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타카는 일본의 신진 작곡가들에게 수여하는 '오타카상' 으로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인데,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일본 음악계에서 한층 기대를 모으고 있었지만 40도 못채우고 죽은 탓에 기시 고이치와 비슷한 '요절한 천재' 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도쿄 태생인 오타카는 할아버지가 실업가, 아버지는 은행가라는 상당히 듬직한 재력을 소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린 시절 취미로 즐기던 음악을 본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직후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 오스트리아로 가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는데, 빈에서 작곡과 지휘, 피아노, 관현악법 등을 배웠다. 물론 그 사이인 1932년에 무사시노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강사로 일하며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지만, 대부분의 음악 수업은 빈에서 이루어졌다.
지휘 스승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였는데, 중일전쟁 개전부터 2차대전 패전 때까지 거의 마지막으로 일본을 방문한 유럽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37년에 내일한 바인가르트너는 신교향악단을 지휘한 뒤, 일본 악단이 아직 미성숙한 단계라고 가차없는 쓴소리를 해서 일본 양악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채찍질 다음에는 재능있는 청년 음악가들이 오스트리아로 유학하면 후원해 주겠다는 당근이 뒤따랐고.
오타카도 바인가르트너의 후원을 받은 이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지휘를 가르쳐준 것 외에도 일본 작곡가들을 위한 작곡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작곡상에서 당선된 작품이 오타카의 '일본 모음곡' 이었는데, 1936년에 빈 음악원에 제출한 피아노 모음곡 '아이의 하루' 를 관현악 편곡해 개작한 곡이었다.
이 모음곡은 1938년 11월 8일에 부다페스트에서 오타카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작곡상 당선 기념으로 1939년 12월 2일에 개최된 빈 교향악단의 특별 연주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오타카 자신이 지휘해 재연했다. 빈 교향악단과 공연한 지 8일 뒤인 12월 10일에는 베를린 필을 지휘했는데, 일본 지휘자가 베를린 필 무대에 선 네 번째 사례가 되었다.
다만 이 공연 역시 기시나 야마다의 베를린 필 지휘 사례처럼 악단이 아닌 일독회의 주최로 열린 일요일 특별 음악회였다. 공연의 취지는 주로 일본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을 소개한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시와 베를린 필 공연 때보다도 더 많고 다양한 일본 작품들이 연주되었다.
1부에서는 히라오 기시오의 '고대 찬가' 와 오타카의 일본 모음곡, 바흐의 오르간 독주곡인 파사칼리아 C단조를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관현악 편곡한 것이 공연되었고, 2부에서는 고노에 히데마로 편곡의 '에텐라쿠' 또는 시바 스케히로 편곡의 '영상(가가쿠의 편곡)' 과 오타카의 교향시 '아시야의 소녀' 가 공연되었다. (고노에 편곡의 '에텐라쿠' 와 시바 편곡의 '영상' 은 둘 다 가가쿠의 편곡 작품이고 각각 a) 와 b) 라는 주석이 붙어 있어서, 공연에서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 연주했을 듯 싶다.)
다만 기시나 야마다의 공연 때와 달리 이 공연이 중계방송 되었다는 기록은 없고, 따로 녹음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오타카의 베를린 필 지휘 기록은 공연 프로그램 등 지면 상의 기록 뿐이고, 이 공연이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공연 직후 오타카는 일본으로 귀국했고,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재차 독일행을 계획한 것으로 여겨진다. 베를린 필 지휘 때 알게 된 일독회 베를린 본부 총무와 1940년에 주고 받은 편지들이 독일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듬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과 유럽을 잇는 여객선 운항이 중단되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해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오타카는 1941년부터 신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일본에서 지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해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반유대주의 기류가 일본까지 휩쓸자 요제프 로젠슈토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활동 제한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타로 나선 것이 오타카와 야마다 가즈오 두 지휘자였다.
공식 직책은 상임의 아랫 단계였던 전임 지휘자였지만, 로젠슈토크가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정기 연주회의 대부분을 이 두 지휘자가 지휘했기 때문에 사실상 상임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여담으로 오타카와 야마다 두 전임 지휘자가 부임할 무렵, 악단 명칭도 신교향악단에서 일본 교향악단으로 개칭되었다.)
물론 작곡 활동도 계속 했는데,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과 미화는 오타카의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군의 승기가 우세했던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 점령을 축하하는 행진곡 '남진' 을 작곡했고, 1942년에는 다섯 명의 작곡가들이 공동 창작한 연작 교향시 '황군 송가' 에서 마지막 곡의 작곡을 맡았다. (곡 순서대로 야마다 가즈오와 야마다 고사쿠, 모로이 사부로, 이치카와 도시하루, 그리고 오타카가 각각 한 곡씩을 작곡했다.)
전후에도 일본 교향악단 지휘자로 계속 활동했는데, 작곡과 지휘 양 쪽에서 다망한 활동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자주 피곤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결국 1951년 1월 12일에 나고야 초청 공연을 마친 직후 쓰러졌고, 약 한 달 후인 2월 16일에 사망했다.
베를린 필과 개최한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 때도 남긴 녹음이 없지만, 그 외에도 해외와 일본을 통틀어 오타카가 남긴 녹음은 극히 적다. 온전한 스튜디오 녹음은 1943년에 도쿄 교향악단(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지휘해 일본 빅터에 남긴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야스카와 가즈코 협연) 뿐이고, 그 외에는 전후 자작 교향곡의 단편적인 녹음이나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의 2막 일부를 지휘한 영상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녹음이나 영상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오타카의 지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은데, 다만 베를린 필과의 대면도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실력 보다는 정세와 연줄 등에 기인한 것이 크다고 여겨진다.
'애국가' 의 작곡자인 안익태가 왜 여기에 들어갔나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을 법한데, 2000년대 들어 밝혀진 자료들에 의해 안익태가 1930~40년대 동안 일본인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집어넣었다. 물론 일본 쪽에서는 인정 안하는 것 같지만.
안익태는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교향 환상곡 제 1번 '조선' 을 초연한 뒤 유럽에서 수업과 활동 무대를 마련했는데, 우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에게 작곡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안익태가 아닌 일본어 독음의 유럽식 표기인 '에키타이 안' 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교환 학생으로 언어학을 배우고 있던 야스모토 도쿠나가가 쓴 '부다페스트 일기' 에도 에키타이 안에 대한 언급이 꽤 자주 나온다. 대략 1940년부터 헝가리를 중심으로 동유럽 국가들과 이탈리아에서 지휘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듬해 독소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유럽의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 측에서 외교관을 제외한 유럽 체류 일본인들의 귀국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이기는 하지만,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 있었던 에키타이 안 역시 귀국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에키타이 안은 이 제의에 대해 오히려 화를 낸 것으로 여겨지는데, 1941년 10월 11일에 작성된 야스모토의 일기에는 에키타이 안과 헝가리 주재 일본 영사관 사이에 귀국 문제로 실랑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국 에키타이 안의 뜻이 받아들여져 귀국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 때부터 유럽에 남아 있던 드문 일본 지휘자이자 작곡가라는 가치 덕분에 추축국 진영에서 주로 활동했다. 물론 이 활동은 일독회 등 관제 단체의 주선이 있어야 가능했고, 이들 단체 외에도 제국 문화원 같은 독일 내 정부 기관을 통해 직업 음악가로 활동을 인정받을 수 있는 회원증을 발급받아 유럽 정주 의사를 확실히 했다.
에키타이 안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42년 초반으로 여겨진다. 2월 6일에 하노버에서 열린 일독 친선 음악회에서 1부 공연을 지휘한 기록이 있고, 3월 12일에 일독회 주최로 열린 빈 교향악단 연주회에서는 바흐의 오르간 독주곡인 파사칼리아 C장조를 에키타이 안 자신이 관현악 편곡한 것과 에키타이 안의 환상곡 '에텐라쿠', 명인 피아니스트였던 에밀 자우어와 협연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기원 2600년 봉축곡으로 작곡한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중요한 연주회 때마다 자작의 '에텐라쿠' 나 편곡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에텐라쿠는 고노에가 관현악 편곡한 것이 이미 소개되어 있어서 유럽 청중들에게도 그렇게까지 낯선 음악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이 점을 노린 것 같은데, 같은 해 9월 18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위해 합창과 관현악 '만주국 축전 음악' 을 작곡해 초연했다.
이 때의 공연이 베를린 필과 대면한 첫 기록이라고 한참 동안 오도되어 있었는데, 2000년과 2006년에 각각 '객석' 의 베를린 통신원 진화영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베를린 필이 아닌 베를린 대 방송 관현악단 공연임이 증명되었다. 게다가 송병욱은 독일 국립영상보관소에서 공연의 필름을 입수해 소개했고, 결국 안익태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에키타이 안으로서 활동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말았다.
만주국 축전 음악은 1943년 2월 11일에 빈 교향악단과 가진 두 번째 공연 때도 재연되었고, 일독회 베를린 본부와 빈 지부가 주고받은 서신에 의하면 이 때 빈 제국방송에서 녹음 제의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이 녹음이 실제로 행해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녹음 자료실을 좀 더 뒤져보면 나오려는지 어쩐지.
아무튼 에키타이 안은 그 뒤로도 함부르크(4월 22일)와 로마(5월 21일)에서 일본(혹은 만주국)-독일, 일본-이탈리아 친선 공연을 지휘했고, 8월 18일에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의 연주회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일본 국적의 지휘자가 다섯 번째로 무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이 연주회의 개최 과정에는 꽤 흥미로운 비화가 숨어 있다. 일독회 베를린 본부의 총무였던 트뢰멜에게 베를린 필 단장이었던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이 쓴 5월 3일자 편지에 언급되어 있는데, 트뢰멜이 1942~43년 시즌에 일본 지휘자 두 사람을 베를린 필 무대에 세워줄 수 있겠냐는 문의에 대한 답신이었다.
일본 지휘자 두 사람은 바로 고노에 히데마로와 에키타이 안이었는데, 고노에는 에키타이 안이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 대학 관현악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알았을 확률이 높은데, 베스터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베를린 필을 지휘해 왔던 고노에 대신 에키타이 안을 추천했다. 심지어 '고노에가 연주회를 지휘하면 성공할 지도 의문' 이라는 견해까지 덧붙여 확인사살까지 해버렸다.
에키타이 안이 지휘한 베를린 필 연주회는 역대 일본 지휘자들의 첫 대면 무대와 마찬가지로 정기 연주회 무대는 아니었다. 비교적 한가한 여름 시즌에 마련하는 '여름 특별 연주회' 의 무대였는데, 프로그램 노트에는 특별히 일독회 주최의 연주회라는 표시가 없어 악단 자체적으로 기획한 공연으로 여겨진다. 다만 트뢰멜과 베스터만 사이에 오고간 서신이 입증하듯, 저 공연 또한 일독회의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연주된 곡들은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 서곡과 에키타이 안 자신의 환상곡 '에텐라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 그리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 9번 '신세계로부터' 였다. 드보르자크 교향곡은 당시 5번으로 분류되어 프로그램에도 '5번' 으로 찍혀 있고, 협주곡에서 협연한 피아니스트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두 번째 사생아였던 다크마르 벨라였다.
연주회의 평은 어떻게 나왔는지 조사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객석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베를린 필의 은퇴 단원에게 들은 바로는 연주가 별로 좋지 않았고, 안익태가 슈트라우스 등 음악계 거물들의 연줄에 의지해 출연했다고 해서 단원들 사이의 평판도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경분 등 후속 연구를 진행한 음악학자들의 경우, 베스터만이 트뢰멜에게 보낸 서신 등을 종합해 보면 반드시 나쁜 연주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베를린 필이 에키타이 안의 지휘 능력을 긍정적으로든, 혹은 부정적으로든 평가했다고 해도 그 뒤로 두 번 다시 지휘 무대는 주어지지 않았다. 폭격으로 인해 연주회가 중단되기도 하고, 심지어 취소되는 등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에키타이 안도 독일 국내 보다는 점령지나 동맹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길을 택한 것 같다.
다만 이미 전황이 독일의 패배로 굳어진 시점이라 이러한 '국외 활동' 에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연합군의 진주가 임박한 파리에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베토벤 연속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치러낸 것을 끝으로 중립국-으로 쓰고 잠재적 추축국으로 읽는다-에스파냐로 피신했다. 자신이 드러낸 국적의 나라인 일본과 주로 활동했던 독일이 이제 완전히 무너지리라고 예상했는지, 에키타이 안은 이 때를 전후해 자신이 작곡한 일본 소재 혹은 일본 관련 작품들의 원고를 파기 혹은 은닉해 버렸다.
이후 에키타이 안은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정주하며 계속 그 일본식 이름을 썼는데, 그러면서도 한국을 방문해 공연할 때는 다시 안익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1950년대 이후로는 외국에서도 안익태라는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지만, 미망인 롤리타 안 여사나 가족들도 남편과 아버지를 에키타이 안이라고 많이 부르는 것을 보면 일본식 이름도 계속 쓴 것으로 보인다. 하다 못해 그를 아직도 기리고 있는 마요르카에도 안익태 거리가 아니라 '에키타이 안 거리' 가 있을 정도이니.
적어도 안익태가 1940년대 유럽에서 벌인 활동에 대해 전후 숨김없이 털어놓고 참회했다면, 그냥 '어리석은 친일 부역자' 정도로 비판받고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익태는 자신이 일본인 음악가로서 활동한 역사를 어떻게든 묻어버리려고 했고, 이는 꽤 효과가 있어서 한국의 반 안익태 진영에서도 안익태를 '독선과 아집만 가득한 3류 음악인' 정도로만 욕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랬던 안익태도 유럽 각지의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소, 영상 자료실에 소장된 자료들마저 파기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었고, 이는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의 국가를 작곡한 애국적 음악인이라는 종래의 평가는 금세 역전되어 '친일인명사전' 에 실리고, 더불어 1960년대에 표절 논쟁으로 불거진 바 있었던 국가 교체론이나 거부 반응까지 새로운 '우군' 을 얻은 양 수면으로 떠올랐다.
베를린 필 지휘 기록도 발견 당시에는 '조선인으로 최초로 베를린 필을 지휘한 음악가' 였다가 당시 활동상이 상당 부분 밝혀지면서 오히려 불명예나 마찬가지인 기록이 되고 말았다. 물론 안익태=에키타이 안 자신에게는 세계 최상급의 악단을 지휘했다는 영예로운 기록이었겠지만, 이후 자신을 한국의 애국적 음악가로 내세운 만큼 그 후폭풍은 단순한 가십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
1943년 이후 베를린 필이 일본 지휘자를 다시 무대에 세우기 시작한 것은 종전 후로도 11년이 지난 1956년에 가서였다. 그 해 6월 21일의 공연에 아사히나 다카시가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어 오마치 요이치로(1959.7.2), 이와키 히로유키(1963.6.10), 와타나베 아키오(1965.9.30), 오자와 세이지(1966.9.21), 고이즈미 가즈히로(1973.11.26), 와카스기 히로시(1976.6.22)가 뒤를 이었다.
물론 지금도 일본인 음악가들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진출이 단순히 음악성에 의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이들 나라의 문화예술계에 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 자본의 힘을 의식한 정치적 움직임이라는 비판도 있고, 심지어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사도 유타카가 2011년에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하기로 한 것도 '그저 기회가 주어진 것 뿐이며, 정기 출연으로 귀결되지 않는 이상 이벤트성일 뿐' 이라는 의견들이 블로거나 네티즌들에게서 나오고 있을 정도.
독재와 침략으로 얼룩진 과거를 벗어나 겉보기에는 평화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일본 지휘자와 독일 악단과의 관계는 무엇을 상징하는 지를 여전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 지루한 시리즈를 기획해 보았다. 그리고 한국인 지휘자들의 해외 활동 현주소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필요가 있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