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자료의 저퀄 때문에 좌절하기는 했지만, 추가로 남아 있는 영상 자료는 어떨까 하고 보기로 했다. 물론 그 당시 한국의 클래식 연주회 생중계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공연장에서 방송국 스탭들이 녹화/녹음한 것을 사후 편집해서 틀어주는 녹화방송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꽤 어색한 짜깁기 기술이 돋보이는 안습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번에 본 영상물도 큰 차이는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나마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는 '역사적 기록물' 그 자체의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이것을 DVD 같은 포맷으로 만들어 팔 때의 손익분기점이 문제지만.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는 비디오 테이프. 손글씨로 곡목과 대략의 재생 시간이 기입되어 있다. '서주와 추상', '낙양',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무악' 네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세 번째 곡인 소나타의 경우 평균 전곡 연주 시간이 29~32분인데 비해 저기는 불과 10분 정도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고 기입되어 있다.
첫머리에 나오는 연주진 자막. 외국 연주자들의 일본어식 이름 표기와 KBS 로고의 독특함까지 더해져 확실히 옛날 자료임을 실감케 한다.
첫 수록곡인 '서주와 추상' 의 연주 모습. 하프가 사실상 독주악기로 활약하는 곡이라 그런지, 관현악단 앞에 설치하고 연주했다. 연주자는 우어줄라 홀리거.
연주 장면을 세세하게 찍어놓지는 못했지만, 주선율이 뚜렷하고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해진 곡이 아니라 그런지 카메라 워킹이 대단히 어설프다. 촬영 각도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연주 안하고 쉬고 있는 단원들이 잡히자 황급히 다른 카메라로 돌리는 식의 임기응변식 연출력도 물론 확인할 수 있고.
지휘자 프랜시스 트래비스 클로즈업. 미국 출신의 스위스 지휘자로, 윤이상이 유럽에서 처음 작곡한 작품들 중 하나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초연한 이래 수십 년 동안 윤이상 작품을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공연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두 번째 수록곡인 '낙양' 연주 장면. 실내악 작품 치고는 11명이 연주하는 대규모라, 지휘자가 합주를 통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 곡에서도 지휘는 트래비스가 맡았고, 연주자들은 앞에서 왼쪽부터 김남윤(바이올린)-정창용(플루트)-하인츠 홀리거(오보에)-김현곤(클라리넷)-최중원(바순)-나덕성(첼로)-우어줄라 홀리거(하프). 뒷쪽의 타악기 주자들은 어떤 인물 순서로 배치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맨 왼쪽의 비브라폰 뒤에 선 주자는 박동욱으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수록곡인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연주 장면. 왼쪽부터 김용윤(비올라)-하인츠 홀리거(오보에)-우어줄라 홀리거(하프). 지금은 지휘자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용윤의 연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한데, 위에 쓴 대로 중간에 참 성의없이 잘라내고 다음 수록곡으로 바로 이어지도록 발편집한 센스가 돋보인다.
사실 이것도 무턱대고 편집진들을 까기가 뭣한 것이, '요태까지 그래와고 지금도 개속' KBS는 여러 분야를 총괄하는 종합 공영방송이라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을 잡아먹어가면서까지 공연 녹화방송을 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프로그램에 주어진 1시간이라는 방송 시간을 지키기 위해 이 곡의 영상이 희생된 셈.
마지막 수록곡인 '무악' 연주 장면. 이 곡은 다행히 잘려나간 부분 없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당시 이 방송을 실시간으로 본 사람이라면, 약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을 위해 활동한 스파이라고 신나게 깠던 작곡가의 작품이 한국에서 방송된다는 것에 굉장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을 거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이 두 차례의 공연에서도 정부 차원에서의 '립 서비스' 식 리바이벌이라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고, 이후 6월 항쟁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부활할 때까지 윤이상 작품의 한국 공연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적은 횟수를 기록할 뿐이었다.
정황을 봤을 때 KBS가 당시 두 차례의 공연을 모두 녹화해 뒀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방송을 위해 편집한 이 녹화본의 화질이나 음질도 딱히 좋은 편은 아니라서 원본 테이프의 보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지인이 이 때의 공연 실황을 KBS미디어 측에 DVD 복사본으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는데, 미디어 측에서는 원칙적으로 녹화본만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것도 방송된 날짜가 언제인지를 알아야 자료를 찾을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된 비디오 자료에도 저 공연의 녹화본이 언제 방송되었는지, 그리고 제작 스탭은 누구인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아무튼 당시 열악했던 공연 중계와 녹음, 녹화의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럭저럭 흥미로운 자료임은 분명하다.
이외에도 국립예술자료원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 등지에서 행해진 공연들의 마스터 테이프로 만든 수많은 CD와 비디오 테이프들이 소장되어 있지만, 절대 다수가 관외대출 불가라 결국은 나처럼 회원가입하고 발품을 팔아야 들어볼 수 있다. 물론 굳이 '이건 꼭 들어야돼!' 라고까지 추천쌔울 정도로 상태가 양호한 것은 없어 보이지만. lll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