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직후부터 큰 관심을 갖고 있던 해외의 음악 현상 중 하나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 였다. 유소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라고만 설명한다면 '그거 어느 나라에나 다 하나 씩은 있는 거 아님?' 이라고 할 것 같지만, 저 프로그램의 최대 수혜자들이 빈곤층 청소년들이고 교육에 대한 비용과 악기 등의 지원이 모두 무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포인트였고.
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종종 보이고 있는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2004년의 '연주와 투쟁(Tocar y Luchar)' 이었지만 아직 국내 개봉 계획이 잡혀있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2008년에는 독일의 해외 대상 방송국인 도이체 벨레(Deutsche Welle)에서 '음악의 약속(A Promise of Music)' 이 제작되었는데, 이 다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DVD로 발매되었고,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다.
'엘 시스테마' 는 가장 최근인 2009년에 유로아츠에서 제작된 다큐인데, 유로아츠 영상물의 대부분을 제작하고 있는 파울 슈마츠니가 마리아 슈토트마이어와 공동으로 메가폰으로 잡아 만들었다. 아직 보지 못한 '연주와 투쟁' 이 있어서 이 다큐멘터리의 방향성이 다른 작품과 유사한지는 파악하지 못했는데, 2008년 본 베토벤 음악제에 참가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을 중심으로 제작된 '음악의 약속' 보다는 엘 시스테마 그 자체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이 다큐는 사실 2010년 8월 한국에 정식 개봉하기 전에도 상영된 바 있었는데, EBS의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EBS 채널을 통해 약 1시간 가량으로 축약 편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내가 처음 본 것이 EBS에서 방영한 축약본이었는데, 이번에는 생략된 부분 없이 약 1시간 40분 가량의 완전판을 처음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1년에 두 번만 영화관 가도 정말 많이 간다고 생각될 정도로 영화관 출입이 지지리 뜸한 편인데, 올해는 광복절이었던 8월 15일에 이 다큐를 보기 위해 처음 방문했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CGV 강변을 택했는데, 관람 비용이 부쩍 뛰어버린 것에 놀랐고 영화관 옆 오락실에 '큰북의 달인' 이 있는 것에 또 놀랐다. 결국 영화 끝나고 '모종의 사건' 때문에 미친듯이 쳐댔고.
영화는 엘 시스테마의 운영 위원들이나 참가하는 청소년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비교적 담담하게 진행되었는데, 그 때문에 클래식음악이나 음악교육에 문외한인 이들은 다소 지루함을 느꼈을 법했다. 게다가 축약본이나마 이 다큐를 이미 봤던 나로서도 봤던 것보다 못봤던 것을 중심으로 집중했기 때문에, 설렁설렁 보고 넘어간 대목도 있었고.
하지만 축약본에서 잘려나간 부분은 의외로 매우 중요한 대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악기를 잡기 전 종이로 만든 모형 악기로 관현악의 연주 기초를 배우는 첫 과정은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었고, 참가하는 청소년들의 빈곤하고 위험한 가정 환경에 대한 묘사도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첫 관현악 리허설에 참가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여학생도 등장한다.
생각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뜬' 구스타보 두다멜 같은 음악인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는데, 몇몇 인터뷰와 공연 실황 동영상을 빼면 크게 두드러지는 대목도 없다. 오히려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태동했고, 지금까지 운영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었으며, 또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와 계획들이 차근차근 설명되는 부분이 중요하다. 다른 나라보다 국민 소득도 낮고, 범죄율도 높은 나라에서 이 정도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축약본에서 '이걸 왜 짤랐나' 싶은 대목은 장애인에 대한 음악 교육을 다룬 대목이었다. 일단 귀는 들리는 자폐증 등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청소년이나 시각 장애인은 그렇다 쳐도, 소리 자체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까지 음악 교육으로 보듬는 모습이 시쳇말로 '충공깽' 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노래를 시킬 수는 없지만, 대신 수화로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 비춰진다. 이것이 '화이트 핸즈 코러스(White Hands Chorus)' 인데, 엘 시스테마 홈페이지에도 음악 단체로 당당히 소개되어 있다.
엘 시스테마가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왔다. 교육비의 90% 가량은 국비 지원이고, 나머지는 사기업이나 국제 기구 등을 통해서도 충당되기 때문에 재정 문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창립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와 기타 운영진들의 설명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가 '유능한 음악인 양성' 은 아니지만, 실력 있는 청소년들의 경우 프로 음악인으로도 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라서 서로 경쟁하는 대목도 언급된다. 특히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입단에 대한 열망이 매우 크다고 하는데, 도이체 그라모폰 등에서 출시되고 있는 음반이나 영상물을 봐도 청소년 악단 치고는 꽤 출중한 연주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다만 이 대목은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는데, 일단 엘 시스테마의 궁극적인 목표가 유소년과 청소년들을 마약이나 범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음악을 통한 인성과 감성의 올바른 함양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끝맺는다.
음악 교육, 특히 클래식 음악 교육은 몇몇 '있는 자들' 에 한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받을 수 있다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나도 그랬고,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열심히 음악을 배웠냐고 한다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음악을 즐긴다기 보다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입시 위주로 공부한 탓에 가끔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건가' 라는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고.
물론 베네수엘라의 시스템을 한국에 그대로 도입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느냐는 것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청소년 음악 교육은 빈부격차를 떠나서, 그리고 입시 위주의 약육강식 체제를 떠나서야 제대로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다큐에 등장한 베네수엘라 학생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고, 학교 끝나고 나서는 다시 엘 시스테마의 음악 수업을 받지만 특별히 일과가 힘들고 지루하다는 인상은 전혀 풍기지 않고 있다. 특별히 음악인이 되느냐에 구애받지 않고, 길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범죄보다는 음악을 더 즐길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탐구는 커녕 즐길 준비도 안된 어린이들을 마구잡이로 학원에 넣고, 발표회에서 몇 등을 하느냐에 관심이 쏠려 있고, 어느 학교나 악단에 들어가느냐에 희비가 엇갈리는 식의 풍토가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한, 몇 명의 스타는 존재할 지 몰라도 그 나라의 음악 역량은 전체적으로 살벌하고 기계적인 살풍경만을 보여줄 것이다. 한국이 지금 이러는 것처럼. 이 다큐는 아니었지만, '음악의 약속' 에서 두다멜은 이렇게 말한다. "베네수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나라에서는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큐임을 감안해도 약간 건조하게 흘러간 전체 분위기가 아쉽기도 하고, 그리고 엘 시스테마 교육 중 청소년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 교육과 관현악단 활동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도 아쉽다. 독일인이 만든 다큐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편견일지?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던, 학교나 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건 간에 음악교육이 아이들과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다큐를 한 번은 꼭 볼 것을 권한다. 엘 시스테마가 뜻이요 진리요 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음악을 아이들이 즐기게끔 하는 데 어떤 방법이 필요한 지를 조금은 깨닫게 될 것이다.
뱀다리: 관람했던 CGV 강변의 4관에는 관람객이 절반에 약간 못미칠 정도로 적은 편이었는데, 사람이 적고 많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 내내 재미가 없다며 내 좌석을 툭툭 발로 차대고 도리질을 쳐댄 초딩들의 역습에 집중력은 계속 떨어졌고, 집중력 보다는 인내력 함양에 도움이 되었다 싶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애들을 데려온 가족들의 통제력도 거의 전무했는데, 스탭롤이 다 끝날 때까지는 좌석에 앉아있는 것이 고유의 습성인 지라 끝났다 싶을 때 재빨리 빠져나가는 만행 유발자들을 징벌할(?)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축약판으로 미리 보고 온 탓에 집중력이 떨어진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처음 본 작품보다는 훨씬 덜했지만, 보는 내내 불쾌감에 시달린 것은 당연했고.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큰북의 달인' 에 왕창 풀어버렸다. DDR이나 펌프, 퍼커션 프릭스, 드럼매니아 같은 리듬 게임은 몇 차례 해봤지만, 일본 전통 북인 와다이코를 소재로 한 이 리듬 게임을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급 쪽에서 깔짝댄 탓에 별로 어렵지는 않았는데, 다만 북면을 연타해야 하는 대목에서는 아직 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팔힘으로 냅다 두들기느라 팔이 땡기고 온몸이 땀으로 젖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타점 인식률은 퍼커션 프릭스 같은 리듬 게임보다는 훨씬 좋은 편이어서, 웬만하면 치는 대로 다 들어왔다. 이 콘솔을 보유한 게임 센터가 서울에 얼마나 더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안보더라도 가끔 땡기면 와서 두들기고 싶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