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블로그의 '만화잡설' 항목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서드플레이스 참관 후기가 일체 올라오고 있지 않음을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왜 올리지 않았을까? 사실 내 쪼잔한 뒤끝 덕이었다. 그 시기는 어느 동인게임 서클이 자신들이 만든 게임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리뷰를 몰래 올리다가 들통나 대차게 까이던 때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물론 일개 서클의 사건에 왜 서플이라는 행사가 됫박을 쓰느냐고 생각할 이들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 서클의 팀원 중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서플의 마스코트인 '서플양' 을 디자인한 사람이었고, 그 캐릭터로 서플 행사 카탈로그에 만화를 싣는 등 나름대로 행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거대 동인행사의 독점을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서플의 이미지에도 얼마간의 타격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서플 측에 그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리뷰 조작을 행한 서클 임원과의 관계를 끊고 마스코트를 새로이 선정해 보라는 권고를 메일로 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쪽의 답변은 그다지 개운치 않았다. 그 임원이나 서플 측이나 동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있는 것은 맞지만, 리뷰 사건과 행사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것이 서플 측의 답변이었다.
지금 관점에서도 꽤 무모해 보이는 짓이기는 했지만, 나는 서플 홈페이지의 '질문/건의 게시판' 에 서플 측의 답변이 미흡하니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해 달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플 측의 입장은 내가 메일로 받은 답변과 별 차이가 없음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서플을 이번 사건과 섣불리 연관지어 음해하려 한다고 당혹과 비난을 감추지 않은 덧글들을 올렸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해당 서클 임원은 사실상 동인계에서 사기꾼으로 낙인찍혔음에도, 별 상관 없다는 듯이 행사 카탈로그에 자신이 만든 서플양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4컷만화를 계속 그렸다. 물론 서플양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계속 서플의 마스코트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올 초 제 2회 레드서플 빼면 개인 사정으로 한 번 빠진 것 외에는 늘 갔으면서도, 행사 후기를 전혀 작성하지 않았다. 사실 가서 산 게 별로 없어서 쓸 내용이 변변찮다는 점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나의 치졸한 뒤끝이라는 것에도 변함은 없다.
사실 서플 측이 내가 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행사를 영 좋지 않은 행사라고 단정짓기도 싫었다. 경쟁 행사는 매번 상대적으로 비싼 참가비와 입장료, 지나치게 자주 열리는 행사 빈도, 행사장에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밖에서 깽판과 진상을 부리는 무개념 코스플레이어들 덕에 맨날 까였고, 심지어 코스프레 등록제를 택한 뒤에도 '코글링' 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만년 떡밥화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플은 비록 마스코트 캐릭터를 그린 이의 리뷰 자작극 사건으로 간접적인 이미지 하락을 당했다고 치더라도, 그리고 나의 글을 반박한 사람들 말마따나 사건과 행사는 별개라 타격은 미미하거나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의견도 포괄한다 치더라도, 상대적으로 좀 더 깨끗해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리뷰를 중단한 개인적인 치졸함마저 뻔뻔하게 숨기고 계속 행사를 보러 간 것이었고.
헌데, 제 10회 행사라는 숫자상으로 꽤 기념비적인 행사를 치른 뒤 갑자기 인터넷에서 뭔가 심상찮은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직접 가서 본 경험으로는, 입장 줄이 너무 길어서 들어가는 데 애를 먹은 것을 빼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던 행사였다. 더군다나 경쟁 행사가 꽤 불합리한 잣대를 들이대 행사장 대관에 제동을 거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당당히 열렸다는 것에서부터, 뭔가 이 행사가 이제 제 자리를 잡고 계속 이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일개 참관자가 겉으로 본 것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여론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서플 운영진은 자타가 '삼동이' 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 삼동이들 중 10회 행사를 주관한 두 사람이 240만원이라는 거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했다는 주장이 전직 삼동이 중 한 사람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나왔다.
사실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행사장에서 머무르지는 않아서, 이번 행사가 몇몇 도우미들의 불성실함 덕에 성인 전용 부스 코너인 '레드존' 에서 인원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던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행사의 엉성한 운영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이 바로 저 운영 자금 전용 소식이었다.
거대 동인 행사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극복하는 동인 위주의 행사라는 것이 서플의 개최 취지였다. 하지만 그 취지가 무색해질 만큼의 문제가 바로 저 자금 전용 문제였고, 서플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이던 질문/건의 게시판이건 9월 18일 현재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을 서플 측에서 확실히 해명해줄 것을 요구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서플 측에서도 뭔가 크게 데였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3회에 걸친 장문의 해명글을 올려놓았지만 그럼에도 비판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행사 개최와 운영에 쓰여야 할 '공익성' 을 띄는 자금이 몇몇 삼동이의 개인적인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익성' 으로 유출되었고, 그것에 대한 책임있는 해명이나 전직 삼동이의 의혹에 대한 확실한 반박 자료는 사과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특히 '자금을 전용했을 뿐 아니라, 취미로 참가한 다른 삼동이들을 퇴출시키고 행사를 강행한' 두 삼동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이내 서플이 과거에 겪어왔던 이런저런 시행 착오들을 다시금 물 위로 떠오르게 만들고 있다.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는, 내가 예전에 '떡밥' 으로 삼은 바 있었던 그 문제, 즉 리뷰 조작 사건을 일으켰던 모 동인 서클과 서플 사이의 관계를 곱씹어보는 내용의 글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내가 문제를 제기했을 당시에는 동조하는 의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화두가, 이번에 터진 자금 전용 의혹으로 인해 행사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근거로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참 고소하다 ㅄ들 ㄲㄲㄲ' 라고 해야 되나? 글쎄. 그 때 일로 서플에 계속 앙금이 남아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생각 보다는 더욱 더 씁쓸떨떠름한 새로운 뒤끝이 더 남고 있다. 물론 아직 의혹을 제기한 전직 삼동이와 의혹 대상이 된 현직 삼동이들 사이의 대질이나 추가 자료 등이 나오지 않은 이상, 의혹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돈의 유용이나 내부 갈등이라는 문제는 쌍방 모두 인정하는 듯한 눈치라, 동인을 위한 비영리 행사라는 취지 자체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은 뒤집히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어느 행사가 판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권세를 휘두른다면, 그 행사는 독점이라는 이유 만으로도 충분히 까일 거리를 스스로 제공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현재 한국 동인계라는 바닥이 그러하며, 온리전이나 기타 특정 주제를 갖고 진행하는 행사도 그 주제만의 행사라는 한계 때문에 거대 행사에 대항하거나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종합적인 컨셉을 지향하며, 자본주의 논리 보다는 동인들의 편의를 위해 개최되는 행사는 충분한 대항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뒤끝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기대를 걸어 보았던 서플도, 과연 이번 의혹 제기로 인한 타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 의문이 든다. 개인적인 의견을 풀어 보라면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강하지만. 그냥 단순 참관자들만 웅성댄다면 몰라도, 행사의 또 다른 주체인 동인 작가들마저 행사 참가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예전에 비슷한 취지로 개최하려던 여러 행사들도 동인 작가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 치명타로 작용해 단발성으로 끝나거나, 심지어 행사도 열지 못하고 좌초해버린 예를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나야 일단 올해 말에 볼 ZD 시험에서 합격한다면, 홀가분하게 짐싸서 독일이든 오스트리아든 떠나버리면 될 일이다. 한국의 개차반 사회 분위기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하지만 덕질은 해외에서라도 계속 하고 싶은 심정이라, 어느 행사가 어떻다 하는 여론은 예의주시할 예정이다. 과연 내가 떠난 뒤에도 서플은 계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의혹에 대한 해명을 제대로 못하고 다른 대항마들처럼 힘없이 주저앉아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