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아마추어 관현악단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비매품 사가반 형태로든 아니면 상업용이든 간에 음반을 발매한 악단들도 있다. 예전에 부산가서 사온 신교향악단 앨범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 사립 대학교 중 하나라는 와세다 대학교의 관현악단인 와세다 대학 교향악단(早稲田大學交響樂團. 이하 와세다향)의 앨범을 입수했다.
일본의 경우 한국처럼 종합대학 안에 예체능 단과대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고, 아예 예대나 음대, 체대 등 단과대학이 따로 설립되어 있다. 와세다대도 마찬가지로, 여기도 음대 자체가 없다. 그런데 웬 교향악단이 있냐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유령 단체나 유사 단체가 아니고 진짜로 와세다 재학생들이 만든 악단이다.
와세다향은 1913년에 학교 내 아마추어 동아리로 창단되었는데, 2차대전 후에는 아마추어 악단임에도 이런저런 굵직한 레퍼토리들의 일본 초연이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초연 등을 행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일본 아마오케 최초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을 연주했고, 1975년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를 일본 초연한 진기록이 남아 있다.
1978년에는 창단 사상 첫 해외 순회 공연을 겸해 당시 베를린 필의 수장이었던 카라얀의 음악 재단이 주최한 제 5회 국제 청소년 관현악단 콩쿨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교향악단 부문 우승을 거머쥐면서 인지도가 부쩍 올라갔다. 당시 최종 심사에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 수석 연주자들이 직접 참가해 연주를 들었다는데, 이들은 와세다향이 100% 비전공자로 구성된 악단임에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같은 난곡들을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에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콩쿨의 부상이었는지 특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두 번째 해외 순회 공연을 했고, 이후 3~4년 주기로 정기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해외 순회 공연을 다니고 있다. 일본 순회 공연이나 정기 연주회도 물론 개최하고 있고, 베를린 필이나 빈 필 단원들의 마스터 클래스나 객원 단원 참가도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쯤 되면 이게 아마오케 이력인지 프로오케 이력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1986년에 네 번째로 해외 순회 공연을 했을 때는 서베를린의 필하모니-베를린 필의 상주 공연장-에서 공연한 실황이 도이체 그라모폰 스탭들에 의해 녹음되었는데, 이 녹음은 같은 해 일본 폴리그램의 로컬 CD로 제작되었다. 로컬이기는 하지만 일본 아마오케 역사상 최초로 메이저 레이블을 달고 나온 음반인 셈이었는데, 아이뮤직에서 미개봉 중고품을 불과 7000원에 파는 것을 찾아내 질렀다.
와세다향의 네 번째 해외 투어는 오토모 나오토와 타카세키 켄의 지휘로 1986년 2월 10일부터 3월 24일까지 행해졌다고 되어 있다. 프랑스와 동서독,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총 20개 도시를 돌며 진행되었는데, 그 중 2월 22~23일에 타카세키 켄의 지휘로 열린 서베를린 공연의 실황 일부가 이 CD에 녹음되어 있다.
ⓟ 1986 Polydor International GmbH
첫 곡은 타케미츠 토루(武満 徹, 1930-1996)의 '스타-아일(Star-Isle)' 인데, 1982년에 와세다대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위촉되어 같은 해 이 악단이 이와키 히로유키의 지휘로 세계 초연한 곡이기도 하다. 창립 기념작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와세다의 영어 스펠링인 Waseda에 해당되는 독일어 음명인 As(내림가)-E(마)-D(라)-A(가) 네 음을 중심 주제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이어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가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앵콜곡 중 하나였던 토야마 유조(外山 雄三, 1931-)의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이 들어 있다. 수록 시간 문제인지 연주 상의 문제인지 당시 베를린 필 첼로 수석이었던 오토마 보로비츠키가 협연했다는 하이든 첼로 협주곡 2번이 빠져 있어서 아쉬운데, 일단 굵직한 관현악 연주곡만을 선별해 수록한다는 컨셉으로 여겨진다.
일본 로컬반 특유의 다소 과장되게 집필된 속지의 공연평 등은 일단 덮어두고 음악부터 들었는데, 괜히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을 빌려 녹음한 물건은 아니었다. 비록 풍부한 표현력이나 최상의 합주력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고 해도, 아마오케가 이러한 대곡들을 막힘없이 연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녹음 상태도 물론 도이체 그라모폰 스탭들이었던 한스 베버(프로듀서)와 한스-페터 슈바이크만(엔지니어)이 음반 제작을 전제로 한 디지털 녹음으로 한 만큼 매우 깨끗하고.
물론 아마오케라는 존재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드러난다. 레스피기나 토야마 곡 같이 목관이나 금관에 수준급의 기교를 요하는 곡에서는 음정이 불안하게 흔들리거나 뭉개지는 경우가 많고, 차이콥스키 곡에서도 목관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선율 부분에서 악기들의 조율이 잘 되지 않았는지 맥놀이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지휘자인 타카세키의 해석인지, 아니면 아마추어 연주자들에 대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표제음악 스타일인 차이콥스키와 레스피기 두 작품에서 요구되는, 악상의 굴곡을 강조하는 극적인 면모도 좀 부족해 보인다.
와세다향의 상업 음반은 이후에도 한 장 더 제작되었는데, 1986년 음반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열린 2009년 3월 8일의 공연 실황 일부가 이듬해 유니버설 뮤직 일본 지사에서 발매되었다. 타나카 마사히코의 지휘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 와 베버의 오페라 '오이리안테' 서곡, 쇤베르크 편곡의 바흐 푸가 E플랫장조 세 곡이 수록되었다는데,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다. 이 실황은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로도 방영되었다고 하는데, 베를린 필 외의 악단이 저 스트리밍 서비스로 중계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 2010 Universal Music LLC
여력이 되면 저 음반도 질러보고 싶기는 한데, 돈도 없고 토호쿠 대지진과 뒤이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악재가 발생한 터라 어떻게 될 지 불투명한 상태다. 어쨌든 이번에 지른 것 만으로도 포스팅 몇 개는 더 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