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실내악의 팬이라면, 아마 만년에 클라리넷을 주역으로 한 네 곡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걸로 생각된다. 브람스는 관악기 솔로를 위한 소나타나 실내악, 협주곡을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클라리넷만은 예외였다. 자신과 친분을 나누고 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이끌고 있던 마이닝엔 궁정 관현악단의 수석 클라리네티스트였던 리하르트 뮬펠트(Richard Mühlfeld) 덕이었는데, 뮬펠트는 당시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제일 가는 클라리네티스트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브람스 역시 1891년 봄에 뮬펠트의 연주를 처음 듣자마자 매료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같은 해 여름에 클라리넷과 첼로, 피아노를 위한 3중주와 클라리넷 5중주를 작곡해 뮬펠트의 연주로 초연했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클라리넷이 주역이 되는 실내악 작품들을 작곡한 셈이었는데, 3년 뒤인 1894년에는 역시 뮬펠트를 위해 두 곡의 클라리넷 소나타를 더 써주었다. 이 소나타들이 브람스 최후의 기악 작품으로 남았고, 지금도 많은 클라리네티스트들의 독주회에서 연주되고 있다.
하지만 브람스 자신은 이 곡들 외에도 뭔가 더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뮬펠트에게 1894년 8월 말에 보낸 편지에서 협주곡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적혀 있는 걸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실제 작곡으로 실행되지 못했는데, 그 대신 소나타 두 곡을 협주곡으로 편곡하는 작업이 브람스 사후 한참 지나서야 다른 이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누가 이 작업을 처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이탈리아 현대 작곡가인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 1925-2003)가 편곡한 소나타 1번이었다. 베리오는 리카르도 샤이가 모아서 내놓은 편곡 선집(데카) 등에서 들을 수 있는 편작들을 들어보면 꽤 충공깽을 안겨주는 재창조에 가까운 작업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다만 선집 마지막에 수록된 이 소나타 편곡은 관현악 편성이 좀 큰 것을 빼면 대체로 전통적인 피아노 반주의 관현악화라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소나타 한 곡은 베리오가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고, 이 곡의 관현악 편곡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학동의 한 중고음반 가게에서 매의 눈을 발동해 찾아낸 CD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EMI 특유의 붉은 바탕 옆구리 라벨이 거의 하얗게 변색되어 버린 물건이라 뭐가 들어있는 지도 몰랐다. CD를 꺼내 뒤집어보고 나서야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 1997 EMI Electrola GmbH
수록 시간이 불과 41분 반 정도인 CD였지만, 레어템들을 담고 있는 음반이라 아쉬움 없이 질렀다. 이미 들어본 베리오 편곡의 소나타 1번과, 이번에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라이너 쇼트슈테트(Rainer Schottstädt, 1951-)의 소나타 2번 편곡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쇼트슈테트는 CD 속지에도 자세한 이력이 없어서 독일어판 위키페디아를 검색해 보니, 본업이 작곡가가 아닌 바순 주자라고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1번 보다는 처음 들어보는 쇼트슈테트 편곡의 2번에 더 관심이 갔는데, 다만 쇼트슈테트 편곡도 베리오와 마찬가지로 원곡의 성격과 틀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편곡이라 크게 튀는 대목은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큰 관현악 편성을 동원해 다양한 색채감을 구사한 베리오와 달리, 이 곡의 단아한 맛을 살리기 위해 팀파니 등 타악기와 호른을 제외한 금관악기를 모두 빼버린 실내 관현악 편성을 취하고 있다.
브람스나 뮬펠트가 이 편곡들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클라리넷 독주의 음색과 개성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무난하게 협주곡화한 산물들로서 나름대로 유니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빈의 우니베르잘 음악출판사에서 악보가 정식 간행된 베리오 편곡의 1번과 달리 쇼트슈테트 편곡의 2번은 음반에 기록된 출판사 정보가 자가 출판(Eigenverlag)이라고 되어 있어서, 연주하려면 편곡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악보를 구입 또는 대여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수록된 녹음은 1996년 5월에 폴란드 라디오의 스탭들이 제작했고, 볼프강 마이어(Wolfgang Meyer)가 보이치에흐 라이스키(Wojciech Rajski) 지휘의 폴란드 방송 관현악단과 협연했다. 볼프강 마이어는 여동생인 자비네 마이어에 비하면 인지도가 약간 떨어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쪽도 ARD 콩쿨을 비롯한 독일의 유수 콩쿨에서 입상하고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광활한 레퍼토리를 소화해 내는 명수다.
지휘자인 라이스키는 주로 마이너 레이블 쪽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폴란드 실내 필하모닉을 지휘한 이런저런 녹음들이 있다. EMI 독일 지사인 엘렉트롤라에서 음반을 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메이저 선호가 기준으로 볼 때는 듣보잡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겠지만 별다른 실수나 난점 없이 충실하게 독주자를 보좌하고 있다.
EMI 본진이 영 안좋은 녹음 퀄리티와 부실한 계획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지만, 적어도 EMI 엘렉트롤라 같은 해외 지사들에서는 나름대로 참신한 컨셉이나 작품들을 담은 음반들이 조금씩이지만 계속 눈에 띄고 있어서 흥미롭다. 나머지 레어템들은 비록 메이저 레이블을 달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역시 나름대로 내게 간택되기에(?) 충분한 선곡들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