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I. 야마다 고사쿠 (山田耕筰, 1886-1965)
야마다 고사쿠는 지금도 일본 양악계의 선구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하멜의 바이올린' 같은 만화에까지 언급될 정도일까. 하지만 군국주의가 판을 치던 1930~40년대에 보여준 면모 때문에 일본의 진보개혁 성향 음악인들이나 과거 식민지 신세를 겪었던 나라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야마다의 아버지는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였는데, 아들인 야마다도 이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개신교 찬송가를 비롯한 종교음악으로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거기에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에드워드 건틀렛과 의형 관계를 맺고 영어와 서양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인 활동을 모색했던 것 같다.
야마다가 처음부터 작곡가가 되는 것에 뜻을 두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설령 그랬다고 해도 일본 내에서는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일본에서 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공인된 서양음악 교육 기관은 도쿄음악학교 한 곳밖에 없었고, 그나마 성악부나 기악부 같은 전공실기 위주의 학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야마다는 성악부 입학을 택했고, 졸업 후 잠시 성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곡을 제대로 배우려면 유학이 필수였는데, 야마다 집안은 고노에처럼 유력 귀족 집안도 아니었고 기시처럼 떼돈을 번 부호도 아니었다. 결국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학비를 지원해 주어야 했는데, 음악학교 재학 중 알게 된 아마추어 첼리스트이자 열렬한 클래식 애호가였던 이와사키 고야타가 그 역할을 자임했다. 이와사키는 당시 미츠비시 재벌 총수였기 때문에, 야마다의 유학비를 대는 것은 그다지 큰 부담이 아니었다고 한다.
1910년에 독일의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작곡 전공으로 입학한 야마다는 1913년 졸업할 때까지 서곡 D장조나 교향곡 F장조 '승리와 평화'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을 창작했는데, 이들 곡은 비록 과제 제출용으로 쓰여졌고 거의 전적으로 서양 고전~초기 낭만파 어법에 의존한 습작 성격이 강했지만 일본 작곡가가 창작한 최초의 관현악곡이자 교향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졸업 후 귀국한 야마다는 1915년에 '도쿄 필하모니회' 라는 이름으로 일본 최초의 상설 관현악 전문 연주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의 창단과 운영에도 이와사키의 자금이 큰 몫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사키는 불과 1년도 안되어 야마다와 맺었던 관계를 모두 청산해 버렸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야마다가 불륜 사실을 들켜 이혼한 사건이 주요 원인이었다.
결국 공중에 떠버린 재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야마다는 이듬해인 1916년에 악단을 해산해야 했고, 다소 도피성으로 미국행을 택해 잠시 외유해야 했다. 귀국한 후에는 오페라 상연 등에 잠시 몸담았다가 다시금 관현악단 창단을 계획했는데, 여전히 재정 형편이 문제가 되었던 터라 계획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924년에 과거 야마다의 제자였고, 베를린에서 유학 후 귀국한 고노에 히데마로가 귀국하면서 야마다에게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풍족한 재산과 가문의 유명세를 모두 거머쥐고 있던 고노에의 도움 덕에, 야마다는 1925년에 적백내전으로 중국 둥베이 지방에 피신해 있던 러시아인 음악가들이 조직한 관현악단을 일본에 초빙할 수 있었다. 이 악단에 일본인 연주가들을 합쳐 대규모 임시 악단을 만들었고, 관현악 연주나 청취 경험이 일천했던 일본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그야말로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관심을 모은 뒤, 고노에와 야마다는 이 때 연주했던 일본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일본 교향악 협회' 라는 이름의 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악단의 운영과 지휘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맡은 쌍두 체제였는데, 다만 이 악단도 도쿄 필하모니회와 마찬가지로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노에 파벌에 속해 있던 악단 매니저인 하라 젠이치로가 악단 예산의 일부를 몰래 자기 몫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의혹이었는데, 더불어 야마다가 자신과 악단 사이의 수익 분배 문제를 굉장히 비상식적으로 처리했던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불거져 나왔다.
스승과 제자의 단두대 매치였던 이 반목에서 결국 제자였던 고노에가 승리했고, 고노에를 따르는 단원들은 모두 퇴단해 '신교향악단' 이라는 이름으로 별개의 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야마다를 따르는 단원은 겨우 네 명에 불과했고, 결국 야마다는 한 동안 관현악 지휘 쪽에는 발붙이지 못하고 교육과 작곡 활동에만 전념해야 했다. 야마다와 고노에는 비록 1931년에 화해했지만, 악단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고노에 역시 회계 부정 의혹이나 독선적인 면모가 문제가 되어 1935년에 악단 측으로부터 역관광을 당하며 GG치고 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뻘쭘한 상태가 되었던 야마다는 고노에가 훗날 그랬던 것처럼 해외 활동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는데, 1931년과 1933년에는 각각 프랑스와 소련을 방문해 자작곡 발표를 겸한 지휘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일본에서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렸는지, 소련에서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최초로 지휘한 일본인 지휘자라는 기록을 남겼고 프랑스에서는 1936년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1930년대 중반 무렵부터 다시 관현악 지휘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는데, 고노에가 퇴출된 해였던 1935년에는 신교향악단을 지휘해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 전곡을 일본 컬럼비아에 녹음하기도 했다. 일본인 지휘자와 관현악단이 연주해 녹음한 해당 작품의 최초 음원이기도 했고, 지금도 CD로 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1937년 여름에는 유학 후 두 번째로 독일을 방문했는데, 야마다는 같은 해 2월에 개봉한 독일-일본 합작 영화인 '새로운 땅(新しき土)' 의 영화음악 작곡을 맡은 바 있어서 영화 홍보 차원에서 행한 방독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두 달 남짓 뒤인 3월 말에 '사무라이의 딸(Die Tochter des Samurai)'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는데, 독일 산악영화의 거장으로 유명했던 아르놀트 팡크가 감독을 맡았고, 훗날 '고질라' 를 비롯한 특촬 영화의 특수효과 담당으로 유명해진 츠부라야 에이지도 같은 역할로 스탭 롤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저 영화가 일독 합작 영화라는 의의만 있는 것은 아닌데, 영화의 일본인 주인공 커플들이 마지막에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고향 대신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떠나는 곳이 공교롭게도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독일의 파시즘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그럴 듯한 러브 스토리와 오리엔탈리즘, (당시로서는) 최신의 촬영 기법으로 윤색한 선전영화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었다.
실제로 일본과 독일 양국에서 저 영화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야마다가 작곡한 영화음악도 일본 현대음악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동시에 야마다에 대한 독일 측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독일의 제국방송에서도 일본과 방송 교류를 할 때 야마다가 지휘한 신교향악단의 공연 실황을 단파 방송으로 받아 중계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야마다와 베를린 필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도 이 해에 이루어졌다. 다만 이 만남도 3년 전에 기시 고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 필의 정기 연주회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6월 22일에 관변 단체였던 독일-일본 협회의 주최로 열린 특별 음악회였는데, 기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베를린 필 지휘 때와 마찬가지로 이 음악회도 제국방송을 통해 독일 전역에 중계되었다.
다만 중계에 그치고 실황녹음 자료는 없었던 기시 때와 달리, 이 때는 적어도 한 곡이 녹음되어 현존하고 있다. 메이지 덴노 치세기를 묘사한 야마다 자신의 자작곡인 교향곡 '메이지 송가' 인데, 고노에와 기시의 경우와 달리 이 날 프로그램 자료는 아직 찾아보지 못해 다른 연주곡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베를린 필의 열람 가능한 연주 기록과 공연 비평들을 집대성한 페터 무크 편집의 베를린 필 창단 100주년 연감에는 지휘자 이름을 야마다 고사쿠가 아닌 야마다 가즈오라고 오기하고 있어서 더더욱 안습.
스튜디오 녹음인 고노에와 기시의 음원들과 달리, 야마다와 베를린 필의 녹음은 음질이 상대적으로 더 안좋은 편이다. 레코드 발매를 염두에 둔 녹음이 아닌 방송용 녹음이었고, 그 마저도 아직 테이프 레코더가 음악 녹음용으로 상용화되지 않아 잡음 많은 아세테이트반에 다이렉트 커팅한 음원이기 때문인 듯. 전반적으로 소리가 뒤로 물러앉은 인상이 강하고, 타악기는 유달리 크게 녹음되어 전체적인 음향 균형도 맞지 않고 있다.
방송 녹음의 주체가 독일 제국방송인지, 아니면 제국방송의 실황 중계를 받아 단파로 방송한 일본 방송협회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녹음된 원판이 처음으로 음반화된 것도 2차대전 종전 후 5년 가까이 지난 1950년에 가서였는데, 일본 컬럼비아가 제작한 SP로 첫 선을 보였다. 음질이 꽤나 개판인 녹음이기는 하지만, 야마다와 베를린 필의 유일한 기록물인 탓인지 최초 발매 후에도 LP나 CD로 여러 차례 재판되어 발매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롬 뮤직 파운데이션의 '일본 SP명반 복각선집' 2집 중 세 번째 장인 '일본인 음악가들의 해외 녹음' 의 복각본인데, 잡음을 가능한한 제거하지 않았다는 복각 엔지니어의 말을 감안하더라도 흐리멍텅한 소리를 받아들이기 힘들 이들이 많을 듯.
귀국 후 야마다는 여전히 일본 양악계의 대부 역할을 수행했지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발발 이후 계속 막장 일로를 달리던 일본의 정세는 음악계라고 가만히 내버려두고 지나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음악계를 전시 체제로 개편하기 위해 모든 음악 관련 단체를 국가가 감독하는 관제 단체로 바꿔놓기 시작했고, 야마다도 여기에 호응해 '일본 연주가 협회' 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미 예전부터 만주국의 국가를 작곡하는 등 정부의 문화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야마다였지만, 1940년대 이후 패전 직전까지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홍보 대사 그 자체였다. 1940년의 '기원 2600주년' 을 기념하는 봉축 대연주회에서는 이베르의 '축전 서곡' 을 지휘했고, 1942년에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 시리즈에 일본 음악가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해 새로운 국가를 발표하고 건국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 시기 만주국에서 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모리시게 히사야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국 국가 발표 후 베풀어진 축하연에 참가한 야마다에게 '건국 기념으로 새로 작곡된 노래이기는 하지만 그리 감흥이 오지 않았다' 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야마다는 모리시게의 말에 화를 내며 연회장을 빠져나왔고, 모리시게가 호텔로 찾아가 사과하자 그제서야 화를 풀고 조니워커 블랙라벨 한 병을 선물로 줬다고 하고 있다.
전시 경제 체제 하에서 적국인 영국의 위스키를 선물로 선뜻 건네줄 정도였다고 하니, 야마다가 당시 누리고 있던 부와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에피소드다.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야마다도 전의를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전쟁가요를 여러 편 작곡했고, 일본 음악문화 협회와 일본 국민음악 정신대의 회장 자격으로 점령지를 돌며 군국주의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결국 이러한 활동은, 패전 후 야마다에게 '전범' 또는 '전쟁 부역자' 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데 딱 좋은 증거로 작용하고 말았다. 물론 일각에서는 야마다의 전시 행동을 비난한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에 협력한 비평문을 써냈다고 '그 놈이 그 놈이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야마다나 평론가들이나 전시 활동에 대해 제대로 사죄한 적은 없었다고 하니 두 쪽 다 신나게 까주면 되겠지?
비평가들의 논쟁이 한창 격화되어 있을 무렵이었던 1948년, 야마다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건강 악화까지 겹친 바람에 전후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양악 선구자라는 업적을 후배들이 대우해 줬는지 문화 훈장이나 방송 문화상 등을 수상하고 일본 지휘자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자작곡이나 오페라 공연과 녹음 때도, 실제 지휘는 후배들이 맡았지만 자신은 일종의 '총감독' 혹은 '총지휘' 라는 명예 직책으로 특별 지휘대에서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사후 45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야마다 고사쿠라는 이름이 일본 양악계에서 갖는 권위는 아직 확고부동한 것 같다. 일본을 방문하는 성악가들이나 연주가들은 야마다의 가곡을 한두 곡 씩 프로그램에 넣어 연주하고 있으며, 악보가 남아 있는 야마다 작품들의 전집 악보가 출간되는가 하면 낙소스를 통해 두 장의 관현악곡 모음집이 출시되어 있다.
다만 전쟁 시기 일본에서 활동한 많은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시 하에 행했던 분명한 군국주의 협력과 미화 활동에 대한 비판 여론은 상대적으로 묻혀있는 것인지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는 것인지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 베를린 필을 지휘한 세 번째 일본인 지휘자라는 기록 또한, 고노에나 기시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음악적 역량으로 인정받았다기 보다는 정세에 편승해 따낸 기록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도 하고.
스튜디오 녹음이던 방송녹음이건 음원을 남겨놓은 세 지휘자들 외에도, 2차대전 종전 직전까지 베를린 필을 지휘한 '일본인' 지휘자들은 두 명 더 있다. 묶어서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