외에도 연주자인 레싱이 CD 발매에 즈음해 직접 윤이상 작품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글을 추가로 집필해 실었는데, 1982년에 '대왕의 주제' 를 연주했던 탓에 완전히 생경하지는 않았다지만 이 곡의 악보를 받아보고는 '너무 어렵고 거의 연주 불가능한 인상을 받았다' 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녹음까지 한거 보면 악에 받쳐서 연습했던거 같다.칼스루에 태생인 레싱은 바이올리니스트 외에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학자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인인데, 현재 슈투트가르트 음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연주자로서 주로 다루고 있는 곡들이 현대음악 혹은 나치 시대에 탄압받은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 등 레어템들이라 이 분야에서 매우 빠삭한 연주자인 듯. 녹음은 밑에 쓸 '대왕의 주제' 와 함께 2007년 10월 1일에 슈투트가르트 음대 콘체르트잘에서 제작한 스튜디오 음원이다.
3.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 (1974): 제 3번
헨미 아야 (피콜로)
6집에도 실렸었던 연습곡 시리즈인데, 여기서는 3번과 5번 두 곡을 수록하고 있다. 각 곡당 악기 하나 씩을 배당해 작곡했는데, 3번에서는 플루트족 악기 중 가장 음역이 높은 피콜로를 쓰고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빠른 음형이 주가 되는 양쪽 부분 사이에 약간 정적인 대목을 끼워넣어 대비 효과를 주고 있다.
연주를 맡은 헨미 아야는 일본 홋카이도 태생 플루티스트로, 도쿄와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 베를린에서 수학한 연주자라고 한다. 도쿄에서 배울 때는 재일 한국인 플루티스트인 김창국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바로 이 연습곡 전곡을 세계 초연한 연주자였다. 베를린에서도 윤이상 작품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로즈비타 슈테게의 제자여서 나름대로 윤이상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듯 하다.
2006년 1월 23일에 베를린의 톤스튜디오 분데스알레에서 제작된 스튜디오 녹음을 수록했는데, 뒤에 나올 5번도 같은 날 녹음한 음원이라고 한다.
4.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1958)
란돌프 슈퇴크 (피아노)
윤이상이 남긴 피아노 독주곡은 매우 적은데, 이 곡과 일본 피아니스트 다카하시 아키를 위해 1982년에 작곡한 '간주곡 A' 두 곡이 전부다('소양음' 의 피아노판까지 억지로 넣어도 세 곡). 유럽에서 처음으로 완성하고 또 출판한 작품이기도 한데, 후속곡(이지만 이 곡보다는 며칠 일찍 초연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과 마찬가지로 쇤베르크류 12음 기법의 강한 영향권에 놓여 있을 때의 곡이다.
당연히 음렬을 짜서 작곡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쇤베르크를 비롯한 신 빈 악파 작곡가들의 피아노 독주곡을 꽤 꼼꼼하게 분석하고 작곡에 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슈파러의 분석에 따르면 두 번째 곡의 첫머리 음형이 쇤베르크의 작품 11번 첫 곡과 동일해 일종의 오마주라는 듯. 각 곡들은 모두 1~2분 내외로 상당히 짧은 편인데, 개별 곡들 만으로 따져보기 보다는 다섯 곡을 섹션 단위로 묶어 하나의 곡으로 볼 수도 있다.
음원 정보는 '가락' 과 동일하다. 윤이상 피아노곡 전곡 음반으로는 한가야가 '소양음' 피아노판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까지 커플링한 CD가 네오스에서 발매되어 있는데, 국내 수입도 됐지만 SACD 포맷이라 가격이 꽤 ㅎㄷㄷ해 살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나마 물량도 달리는 것 같은데, 풍월당에서 연초에 목격했지만 며칠 뒤 가니 누가 먼저 사갔는지 없었다. lllorz
5.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 (1974): 제 5번
안드레아스 키슬링 (플루트)
플루트 연습곡 시리즈의 마지막 곡. 1번처럼 일반적인 플루트를 사용하고 있고, 크게 세 섹션으로 나눌 수 있다. 동-정-동 구성인데, 물론 연습곡 컨셉답게 4분음 글리산도나 2중 트레몰로, 고음역에서 작은 음량의 요구 등 굉장히 까다로운 기교의 표현도 마다하지 않아 난이도는 상급.
연주한 플루티스트인 키슬링은 독일 감멜스하우젠 출신의 젊은 연주가인데,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배웠고 아직 20대인 나이에도 독일의 각종 음악상이나 경연대회에서 수상하고 있는 등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가라고 한다. 수록 음원은 3번 트랙의 연습곡 3번과 같은 시기/장소에 만들어진 녹음.
6.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 (1976)
콜랴 레싱 (바이올린)
윤이상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중 첫 번째 곡이자,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 지금까지 들어본 음원만 타츠미 아키코(카메라타), 올레그 카간(콜레뇨), 사스키아 필리피니(예클린) 세 종류고, 이외에도 몇 종류 더 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꽤 친숙한 주제로 작곡된 곡이고, 바이올리니스트의 기교 역량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소품이라 자주 무대에 올리는 모양.
대부분 창작곡인 윤이상의 유럽 시절 작품 중 매우 드물게 타작의 주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바흐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알현했을 때 왕에게 받고 '음악의 헌정' 을 썼던 그 주제다. 곡집 중 6성 리체르카레에 쓰인 것이 유명한데, 평균율 옥타브권의 12음을 모두 쓴 당시로는 꽤 독특한 주제라 이후 12음 기법이 등장했을 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2차 창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예 안톤 베베른이 저 리체르카레를 특유의 점묘 스타일 관현악법으로 관현악 편곡한 버전도 있고.
하지만 윤이상에게 저 주제는 그리 '작곡하기에는 친숙치 않은' 재료였다고 하는데, 일단 첫 주제는 프리드리히 2세의 것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후 자유로운 변주 스타일로 전개되면서 주제의 모습은 세세한 분석으로 잡아낼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첫 주제의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물론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음 길이를 늘이거나 다른 음을 곳곳에 끼워넣어 첫머리로 복귀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대비' 에서처럼 레싱의 독주로 녹음되었고, 녹음 장소와 시기도 동일하다.
7.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1976)
하르트무트 로데 (비올라), 란돌프 슈퇴크 (피아노)
'가락',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과 함께 이 CD로 처음 들어본 곡. 피아노 동반 2중주라는 편성은 '가사' 나 '가락', '노래', '율' 등에서 이미 볼 수 있는 스펙이라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윤이상 작품 중 비올라가 주역이 되는 곡은 이 곡과 1988년에 쓴 두 대의 비올라용 듀엣인 '내성' 이 전부다. 비올라가 처음에 내놓는 음정들이 곡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는데, 크게 세 섹션으로 나눌 수 있는 3부 구성 작품.
비올리스트 로데는 독일 힐데스하임 출신 연주가로, 빈과 하노버에서 배운 뒤 칸딘스키 현악 3중주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4중주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독주와 실내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엠데게에서 나왔던 라이프치히 현악 4중주단의 브루크너 현악 5중주 앨범에서 제 2비올라를 맡아서 그리 생경하지는 않은 연주가였는데, 다만 독주자로서의 역량을 확인한 것은 이 음원이 처음이다.
수록 음원은 2007년 11월 8일에 베를린 콘체르트할레 분데스알레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인데, '가락' 과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음원들도 이틀 뒤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공연의 실황인 점으로 봐서는 아마 시리즈로 열린 연속 연주회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일곱 장에 대한 그지같은 리뷰가 끝났다. 특정 음악인 협회의 회원으로 가입해 구입한 첫 음반들이고, 회원에게만 판매된다는 점에서 희소 가치를 충분히 하는 음반들이라는 점에서 다음 CD들도 기대하고 있는 중. 윤이상 작품 중 합창곡과 오페라의 경우 녹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쪽에서 나올 신보도 기대하고 싶다.
뱀다리: 올해(2010) 통영국제음악제 보러 1박 2일 일정으로 통영에 세 번째로 갔다왔는데, 다음 포스팅은 이 때의 여행기들로 정했다. 물론 윤이상이라는 키워드 보다는 이리저리 싸돌아다닌 것과 처묵은 것들에 대한 주저리 위주이니 큰 기대는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