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대전 이전까지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한 이들은 대부분 귀족 자제 아니면 대부호의 아들 정도는 되었다고 고노에편에서 쓴 바 있는데, 기시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오사카에서 직물 도매업을 하면서 간사이 지방의 대부호로 성장한 집안 출신이라 '있는 자들' 에 속했다.
기시 역시 고노에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고, 1927년에 집안의 재정 지원과 고베 소재 일본 롤렉스 지점장의 보증으로 스위스 주네브 음악원에 입학했을 때도 바이올린 전공을 택했다. 졸업 후인 1929년에는 다시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서 칼 플레슈 문하로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이 독일 유학 시기부터 바이올린 외에 작곡이나 지휘, 영화음악 이론, 심지어 연극 이론까지 관심사를 넓혔다.
비록 유력 정치인이나 귀족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기시는 유학 중 바이올린 명기로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입수해 연주하고 있을 정도로 재정 형편이 좋았다. 그리고 도쿄에는 좀 뒤진다고 해도 나름대로 근대적인 도시였던 오사카에서 주로 자랐기 때문에, 서구 문물에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막 시작한 작곡 분야에서도 이러한 서구 취향이 잘 드러나는데, 오히려 일본 음악의 요소는 부차적이다 싶을 정도다. 궁내성 악부에서 재직하던 동생을 통해 궁중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고노에에 비하면 일본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자신의 지휘로 발표한 작품들에 대한 비평에서도 확인된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에 아직 스물 다섯도 안되었던 기시는 베를린에 계속 머물고 있었는데, 예전부터 계속 작곡과 지휘를 집중적으로 배우면서 문화영화 제작도 병행하는등 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영화가 특색있는 일본 작품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라디오와 영화를 선전 매체로 적극 활용하려고 하던 나치 선전성 등의 관심도 끌게 되었고, 심지어 요제프 괴벨스 같은 나치 최고위 관료들이 임석하는 연회에도 초대받을 정도였다.
기시는 이렇게 형성된 인맥을 자신의 재력과 함께 교묘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단순한 학술 단체에서 독일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총괄하는 관변 단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독일-일본 협회(약칭 일독회)와도 중요한 연줄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또다른 목표인 지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으로 기시가 지휘 무대에 선 것은 1934년 3월 29일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연주회였는데, '일본의 밤' 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일독회 주최의 특별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서 기시는 독일 최대의 영화사였던 우파(UFA) 소속의 교향악단을 지휘해 자작의 관현악 작품인 '일본 모음곡' 중 몇 곡과 가곡들을 선보였고, 가곡에서는 폴란드 출신의 소프라노 마리아 바스카가 협연했다. 바스카는 1933년 12월 1일에 '가곡의 밤' 연주회에서 기시의 가곡들을 불러 호평을 받은 성악가로, 이후에도 기시와 친교를 유지했다.
우파 교향악단과 가진 첫 지휘 무대 이후, 기시는 꽤 자신감을 얻었는지 베를린 필을 자신이 직접 지휘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잡고 관계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미 고노에 히데마로가 첫 일본 지휘자로 지휘했다고는 하지만, 주로 서양 작품을 지휘했던 선배와 달리 자신은 자작곡 위주로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포부도 갖고 있었다.
반 년 이상의 교섭 끝에 기시는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1934년 11월 18일에 베를린 필의 공연 무대에 선 것이었는데, 다만 정기 연주회는 아니었고 일독회 주최로 열린 '일요일 음악회' 라는 특별 공연이었다. 운좋게 이 공연은 제국 방송을 통해 독일 전역에 방송되었고, 공연 후 여러 언론들에도 평이 실렸다. 대부분 악평이었지만.
공연 곡목은 글루크의 오페라 '알체스테' 서곡과 기시의 자작곡들인 교향곡 '불타의 생애', 관현악 반주 가곡 여섯 곡,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역시 기시의 자작곡인 관현악 모음곡 '일본 스케치',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이었다. 가곡들에서는 우파 교향악단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바스카가 독창을 맡았다.
이 무대에서 처음 선보여진 기시 작품에 대한 비평이 특히 좋지 않았는데, 비록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에 대해 호평한 평문도 있기는 했지만 그 동양색도 서양 음악 어법의 작품에 맛내기 용으로 쓴 양념 그 이상도 아니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날선 비평들에 기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 같았고, 공연 후에도 재차 베를린 필을 지휘하기 위해 교섭을 재개하려는 시도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대신 1935년 1월 25일에 역시 일독회 주최로 열린 베를린 방송 관현악단의 방송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 공연 이후 기시는 4월에 귀국하기로 일정을 잡았는데, 그 전에 우선 베를린 필을 지휘해 녹음을 취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교섭 결과, 3월 27일부터 4월 1일까지 6일 동안 베를린의 베토벤잘-고노에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했던 공연장이기도 하다-에서 독일 음반사인 텔레푼켄에 가곡 열세 곡과 '일본 스케치' 전곡, '일본 모음곡' 중 도톤보리와 꽃놀이 두 곡을 녹음한다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제시된 녹음 곡목들은 모두 녹음되기는 했지만, 세션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시의 귀국 일정이 예상 외로 빨리 앞당겨졌고, 그 때문에 녹음 일정은 27일부터 28일까지 이틀로 확 줄어버렸다.
녹음 스탭들이나 가곡 독창자였던 바스카, 지휘자, 관현악단 모두 매우 빠듯한 일정 속에 행한 녹음이었는데, 기시는 이 세션이 끝난 뒤인 29일에 곧바로 비행기 편으로 이탈리아로 이동해 나폴리에서 여객선 편으로 일본에 돌아갔다. 귀국 후 계약에 따라 악단 사례비와 녹음 비용으로 책정된 1500라이히스마르크가 기시의 계좌에서 독일로 송금되었고, 녹음 원판들은 1935년 4월에 기시의 집으로 발송되었다.
원판들은 대부분 텔레푼켄 일본 지사였던 킹 레코드를 통해 일본 내수용 음반으로 제작되었고, 독일에서 발매된 것은 '일본 모음곡' 중 도톤보리와 '일본 스케치' 중 시장 두 곡에 불과했다. 그리고 모음곡 중의 꽃놀이와 스케치 중의 마츠리(축제) 두 곡은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발매되지 않은 채였는데, 1990년대 초반에야 CD로 복각되면서 처음 음반화 되었다.
귀국 후 기시는 약관 20대의 나이로 베를린 필을 비롯한 독일 악단들을 지휘했다는 경력 때문에 가장 각광받는 차세대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유명해졌다. 기시 자신도 이러한 경력에 다소 뻥카를 섞어가면서 자기 홍보에 열을 올렸는데, 심지어 도쿄 아사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베를린 필을 세 번 지휘했다고 이빨을 까기도 했다. 우파 교향악단과 베를린 방송 관현악단 연주회까지 합쳐서 세 번을 다 베를린 필로 계산했을 리는 없겠고, 그냥 구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시는 곧 신교향악단의 주요 객원 지휘자로 자주 출연하기 시작했고, 4월 중순에는 일본을 처음 찾아온 독일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와 세 차례 협연 무대를 갖기도 했다. 당시 창립자였던 고노에와 갈라선 신교향악단은 새로운 상임 지휘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기시도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예상치 못한 기시의 복막염 발병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병세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세 차례의 수술이 행해졌지만 증세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일단 1936년 말에 퇴원한 뒤 오사카 자택에서 요양을 하며 건강 회복을 꾀했지만, 결국 1937년 11월 17일에 심장마비로 인해 타계하고 말았다. 사망 당시 나이는 불과 스물 여덟이었다.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인지, 일본에서 기시는 '비운의 천재' 로 여겨지고 있다. 두 번째로 베를린 필을 지휘하고 녹음까지 했던 만큼, 기시에게 건 일본 음악계의 기대도 꽤 컸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기시가 병마를 극복하고 장수했다면 과연 그에 대한 아쉬움 속의 긍정적인 평가가 여전히 지속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기시가 죽던 해인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그 전부터 군부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일본 사회도 극우 편향으로 치달으면서 결국 도쿄 대공습과 원자폭탄 두 방으로 떡실신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음악계도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는데, 기시보다 훨씬 긴 삶을 영위했던 고노에 히데마로와 야마다 고사쿠도 각각 독일과 일본에서 나치즘과 군국주의에 유린된 음악계를 대표하며 음악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다가 전후 큰 비판을 받았다. 기시가 다시 음악계에 복귀했더라도, 다시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이들 선배와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를 음악으로 치장하는데 이용되었을 공산이 크다.
요절한 기시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나라가 전쟁 속으로 빠져들면서 동시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기시의 작품이 다시 본격적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가서였고, 1991년에는 일본 빅터에서 기시와 베를린 필이 녹음한 관현악 작품 전곡을 복각한 CD를 발매했다(이 CD는 2009년에 나머지 가곡들까지 포함한 완전한 형태의 두 장짜리 셋트로 재발매되었다).
고노에와 기시 다음으로 베를린 필 무대에 선 일본 지휘자는 일본 양악계의 선구자로 유명한 야마다 고사쿠였는데, 다음 3부에 자세하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