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은 저 사람을 베토벤과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 피아노 음악에 특화된 명 피아니스트로 기억하고 있을 걸로 안다. 나도 저 사람의 이름과 피아노 연주를 초딩 때 산 성음 라이센스 카세트 테이프에서 처음 접했고, 관련 서적들을 보면서 저런 이미지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켐프는 당대 유명 연주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작곡도 남긴 작곡가였는데, 다만 가외로, 혹은 재미삼아 발을 담근게 아니라 나름대로 다양한 영역의 작품들을 써낸 인물이었다. 특히 2차대전 말기 잦은 공습으로 연주 활동이 힘들어졌을 때는 주로 작곡에 매진했고, 전후 연주 일선에 복귀한 뒤에도 계속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작품 목록을 보면 오페라 네 곡, 무대극 형식의 오라토리오 한 곡, 음악극 형식의 칸타타 한 곡, 교향곡 두 곡, 피아노 협주곡 두 곡, 관현악 모음곡 수 곡, 가곡, 합창곡, 실내악, 피아노곡 등 200곡 이상에 이르는데, 이 정도면 거의 전업 작곡가라고 해도 될 정도의 생산량이다. 그 외에 바흐 등의 트리오 소나타 같은 실내악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한 것들도 꽤 된다.
실제로 켐프는 베를린 음악대학에 들어갔을 때 피아노와 작곡 복수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피아노는 하인리히 바르트에게, 작곡은 로베르트 칸에게 배웠다. 1917년 졸업할 때는 피아노와 작곡 두 부문에서 멘델스존 상을 수상했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 복수 전공자가 양 전공에서 모두 저 상을 탄 것은 켐프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대전을 거친 뒤 독일 작곡계의 판도를 전위파가 장악해 나가면서, 켐프는 보수적인 축으로 간주되어 밀려나게 되었다.
켐프의 작품이 리바이벌되기 시작한 것은 사후에 가서였는데, 이번에 업어온 앨범도 그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 1996 KOCH International GmbH
주로 관현악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첫 곡인 '죽음의 춤(Ein Totentanz)' 은 좀 색다른 컨셉의 작품이었다. 피아노 독주에 현악 합주와 타악기, 종반부의 혼성 합창 편성으로 된 일종의 협주곡인데, 1931년에 작곡되어 이듬해 켐프 자신의 독주와 베르너 라트비히 지휘의 드레스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초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크 양식 모음곡에 낭만 시대의 표제음악 컨셉과 협주곡 양식을 한데 녹여낸 곡인데, '죽음의 무도' 를 오마주한 것인지는 몰라도 꽤 리스트삘이 많이 난다. 물론 음표가 이곳저곳 떨어지고 휘감기는 수다스러운 작풍은 아니지만, 감화음을 많이 쓰는 신랄하고 자극적인 대목과 바로크 스타일의 금욕적인 대목이 교차하며 제법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고 있다. 마지막의 합창은 독일 중세 민요 가사를 차용하고 있고, 바로크 푸가 양식을 도입해 의고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은 초연 때 호평을 받았음에도 2차대전을 거치면서 완전히 묻혀버렸고, 비로소 재연된 것은 1995년 4월에 터키의 앙카라 음악제를 통해서였다. 이 때 피아노 독주는 뤼디거 슈타인파트(Rüdiger Steinfatt)가 맡았는데, 이 음반의 녹음에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맡았다. 종반부 합창은 명칭대로 슈츠 등 독일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합창곡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하인리히 슈츠 앙상블(Heinrich Schütz-Ensemble)이 맡았다.
나머지 곡들은 소편성의 관현악 모음곡인데, '아르카디아 모음곡(Arkadische Suite)' 은 전쟁 직전이었던 1930년대 후반에 작곡되어 1939년 파울 반 켐펜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곡도 '죽음의 춤' 처럼 바로크 스타일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다만 리스트 스타일의 신랄함과 연극성 대신 신고전주의 풍의 단아한 악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페르골레시 작품들을 리메이크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풀치넬라' 를 연상케 했는데, 이러한 양상은 다음 곡인 1958년 작품 '포시타노 모음곡(Positano-Suite)' 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
포시타노 모음곡은 현악 합주만 연주하는 단촐한 편성인데, 포시타노는 켐프가 1968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이탈리아 지중해 해안가의 자그마한 마을 이름이다. 켐프는 1968년 이전에도 이 마을을 휴양 차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의 경험을 살려 작곡한 것으로 여겨진다. 5부 구성의 이 곡에서도 바로크 모음곡에 대한 오마주를 엿볼 수 있는데, 다만 각 부의 표제는 '아침', '디오 디오니시오 동굴의 환상', '산 비토의 축제'. '세레나데: 밤', '야상곡' 등으로 좀 더 구체적인 표제음악 성격을 띄고 있다.
관현악 연주는 세 곡 모두 뮌헨 교향악단(Münchner Symphoniker)이 베르너 안드레아스 알베르트(Werner Andreas Albert)의 지휘로 맡았는데, 같은 도시 소재인 뮌헨 필하모닉이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같은 메이저들에 인지도가 발려 안습인 악단이다. 1945년에 쿠르트 그라운케가 창단한 사설 악단인 그라운케 교향악단이 직계 기원인 악단인데, 1990년에 현재 명칭으로 개명했다.
그라운케 시절에는 주로 영화음악이나 대중적인 팝스 콘서트 계통 음악회로 나름대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개칭 후에는 일반 클래식 관현악단으로서도 어필하기 위해서인지 현대음악이나 이렇게 잊혀진 작품들의 재발굴 같은 기획의 연주회와 녹음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지휘자인 알베르트는 소위 '듣보잡' 레퍼토리 전문 지휘자로 각인되어 있는데, 실제로 cpo나 코흐 등에서 꽤 방대한 양의 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앞에 소개한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집처럼 이 녹음도 바이에른 방송국과 공동 제작했는데, 스탭진 이름 중에 톤마이스터(일종의 녹음 엔지니어) 겸 편집자로 미하엘 켐프(Michael Kempff)가 눈에 띄었다. 빌헬름 켐프와 성이 똑같은 걸로 봐서는 아들 혹은 직계 후손으로 여겨지는데, 추측이 맞다면 아마 이 음반의 제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로 추측된다.
다음 음반은 협주곡 중에서도 꽤 듣기 힘든 '팀파니 협주곡' 을 실은 음반인데, 그 중에서도 한 곡이 각별히 눈에 띄어서 질러버렸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