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을 해결했던 한일김밥의 외관. 아예 건물 하나를 올려놓고 영업하는 모습에서 꽤 성공한 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충무김밥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만, 통영의 옛 지명은 '충무' 였다. 물론 어원은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에게 사후에 내려진 시호인 '충무공'. 하지만 1980년대인가 90년대에 '수군통제영' 이었던 지명을 따 통영으로 개명한 것이었는데, 물론 개명 후에도 이순신은 이 곳을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한 때 관광 자원으로 운용했다가 관심이 시들자 이 쪽으로 인양해온 선박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바로 거북선이었다. 비록 원본 선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복제품이고-원래 거북선보다 더 크다-, 함내의 재현도도 그렇게까지 꼼꼼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시대 고증에 충실하게 해놓았다.
여러 종류의 함포와 신기전, 지휘관의 칼, 화살 등 무기의 복제품과 이순신/임진왜란 관련 역사적인 문건들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밀덕후라면 찬찬이 뜯어보고 비평할 재미가 쏠쏠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있게 본 것은 함내 뒷편의 지휘관/함장실과 뒷간(...)이었는데, 뒷간의 경우 뱃바닥 일부를 뚫어놓아 용변을 보면 그대로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극히 간단한 구조였다.
통일호 객차의 화장실과 비슷한 구조였는데, 사극 '불멸의 이순신' 에서는 일본 수군 측이 크리넥스를 쓸 정도로 진보한 기술을 자랑한 반면 큰 일을 본 뒤의 뒷처리는 새끼줄 꼰 것으로 마무리했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휘관실과 함장실 사이에는 승함 인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실도 있었다고 하지만, 이 복제품에서는 생략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복제품 거북선의 최대 묘미는...
본격_무심한듯_시크하신_가카.jpg
거북선을 돌아본 뒤에는 좀 조용한 곳을 찾아 통영시민문화회관 근처인 남망산조각공원 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여전히 극악한 경사의 고갯길을 올라가야 했는데, 일단 올라오고 나면 항구에 인접한 곳 치고는 매우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폰카 화질에 뭘 바라랴. OTL 직접 눈으로 본 풍경은 여전히 멋진 모습이었지만, 좋은 화질의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던 것이 아쉬울 따름. 짤방들의 왼편에 보이는 연두색 구조물은 인근 조선소의 크레인으로 추정된다.
벤치에 앉아 꿀빵 두 개도 해치웠다. 분점 제품이라고는 하지만 본점 것과 별 차이가 없는데, 튼실한 속앙금과 미칠듯이 찐득거리는 표면의 물엿은 여전했다. 그냥 단팥 도넛에 물엿 발라놓았다는 것만 봐서는 별 특색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내 입에는 여전히 맛있는 간식거리. 먹고 나서 한 묶음 더 살까 하는 강렬한 욕심이 들었지만, 간신히 그 욕구를 억눌렀다.
꽤나 청승맞게 간식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언덕을 내려와 또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PC방에서 잠깐 죽치고 앉아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돈나가는 일이니 처박혀 있지는 못했다. 느긋하게 저녁먹을 계획을 잡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싸돌아다니다가 배가 좀 꺼졌다 싶었던 오후 네 시쯤 다시 서호시장의 할매우짜로 향했다. 이번에는 시장 거리의 앞문으로 들어갔다.
우짜에 이어 통영의 마지막 식사로 택한 음식은 '빼떼기죽'. 가격표는 메뉴판에 붙어있지 않았는데, 한 그릇에 3000원이었다. 충무김밥이나 시락국, 우짜, 졸복국, 도다리쑥국, 멍게비빔밥, 해물뚝배기 같은 음식들은 통영시 홈페이지에도 소개될 정도로 이 지역의 명물 취급을 받고 있지만, 이 죽은 아직 지명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빼떼기는 경상도 사투리로 말린 고구마라는 뜻인데, 고구마는 수확 후 장기 보관하기 쉽지 않은 작물이라 제철에 구워먹거나 쪄먹어 없애버리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꽤 독특한 저장법으로 여겨질 듯 하다. 고구마의 껍질을 벗기고 얇게 썰어서 바깥에 널어 말리는 거라고 하는데, 바싹 마른 빼떼기는 좁쌀과 팥, 강낭콩 등의 잡곡과 함께 죽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쌀죽이나 팥죽 같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죽 종류가 아니라서, 다소 입에 안맞을 각오를 하고 시켜먹었다. 현지인들도 '먹을 게 없던 보릿고개 시절에 배채우려고 먹은 음식' 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보편화시키기 힘든 모양인데, 파는 식당도 찾아보기 꽤 힘든 편이었다.
한 술 떠서 찍어본 사진. 물론 초저퀄이라 별 차이는 없다. 다만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팥 알갱이나 하얗게 깔린 좁쌀 모양 정도는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 냄새는 약간 달달했지만 팥죽 냄새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고 한 술 먹었는데, 고구마를 넣어 달착지근한 맛도 있었지만 약간 짭짤한 맛도 섞여 있었다. 끝맛은 다소 시금털털하고 떨떠름했는데, 전체적으로 투박한 시골 음식 인상이 강했지만 이게 또 묘하게 입맛을 돋웠다. 같이 내온 깍두기도 완전히 아오안으로 만들고 쉴새없이 입에 떠넣어댔는데, 개인적으로는 충무김밥과 시락국, 우짜에 버금가는 임팩트를 준 음식으로 꼽고 싶을 정도.
돈만 좀 넉넉히 있었다면, 그리고 지퍼락 같은 용기를 미리 준비해 왔더라면 포장해가고 싶을 정도의 맛이었다. 점심과 초저녁 두 차례 연이어 찾아온 정성이 갸륵해서였는지(?????), 주인 할머니께서 식혜를 서비스로 주셨다. 물론 이것도 깔끔하게 비우고 나왔는데, 확실히 일반적인 죽 한 그릇 먹은 것 보다는 훨씬 배가 불렀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많이 먹었던 이유가 괜히 있는게 아니었을 듯.
그리고 나서 좀 더 돌아다니다가 통영시민문화회관으로 향했다. 통영의 먹거리에 끌려 온 것이기도 했지만, 역시 주된 목적은 통영국제음악제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김홍재 지휘의 울산시향 연주를 들을 기회였고,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 과 플루트 협주곡 두 곡을 실연으로 들을 기회이기도 했고. 하지만...
짤방 외에 추가로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공연 끝나고 화장실 들르며 내뱉은 혼잣말로 갈음한다;
"윤이상이 알콜중독자가 되고, 무소륵스키가 술끊고 갱생할 만한 대박 공연이었다."
그 뒤의 일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냥 시내버스 타고 터미널까지 갔고, 거기서 남부터미널 가는 밤차로 갈아타고 서울행. 이것저것 처먹으러 다니고 발이 부르트도록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까지는 꽤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정작 중요하게 여긴 이벤트에서 말짱꽝이 되고 말았다. 명색이 국제음악제에 참가하는 악단이었다면, 이보다 훨씬 더 빠삭하게 준비를 해왔어야 정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울에 떨어진게 새벽 3시가 넘어서였고, 터미널에서 심야할증의 흠좀무한 요금을 감수하고 택시타고 집에 돌아왔다. 잠시 쓰러져 잤다가 일어나 학원 가고, 그 뒤로는 다소 피곤했지만 평범한 일상.
언제 다시 갈 곳일 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기회와 여건, 현찰이 주어진다면 욕지도나 사량도 같이 배타고 가는 섬 구경을 좀 더 해보고 싶다. 진짜 통영 여행은 이런 거라고 주위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배타고 가는 여행은 많이 해보지 못한 터라 꽤나 동경하고 있기도 하고.
5월에는 광주에 한 번 가보려고 한다. 이번에도 음악회 때문인데,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특별히 준비하는 공연이라고 한다. 마침 구스타프 말러 탄생 150주년인 해이기도 해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을 특별 편성한 시민 합창단과 함께 공연한다고 한다.
비록 4~5악장 가사를 한국어 번안해서 부른다는 점이 좀 켕기지만-개인적으로 성악곡은 원어 가사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고 역사적인 기념 공연이라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 중이고. 물론 아직 못타본 광주지하철이라던가 하는 추가 요소들도 충분한 관심 거리인데, 제발 갈 수 있기를. 그리고 가서 실망하고 돌아오지 않기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