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동안 신품이던 중고이건 간에 음반을 사본 적이 거의 없다. 영상물까지 통틀어도, 극장에서 다소 불편하게 관람했던 '엘 시스테마' 의 DVD가 나왔을 때 재빨리 질렀던 것이 고작이었을 정도다. 물론 그 동안 블로그 돌아볼 틈도 없이 독어시험 준비하느라 그랬던 걸수도 있지만, 시간이랑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엄두를 낼 수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헌데 그런 일상 속에서 참 신기하게도 레어템을 찾는 능력이 발동했다는 것인데, 11월 4일에 학원 수업 끝나고 배가 고파서 평소 애용하던 낙원상가 옆의 2000원짜리 해장국집에서 끼니를 때우려고 인사동 초입을 막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이 동네 새마을운동 모임에서 자선 바자회를 하고 있었는데, 간단한 음식을 파는 간이 천막에서부터 중고 옷가지나 책 등을 늘어놓고 파는 좌판 등 다채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선에 대한 관심이 극히 적은 터라, 그냥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책은 뭘 갖다놓았는지 살짝 흘겨보다가, CD 몇 개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매의 눈' 이 발동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한 콘서트홀인 빈 음악협회 대강당에서 찍은 관현악단 단체 사진이 커버로 쓰인 CD였는데, 서울예고 교향악단이 2007년 저 홀에서 가진 음악회의 실황이 담긴 물건이었다.
저 공연 소식은 당시 객석 같은 월간지에도 보도된 바 있었고, 나도 그 기사를 통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소위 '청소년 관현악단' 에 그렇게까지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저 공연이 녹음된 음반이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몰랐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는 식으로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던게 흠좀무였던 것이었고.
다만 '이걸 사 말어' 라는 식으로 좀 방관하듯이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는데, 가격이 얼마인지 일단 물어봤다. 난 적어도 5000원, 많게는 10000원까지를 예상했는데, 거기서 부른 값은 단돈 1000원이었다. 다행히 지갑에는 그 금액을 지불하고도 해장국까지 사먹을 정도는 되는 돈이 들어 있었고,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 2007(?) Seoul Records Inc.
한국 관현악단의 해외 공연은 다른 나라의 악단들보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사례가 꽤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시립 교향악단 같은 정규 악단들의 공연이 대부분이었고, 내가 아는 한 한국 청소년 관현악단으로 해외 공연 경험을 갖고 있는 악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런 탓인지, 서울예고 교향악단이 2007년 6월에 유럽 공연을 한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도 나름대로 흥미거리가 될 만했다.
객석 기사에 따르면, 이 악단은 동문 지휘자인 금난새와 함께 2007년 6월 6일에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의 슬로바키아 방송국 음악당에서 첫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에는 바로 빈으로 가서 예의 빈 음악협회 대강당에서 공연했는데, 저 CD가 담고 있는 것은 빈 실황이다.
프로그램은 두 공연 모두 똑같이 1부에서 베토벤의 3중 협주곡, 2부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전체 연주 시간이 81분 약간 넘어서 CD 한 장에 채울 수 있기는 하지만, 기술 문제 때문인지 1부와 2부를 각기 한 장씩 담고 있다.
다만 이 음반은 시판용이 아닌 비매품이고, 아마 예고 내에서 공연 관계자들에게 주기 위해 서울음반에 위탁해 소량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앨범 속지에는 서울예고 교장의 축사와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 금난새와 악단의 프로필, 모 음악 잡지에서 이 공연을 다룬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다만 잡지 기사의 경우, 한국 예술 잡지 전반의 '국수적' 성격을 감안해도 너무 편향적으로 작성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속지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고, 일단 집에 와서 들어보기 시작했다. 빈 음악협회 대강당은 지은지 100년을 훨씬 넘긴 오래된 건물이지만, 음향 상태가 세계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공연장들 중 하나라 적어도 사운드 하나는 최상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칫국이었다.
녹음을 어디에서, 누가, 무엇으로 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잔향이 너무 심하게 들어가 음악협회 대강당이 아닌 체육관에서 연주한 듯한 꽤나 지저분한 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특히 첫 곡인 베토벤 협주곡에서는 마이크 셋팅 문제인지 믹싱 문제인지 독주 파트와 관현악 간의 소리가 꽤 불균형하게 녹음되었고, 독주 파트들 중에도 피아노가 유달리 튀어나와 바이올린과 첼로는 듣보잡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녹음만큼은 아니어도, 연주 자체도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관현악은-이후 교향곡에서도 마찬가지지만-팀파니가 좀 심하게 튀거나 관악기 조율이 약간 미비해 생기는 맥놀이 현상 등을 제하면 기교에 큰 결점은 없었다. 다만 독주자들의 경우 음악도시의 유명한 공연장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을 너무 의식한 것인지, 좀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게다가 한 번의 공연을 편집 없이 수록했으니 종종 흔들리는 박자나 음정, 미스터치 등도 눈에 띄고 있고.
물론 악단이나 지휘자도 이 공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 테고, 예전부터 준비를 많이 한 만큼 곡의 흐름에 심각한 장애를 줄 정도의 실수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한국 악단의 음반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생각인, '좀만 더 다듬었으면' 하는 생각도 여전히 들었고. 아무튼 녹음 자체가 꽤 이상했던 만큼, 그것 때문에 연주의 인상까지 깎아먹은 것 같다.
2부 연주곡인 차이콥스키 교향곡은 협주곡보다는 한결 나았다.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할 지는 모르겠지만, 금난새는 이미 1980년대 후반에 구 소련에서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을 지휘해 이 곡을 서울음반에 취입한 바 있었다. 음반으로 낼 정도면 이 곡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서 선곡했다는 것일 텐데, 과연 20년의 시차를 두고 녹음된 이 연주는 어땠을까.
시작은 다소 경직된 분위기인데, 여기서도 관악기의 조율 문제가 눈에 띈다. 그래도 서주를 지나 본론으로 접어들면 한결 나아지고, 단원들도 점차 '삘받아'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협주곡에서처럼 녹음 탓인지 아니면 실제 연주에서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금관과 팀파니가 너무 큰 목소리를 내면서 좀 심하게 까끌까끌한 소리가 빚어지는 현상은 여전하다.
파트 간의 음량 불균형은 곡 전체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몇몇 부분에서는 눈에 띄는 대목도 나타난다. 2악장 초반의 호른 솔로는 꽤 부드럽게 처리되었고, 전체적으로 심한 기복이 있는 중반 이후에도 큰 무리 없이 곡을 소화해내고 있다. 3악장 왈츠도 중간부에서는 좀 더 가볍고 발랄한 연주가 아쉬웠지만, 곡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춤곡 리듬의 우미함은 양호한 편이고.
3악장이 여섯 음의 망치질로 끝나고 그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바로 마지막 악장으로 들어가는데, 처음에 나오는 서주는 1악장 초반과 마찬가지로 좀 경직된 분위기라 '장엄하게' 라고 지정된 표정 기호에는 다소 못미친다. 대신 거칠게 긁는 현과 팀파니 연주로 바로 진입하는 본론 부분에서는 다소 과장된 셈여림이 꽤 인상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러시아 악단이 연주하는 것 같은 야성미까지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좀 꼼꼼하고 유려한 면은 떨어지는 대신, 극적인 표현과 약동감을 살려 만회하는 연주로 여겨졌다. 단원 대부분이 10대 학생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나쁜 연주도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한국 음악교육의 실기 분야가 합주 보다는 독주 역량의 계발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만 여기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이나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 서동시집 관현악단 같은 수준을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아무튼 영 좋지 않은 음질과 연주 상의 이런저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꽤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구입한 음반 중 최저가로 즐길 수 있었으니, '천원의 행복' 이라는 표어가 딱 맞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었고.
*여담이지만, 엘 시스테마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높으신 분들' 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 DVD가 국내에 정발된 때를 맞춰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2010년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을 방문했고, 그보다 보름 전 쯤에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정부 주도로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현악단 육성 계획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니까.
엘 시스테마에 들어가는 지원금 중 국고가 90%나 되고, 서동시집 관현악단도 악단 활동의 베이스캠프인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주 정부가 적극적으로 예산 지원을 해주고 있는 것에서 '우리도 이렇게 해보자' 고 아이디어를 낸 것 같은데, 다만 교과부에서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저 두 운동 모두 시작은 정부나 기업 주도가 아닌, 몇몇 음악인들의 자발적인 기획으로 시작했다는 점 말이다.
예술에 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이 너무 전시 행정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문젯거리다.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 예전 정권에서 시행했던 정책들이 오직 정치/경제 논리에 좌우되어 뒤엎어지는 사례가 다반사인 한국 현실에서는, 어느 당파의 정권이 들어서도 지원을 속행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만큼의 안정성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고. '스타 만들기' 에 주력하는 한국 음악계의 풍토도 오히려 걸림돌이 될 공산이 커서,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이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느냐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우선 그 '베풀어 주시려는' 윗쪽 나으리들부터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