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광주항쟁, 공식 명칭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지 30년이 지났다. 끝이 0자 혹은 5자로 끝나는 해의 상징성은 꽤 중요하지만, 사실 어떤 이벤트가 없었다면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벤트는 이 글의 부제고.
사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울산시향 연주를 듣고 제대로 '데인' 탓에, 그 동안 꼬박꼬박 찾았던 교향악축제 무대도 죄다 거르고 라디오로만 몇몇 공연을 들은 정도였다. 물론 올해 들어 서울시향 연주회를 세 번이나 본 것은 예외 조항이었지만. 지방이라고 무시하는 거냐고 할 지 모르지만, 관현악단은 지방 음악인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기능 외에 양질의 음악을 만드는 기능 또한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광주시향의 경우 예전에 교향악축제 참가차 서울에 올라와 공연한 것을 한 번 본 외에는 실연으로 이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광주에 내려가서 공연을 볼까 하는 생각도 딱히 하지 않고 있었고. 그러다가 광주항쟁 30주년에 딱 맞춰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제 2번 '부활(Auferstehung)' 을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올해가 말러 탄생 150주년이기도 해서 이곳저곳에서 말러 연주회가 꽤 많이 열리고 있는데, 교향악축제 때만 해도 말러 교향곡을 메인으로 올린 악단이 세 군데였을 정도다. 하지만 2번의 경우 실연에서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땡기는 공연이었다. 다만 '음악적인', 혹은 개인적인 성악곡의 관점에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고.
하나는 합창단을 주로 아마추어 시민 합창단으로 꾸렸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독일어 원어 가사를 전남대 철학과 교수인 김삼봉이 한국어로 번안한 것으로 부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합창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8번 만큼은 아니지만, 이 2번도 베이스 성역에는 꽤 무리가 있는 최저음이 초반부에 요구되고 전체적으로도 초반부에서는 매우 섬세한 표현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녹녹치는 않은 곡이다.
독일어 운율에 최적화될 수밖에 없는 독어 텍스트를 꽤 다른 구조의 타 언어로 번안하는 과정에서도 좋게 보면 의역, 나쁘게 보면 오역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라, 성악곡은 원어로 부르고 들어야 한다는 내 관점에서는 꽤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 연주회를 기회로 난생 처음 광주에 가볼 수 있다는 잇점도 무시할 수 없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항쟁의 30주년이라는 점도 물론 꽤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표를 예매해 놓고 지난 번 통영 때처럼 월요일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고속터미널로 가서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가기는 혼자 갔지만, 일단 공연만은 먼저 내려가 있겠다는 지인 분과 같이 보기로 했기 때문에 일단 유스퀘어(광천터미널)에서 만나 저녁을 먹은 뒤 공연장인 광주문화예술회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저녁은 꽤 거하게 이것저것 먹을 수 있었는데-차후 식충잡설 카테고리에 포스팅할 예정-, 다만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데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로 항쟁 전야제.
일단 금남로에서 버스를 기다려 봤지만, 문화전당(구 도청) 방향으로 향하는 길의 교통이 막혀 있는 상태라 대중교통 이용에 다소 애로사항이 꽃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고.
멀리서 취주악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느 학교 소속으로 여겨지는 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하며 앞장서고 있다. 비가 오는 데도 상관없이 연주하고 있었는데, 금관악기 연주자들은 행사 끝나고 악기 손질하느라 꽤 힘들었을 듯.
취주악단 뒤에는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행진하는 대열이 뒤따랐고, 이어 광주항쟁 당시의 상황을 일부 재현한 가두방송트럭과 손수레에 희생자의 시신-물론 수레 안에 누워있던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었음-을 싣고 도청앞으로 향하는 이들이 지나갔다.
그 뒤로도 풍물패와, 한참 전에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재현한 포졸과 죄수들의 행렬도 지나갔다. 하지만 이런 행렬을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는데, 버스도착예정 전광판도 별 쓸모가 없어진 탓에 결국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택시를 잡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서도 금남로의 시가 행진 때문에 다른 길도 교통 상황이 영 좋지 않아 제 시간에 도착할 지도 의문이었고.
하지만 다행히도 공연 15분 전쯤 광주문화예술회관 앞에 다다랐고, 예매 창구에서 티켓을 받은 뒤 화장실에서 물을 빼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무대에는 이미 400여 명의 합창단 단원들이 빼곡하게 대기하고 있었고, 1층 객석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어 관현악단 단원들과 악장이 차례대로 입장해 조율을 끝냈다.
현 파트의 경우 지휘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을 배치하는 고전적 배치법을 쓴 것이 눈에 띄었다. 다만 합창단 규모가 상당히 컸던 만큼 관현악단 배치도 다소 변칙적으로 했는데, 팀파니 두 세트를 제외한 타악기들은 무대 오른편에 몰려있었고 오르간은 홀에 파이프오르간이 없는 관계로 포지티브 오르간에 대형 앰프 겸 스피커 두 대를 달아 연주하도록 했다.
공연 시작 전 찍어본 '인증샷'. 왼쪽 것이 프로그램 노트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교향곡 2번 1악장 시작 부분. 실연으로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 스코어를 보며 듣기로 했다. 프로그램 노트는 무료로 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공들여 제작되었는데, 번역자인 김삼봉의 꽤 철학적인 기고문과 부천 필 바이올린 단원으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완주한 경험이 있는 최은규의 곡 해설, 연세대 국문학 박사인 장철환의 독어 원시와 한국어 번안판에 대한 간략한 분석,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인 유인권의 다소 감상적인 곡 감상평, 지휘자 구자범의 곡을 바라보는 비교적 '대중적인' 시각의 글까지 읽을 거리가 매우 풍부했다.
상임 지휘자인 구자범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복잡한 곡임에도 전곡의 악보를 외워서 지휘했는데, 그럼에도 큰 실수나 막히는 대목은 없었다. 다만 처음에 아주 거칠고 강렬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저음부 현악기들의 볼륨이 아쉬웠다. 콘트라베이스의 경우 여덟 명이라는 결코 적잖은 인원이 연주했음에도 생각보다 소리가 잘 빠지지 않았다. 회관의 음향 문제였을까?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몇 군데 상당히 두드러지게 배치한 속도 완급 조절 대목을 빼고는, 요즘 말러 연주의 대세처럼 대체로 빠르게 진행시키는 편이었다. 그리고 재현부 직전에 관현악이 한창 과격한 클라이맥스를 조성할 때는 악보에 없는 두 번의 루프트파우제(Luftpause. 짧게 숨돌리는 대목)를 주는 독특한 해석도 볼 수 있었다.
말러의 지시대로라면 1악장 끝나고 약 5~10분 간의 휴지가 주어져야 하는데, 요즘 공연에서는 그 정도로 오래 쉬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약 5분 가량 실제로 휴식하고 2악장 연주에 들어갔는데, 구자범이 1악장 끝난 뒤 지휘대에 걸터앉아 쉬는 상당히 털털한 모습을 보여주자 청중들이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독창자들이 들어와 착석했다.
(사실 이런 대곡을 연주할 때 악장 사이에 지휘자가 쉬는 경우는 드물기는 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말년의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가 NHK 교향악단과 말러 교향곡 7번을 연주했을 때도 1악장과 3악장이 끝나고 지휘대 앞에 마련해둔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 길고 격정적이었던 1악장 다음에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슈베르트 스타일의 서정적인 2악장과 오스트리아 민속 춤곡인 렌틀러 리듬의 투박함이 돋보이는 3악장이 큰 중단 없이 이어졌는데, 이 두 악장의 템포도 꽤 빠른 편이었다. 다만 그 빠르기가 시원시원하게 유지되지 않고 흐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던 것이 좀 아쉬웠고.
3악장이 끝나고 막바로 '원광(原光. Urlicht)' 이라고 제목이 붙은 4악장으로 이어졌는데, 알토 독창이 가곡 풍으로 부르는 이 대목에서부터 가사의 의역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됐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크게 원시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로 직역할 경우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장황해지거나 특정 종교의 메시지를 암시하는 부분은 과감히 들어내거나 더 단순한 표현으로 축약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곧바로 한바탕 쓸고 나가는 관현악 총주로 시작하는 가장 대규모의 5악장으로 이어졌는데, 말러가 여기서 요구한 무대 뒤 악단의 연주를 어떻게 해결했을까가 꽤 궁금했기에 이 대목들에 집중했다. 무대 뒤 악단 연주는 호른과 트럼펫의 경우 무대 쪽으로 난 내벽의 조명실 공간을 썼는데, 차단막으로 가려놨다고는 해도 무대와 청중석 모두에 가까운 탓에 멀리서 들리는 효과는 그다지 나지 않아 아쉬웠다.
대신 팀파니나 다른 타악기의 경우에는 무대 오른편 뒷쪽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멀리서 울리는 효과가 좀 더 나은 편이었다. 악장 후반에 등장하는 합창과 소프라노의 노래도 물론 4악장에서처럼 한국어 번안 가사로 불려졌는데, 말러가 합창 도입부에 요구한 피아니시시모(ppp)의 극도로 여린 음량과 음색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부터 이 연주회가 갖는 시대성과 상징성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는데, 프리드리히 클로프슈토크와 말러의 원시가 그렇듯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유감없이 강조했기 때문에 항쟁의 희생자들과,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후배, 후손들이 이어오고 있는 정신으로 대변되는 부활의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목표는 매우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음악적인 면으로만 따져보면 스케일과 음량 면에서는 꽤 강렬한 인상을 줬지만, 섬세한 셈여림이나 프레이징 처리 등은 다소 미흡하다는 인상도 물론 받았다. 사실 이 곡은 말러 교향곡들 중에서도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악명높기 때문에, 지방 악단이 이 정도 했으면 선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하지만 '지방 악단이니까...' 라는 핸디캡을 굳이 부여하지 않더라도 좀 더 정돈되고 정갈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가 됐으면 하는 바램은 당연한 것이었다.
최종적인 인상은 매우 좋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기회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이전까지는 안하던 개념없는 뻘짓을 추가로 해봤다. 공연이 끝나고 독창자들과 지휘자가 커튼콜을 받는 장면을 찍어봤는데, 은근히 앵콜을 기대했지만 워낙 대곡으로 관현악단이 혹사당한 탓인지 그냥 여러 차례의 커튼콜을 연이어 받은 뒤 끝났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항쟁의 본거지에서는 여전히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연주회였는데, 이 연주회에서 '부활' 이 강조되었다면 그 다음날 혼자 두 사적지를 돌아봤을 때는 오히려 현실의 부조리와 그 당시의 죽음과 고통이라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경험의 순서가 다소 거꾸로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 일정이나 다른 이야기들은 '그외잡설' 등의 항목에서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