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서울 시내로 들어가고 나올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도로가 을지로와 종로다. 특히 독일어학원을 다니면서 종로를 이용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는데, 다만 큰 길가로만 주로 다녀봤지 그 사이에 가지치기된 골목길로 들어가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골목길 큰길 합쳐도 종로 이북 지역은 내게 아직 미답의 경지인 곳이 거의 대부분이고.
하지만 종로통 주변의 그 골목들에서 싼값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곳들이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그래서 알음알음으로 모은 정보를 통해 내 기호에 맞고 관심이 충분히 가는 몇 군데를 선정해 릴레이 식으로 가봤다. 게다가 그다지 먼 거리에 있는 곳도 아니라서, 특별히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갈 만큼의 부담도 없었던 곳들이라는 점도 충분한 호기심을 자극했고.
첫 번째로 찾아가본 곳은 종묘 동쪽 골목에 있는 국밥집이었다. 근데 말이 골목이지, 시쳇말로 '짱박혀'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일단 지도를 따라 광장시장 서쪽 입구가 있는 종로4가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혜화경찰서를 지나 쭉 가다 보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짤방에 보이는 건너편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다 보면 이렇게 건물 사이로 난 골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봐도 아무 정보 없이 거니는 초행길인 사람은 도무지 갈피를 못잡을 듯 하다.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가 좀 걷다 보면, 오른편에 이렇게 가게가 근처에 있음을 알리는 현수막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전선감개들이 줄지어 늘어선 막다른 골목을 들어가보면,
몇 발짝 떼지 않아 또 다른 자그마한 노란 간판을 볼 수 있다. 가게 이름도 딱히 찾아볼 수 없었고, 그냥 현수막에 강렬하게(??) 표기된 대로 '씨레기국밥집' 정도로 부를 수 있을 듯.
주차장 한켠을 가건물처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간판만 없다면 그냥 사무실이나 창고로 착각할 만큼 음식점 분위기가 나지 않는 모습이다.
게다가 영업 시간. 딱 평일 아침부터 점심까지만 영업하고 끝이다. 약간 떨어져 있는 탑골공원 인근의 식당들이 평일 휴일 가리지 않고 어르신들 접대하느라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뭔가 배짱이 두둑해 보이기까지 하는(?) 영업 철학으로 느껴졌다.
물론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서 벽을 따라 죽 늘어선 독대형 식탁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는 딱 하나. 시래기국밥이다. 가게 앞에는 '검정콩국밥' 이라는 기이해 보이는 메뉴도 걸어놓고 있었지만, 단종(?)됐는지 어쨌는지 보이질 않았다.
독대형 식탁에는 이렇게 빙 둘러 붙인 거울과 원로급 연예인들의 사인 혹은 방문기, 가게 사람들의 사진들이 쭉 걸려 있다. 유일한 메뉴인 시래기를 다듬는 사진까지 걸려 있어서,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 전문점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앉자마자 반찬 종지가 나오는데, 한켠에 올라와 있는 달걀 한 개가 인상적이다. 참고로 삶은 달걀인데, 시래기국에 달걀이 왜 나오나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종지 위에 있는 것들은 수저통과 김치 단지, 다진 청양고추 종지, 소금통(빨간색)이다.
앉자마자 음식을 내오는 낙원상가 바로 옆의 해장국집과 달리, 여기서는 단순한 국밥인데도 약간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 뜨거운 국에 밥을 토렴해 내놓기 때문인데, 그 때문인지 값싼 플라스틱 그릇을 썼음에도 좀처럼 쉽게 식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뜨거운거 잘 못먹는 내게는 좀 고문이었지만. lllOTL
내용물은 이렇다. 멸치와 된장으로 우린 육수에 시래기, 그리고 말아낸 밥. 정말 단순하다. 게다가 시래기 외에 파 같은 다른 야채도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어찌 보면 굉장히 투박하고 거친 인상인데, 군 시절 된장국에 트라우마까지 생길 정도였던 터라 그릇을 받은 뒤 약간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오이 같은 개인적 오신채가 안들어갔으니, 어쨌든 입에 넣어 목으로 넘겨 소화시킬 수는 있는 음식이었다. 몇술 떠서 먹어보니 모양새 그대로 약간은 거친 토장국 맛을 느낄 수 있었는데, 군 시절 먹었던 그 미묘하게 달달하고 밍밍한 '똥국' 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좀 맛이 단조로워진다 싶으면 김치를 곁들여 후후 불어가며 계속 먹어치웠다.
그런데 달걀은? 다른 사람들은 과연 삶은 달걀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 거울 너머로 힐끔힐끔 봤는데, 뜻밖에도 달걀을 국밥에 넣어 먹고 있었다.
이렇게 껍질을 까 통째로 그릇에 빠뜨린 뒤,
숟갈로 마구 으깨서 같이 먹는 것이 이 곳의 룰(?)로 여겨졌다. 마치 낙원상가 해장국집의 해장국에 고기 대신 들어가 있는 두부 한 조각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렇게 먹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냥 국밥 나오기 전에 껍질 까 소금 살짝 쳐서 먹는 사람도 있고, 나오면서 후식 삼아 까먹는 사람도 있으니, 엄두가 안 난다면 굳이 국밥에 으깨넣고 먹을 필요는 없을 듯.
국밥 한 그릇에 3000원. 사실 같은 가격에 돼지머릿고기와 곱창, 순대가 잔뜩 든 순댓국을 먹을 수 있는 낙원상가 근처 단골 가게에 비하면 아주 싸다고 하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시래기국의 거친 맛을 느껴볼 사람이라면 부담없이 가서 먹을 수 있는 가격인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토렴해 내오는 정성까지 생각해 보면 결코 비싼 값도 아니다.
달걀과 육수의 멸치맛 빼면 거의 '풀만 먹고' 나온 셈이었지만, 섬유질 많은 시래기가 잔뜩 든 뜨뜻한 국이 들어가니 속은 꽤 든든했다. 그 투박함과 단순함도 오히려 마음에 충분히 들었고. 다만 하도 골목 속에 숨듯이 있다 보니, 찾아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아래 약도만 봐도 그렇고. 참고로 종로3가역이든 종로5가역이든 목적지까지는 별로 가깝지 않고 버스 정류장 위치도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제 남은 가게는 대략 네 곳 정도인데, 마찬가지로 3000~6000원 선에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골목 속의 식당들이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