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 찾느라 허비한 시간 때문에, 민주묘지는 생각보다 좀 늦게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의 서남쪽에 위치한 공원과 북동쪽에 위치한 묘지 사이의 거리도 꽤 되었기 때문에, 이동 시간도 물론 고려해야 했고.
정문인 민주의 문 앞.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식 행사가 끝난 뒤였다. 물론 텔레비전 등으로 행사를 볼 시간도 여건도 없었기 때문에,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가창의 허용 문제나 생뚱맞은 '방아타령' 주악, 여당 대표가 보내온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화환 같은 것으로 실랑이와 구설수가 빚어졌다는 것은 전혀 모르던 상태였다.
기념식 때 사용된 입간판이나 천막 등도 아직 치워지지 않거나 한창 치워지는 중이었다.
묘지 풍경. 맨 앞에 보이는 아랫단에는 항쟁 당시 사망한 이들의 묘소가, 중간과 그 윗단에는 항쟁 후 고문이나 구타, 총상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상이 사망자들의 묘소와 기타 사유로 유공자 혹은 민주화운동 기여자로 인정된 이들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항쟁 중 숨진 사망자들의 묘소 맨 오른편 공간은 항쟁 때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영령만 모셔져 있는 이들에 할애되어 있다.
물이 잘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기는 했지만, 계속 비가 오고 있어서 땅은 무척 질퍽거렸다. 어쨌든 묘소들은 가능한한 다 돌아봤는데, 가장 인상적인 묘소 두 곳은 특별히 사진으로 남겼다.
도청 앞을 비롯해 시내에서 살상 목적으로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었던 21일에 사망한 희생자들 중 아마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을 최미애의 묘소. 결혼한 지 얼마 안된 만삭의 몸으로 거리에 나왔다가 계엄군의 사격으로 인해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고, 뱃속의 태아도 엄마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항쟁이 끝난 뒤 김준태라는 시인이 쓴 장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에도 이름은 직접 나와있지 않지만, 특별히 에피소드가 언급될 정도로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학창 시절 나도 이 대목을 따서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었고.
27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항전에서 사망한 윤상원(본명은 윤개원)의 묘소. 항쟁 후반기에 시민군의 지도자로 등장해 유명한 인물인데, 당시 외신과 가진 인터뷰 영상도 남아 있다. 의외로 흥분이나 격앙된 감정 없이 아주 차분한 모습으로 회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
계엄군이 작성한 검시보고서에 의하면 사인이 화상과 자상으로 기록되었는데, 당시 검안을 담당한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가슴과 배의 총상이 진짜 사인이라고 하고 있다. 화상에 대해서는 당시 임종을 지켜본 동료들과 유족회 측에서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도청 내부에 쏜 최루탄의 폭발로 시신을 덮었던 천에 불이 붙으면서 유발된 것' 이라고 증언했고, 결국 화상은 사인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민주묘지의 안장자 검색 항목에 따르면 사인은 여전히 '자상' 으로만 기록되어 있고, 사망일도 23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윤상원은 자유공원 포스팅에도 언급된 '들불야학' 의 강사였고, 항쟁 이전인 1970년대 말 야학운동을 하다가 과로로 사망한 여교사 박기순도 역시 같은 야학에서 강사로 활동한 바 있다. 그 때문인지 항쟁 후 묘지를 조성할 때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이 열린 뒤 합장되었고, 이 의식에서 처음 불려진 것이 바로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 이었다.
이외에도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자발적인 헌혈 운동에 참가했다가 귀가하는 길에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여고생 박금희, 27일 도청과 함께 격렬한 저항을 보여줬던 YWCA에서 시민군 지도자로 싸우다가 사망한 윤상원의 동료 박용준 등 약 200여 명의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 중에는 신원 확인이 되지 않아 무명열사로 구묘역에 매장되었다가 민주묘지 조성 과정에서 DNA검사로 늦게나마 신원을 확인한 경우도 있었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유영봉안소와 추모관도 방문했다. 봉안소에는 세 명의 불교 신자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긴 독경을 하며 망자들의 혼을 달래고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가는 폐를 끼칠 것 같아 그냥 나왔다.
추모관에는 상설 전시되는 자료와 영상물 외에 각종 서적들이나 특별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어두운 조명을 쓰고 있어서 사진을 찍으려 해도 저질 폰카의 특성상 제대로 잡히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시간 여유가 좀 더 있었다면 구묘역이나 기타 시설물도 둘러봤겠지만, 이미 다른 일정들도 있었으므로 추모관 방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금남로 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