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훼이크인지 뭔지. 어쨌든 토요일에 두 번째로 다녀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확실한 반정부주의자가 된 나를 쌩까시라. 일부 이글루의 '쿨게이' 들이여.
오후 4시 46분 쯤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다. 이미 공원에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는데, 전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내게는 그다지 반갑다고 할 수 없는 '깃발부대' 들의 등장이었다. 어느 정도 공유하는 것은 있겠지만, 일단 2002년의 씁쓸한 기억 때문에 그들의 대열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가 행진하는 시간에 맞춰 나왔다.
행렬은 종로 4가와 청계천을 건너서 을지로를 타고 가는 루트로 진행됐고, 교통경찰들이 적절히 도로를 통제하고 행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고, 일단 서울광장에 도착해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문화제는 솔직히 말하자면 전날보다 내 개인적 취향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가족발언을 신청하고 무대에 올라온 부부는 너무 흥분해서 사회자 역할을 하는 정도로 좀 도를 지나친 면이 있었고, 어떤 스님과 민중미술가의 퍼포먼스는 시각적 효과가 부족할 것을 우려했는지 낭송이 곁들여져 진행됐지만 그 어조가 너무 감정적이라서 오히려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뭐 그런거야 어쨌건. 사회자가 청운동에서 집회를 벌이던 시민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시민들은 문화제를 중단하고 그 쪽으로 가자고 외쳤다. 그러자 사회자도 예정된 순서를 모두 중단하고 그 쪽으로 갈 것을 결의하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학교 학생회와 노동 단체들의 깃발 부대도 있었고, 또 시민들의 숫자도 굉장했기 때문에 대략 세종로, 소공로, 서울역 방면 세 갈래로 나뉘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서울역 방면으로 걷다가, 대열이 다시 거꾸로 올라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막혔다고 판단해 국가인권위원회 방면으로 교보빌딩이 있는 쪽으로 가봤다. 그러나 거기에도 진입을 예상한 전경들이 막아서서 대치하고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조계사 쪽으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그러나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오늘 집회도 그냥 서울광장쪽에 모여 대치하다 끝내거나 하는 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서울광장 쪽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 때 세종로로 통하는 경찰 병력은 상당히 적었다. 그 틈을 노려 깃발부대가 달려가 닭장차들이 포위 대형으로 움직이는 것을 에워싸면서 순식간에 길이 뚫렸고, 나는 그 뒷쪽에 따라가는 시민들 틈에 끼여서 걸었다. 도로는 전날처럼 계획적이었는지 뭔지 모를 중앙선 표지석의 물로 흥건해 있었다.
경찰 병력은 전날 지켰던 방어선을 포기하고 꽤 멀리까지 후퇴해 있었는데, 세종로 쪽은 일단 미국대사관부터 방어하자고 생각했는지 이순신 동상을 기점으로 도로 한 쪽에 전경 병력과 닭장차들이 빈틈없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쪽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그 길로 보수 공사중인 광화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갔다.
경찰들은 경복궁 돌담길-청와대로 가는 가장 확실한 루트-과 자하문터널로 통하는 길 양 쪽에 병력과 차량을 겹겹이 동원해 막아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대치가 시작되었고, 전날 그랬던 것처럼 예비군 자원봉사자들이 질서 유지와 '몸빵' 을 위해 조를 짜고 대열을 지어 가고 있던 것도 볼 수 있었다.
경복궁 돌담길의 선두에는 깃발부대가 몰려 있었고, 폭력시위로 격화될 조짐이 있어서 그리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앞을 막고 있던 닭장차를 흔들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시민들은 '비폭력' 을 연호하며 그것을 그만둘 것을 수 차례 촉구했다. 닭장차 위에 올라간 전경들은 위협을 느꼈는지, 그 위에 올라가는데 성공한 몇몇 시민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듯 했다. 그리고...
갑자기 물이 쏟아졌다. 물은 그 위에 올라가 있던 시민들을 집중적으로 겨누어 쫓아냈고, 태극기를 들고 올라갔던 시민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 때를 시점으로 구급차의 출입이 잦아졌던 것 같은데, 물은 급기야 닭장차 위에 있던 시민들 외에도 맨 앞에서 몸빵하던 예비군들에게, 그리고 꽤 뒤에 있던 시민들과 그 중간에서 촬영하고 있던 기자들에게도 쏟아졌다.
여름 문턱에 서 있지만 해가 떨어진 다음에는 꽤 쌀쌀했기 때문에, 그냥 멀리서 맞은 사람들도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른 시민들이 그 자리를 메꾸었고, 그 시민들이 물공격을 당하면 다시 뒤로 빠지고 다른 시민들이 들어가고. 그런 식이었다.
나는 물대포 쏘는 장면을 찍어보려고 중계차 뒷쪽까지 가봤는데, 물을 맞은 시민들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깃발부대에 속한 시민은 분명히 아닌, 양복을 입고 있던 회사원들이나 남자친구와 같이 왔을 것이 분명한 곱게 차려입은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 일단 CDP같이 젖으면 안되는 것들을 가방 깊숙히 숨겨놓고 앞으로 나가봤다.
그리고 마침내 '샤워 타임'. 멀리서 봤을 때는 그냥 구부러져 나가는 물줄기라서 '그리 위력이 강하지는 않군' 이라고 평가절하한 살수차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건 뭐 쇼생크탈출 패러디도 못하겠구만. 안경이 날아갈 까봐 고개를 돌리고 버텨봤다. 서있을 만큼은 되었지만, 따갑기는 꽤 따가웠다. 결국 샤워를 즐기게 해준 이들에게 감사의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뒤로 빠졌다.
첫 샤워 타임이 시작된 뒤 길거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소요사태가 일어났나 했지만 이제 그 쓸모를 알게 되었다. 흠뻑 젖은 시민들이 옷과 몸을 말리기 위해 종이 쪼가리며 여타 태울 것을 넣어 만든 모닥불이었고, 그 틈에서 몸을 말리면서 인권유린감시단(맞나?) 단원으로 보이는 한 분이 주신 두유를 마셨다. 가방을 열어보니 앞쪽 것만 조금 젖었을 뿐, 걱정했던 CDP나 악보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 센 물줄기를 정면으로 맞아 다친 시민들도 속출했고, 구급차는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부상자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시민들의 배려로 몸을 말려봤지만, 계속 새로운 샤워 인원들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자리를 내주고 다른 쪽으로 가서 말리고 하는 식으로 옮겨다녔다.
갈아입을 옷 그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중간한 상태로 있다가 오한이 오는 것을 느꼈고, 결국 2시 2분 쯤 다시 광화문을 등지고 와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좀 젖어 있다는 것을 보고는 기사가 '집회 다녀오셨나 보네요?' 라고 묻더라. 내심 미안하긴 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내려 집에 돌아왔다.
내가 '후퇴한' 뒤 경찰은 기동타격대까지 동원해서 100여 명을 연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물대포에 안면을 맞아 실명 위기까지 당한 학생도 있고, 전경들이 가한 방패 공격으로 다친 시민도 있다고 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닭장차를 흔들거나 가끔 깡통 등을 던져서 '엿을 먹인' 수준이었지만, 그런 치기 어린 저항에 쏟아진 살수차 물줄기나 방패 스킬은 '진짜 부상자' 를 속출시켰다. 젠장할.
며칠 전 내가 이글루스 피플 인터뷰를 다시 했을 때, 나는 내가 나름 호감을 갖고 있던 블로거 몇몇의 행동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쓴 바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밸리를 돌면서 그 실망감은 더 커졌다. 아직도 배후 세력이나 주동 세력 이야기를 꺼내며 애국 시민임을, 준법 시민임을, 혹은 이성적이고 중립적인 개념인임을 자처하는 블로거들은 대부분 내 차단 기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목격한 한, 집회 참가자나 참가 단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공유하면서도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다함께' 가 참가한 한편 다함께의 방향성을 비판하는 단체도 참가했고, 문화제 때 깃발부대들이 사회자의 깃발을 내려달라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 있던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었고, 취객들이 필요 이상의 소란을 벌일 때 그들을 제지하고 달래고 설득한 시민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매한 대중? 나는 고등학생 때 문법 선생님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계몽주의는, 계몽을 하려는 자가 계몽을 받으려는 자보다 위에 군림할 때 깨어지는 법이다."
대통령은, 정부는, 고위 경찰 당국자들은, 그리고 이글루스의 쿨게이들은 위에 군림하고 있는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는 지를 한 번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물론 그들 중에는 "나는 계몽하고 있지 않아. 단지 멍청한 녀석들을 핀잔주고 싶을 뿐이지." 라고 낄낄대는 양아치들도 있겠지. 나도 낄낄대면서 가볍게 받아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