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로 써도 될걸 굳이 영어 갖다붙여 '뉴타운' 이라고 하고 있는 서울시 재개발 정책이 부동산 투기와 난개발을 유발시킨다는 반대 여론에 부딪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애초부터 저 정책 뿐 아니라 디자인 가이드라인 같은 정책까지도 매우 고깝게 보고 있는 나로서는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데, 이 과정에서 어떻게든 피해를 입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아무튼 하왕십리 쪽도 이 계획에 들어가 기존의 집과 건물 대부분을 헐어버린 상태다. 잡초만 무성한 공터가 된 것이 몇 년 전인 것 같았는데, 그 공터 한 켠에 아직도 헐리지 않은 채 영업하고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왕십리던 상왕십리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냥 걸어갔다.
온라인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나름대로 유명한 집인지, 네이뷁이나 당므 같은 유명 포털 사이트들에도 가게 이름을 치면 약도가 뜰 정도였다. 물론 매스컴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나로서는 인터넷의 온갖 소문과 총평에 설레일 정도는 아니라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가볼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일단 청계8가 사거리에서 청계천 하류 쪽으로 꺾어 비우당교까지 오니 다시 오른쪽으로 트는 골목이 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골목 안은 어느 교회 공사장과 아직 본격적인 시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공터 뿐이라 '과연 여기에 있으려나?'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하지만 공터의 차양막에 걸린 자그마한 간판은 분명 그 집이 이 근처에 있고, 아직 영업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바로 화살표 방향으로 몇 걸음 옮겨보니 허름한 건물과 간판이 보였다.
오후 3시 반 쯤이라서 사람은 뜸한 편이었고, 주차 공간으로 쓰는 것 같은 공터도 텅 빈 상태였다. 일단 아래 짤방에 난 길의 왼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겉보기에도 매우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단층집이었는데, 영업은 둘째 치고 사람이 있기는 한가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봤다. 마침 종업원 분들이 어중간한 점저를 들고 있었고, 아마 리어카 행상 일을 하는 것 같은 두 노부부가 해장국을 한 그릇씩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메뉴판. 한자로 세로쓰기한 가격부터가 눈에 띄고, 그 밑에 '24시간 영업합니다' 라는 문구도 보인다. 메뉴판 윗쪽에는 식재료 원산지도 표시되어 있었는데, 쇠갈비찜은 거세한우를, 나머지 쇠고기나 그 부산물도 한우를 쓴다고 되어 있었다. 추어탕에 들어가는 미꾸라지도 국내에서 양식한 것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표기가 진짜라면 가격대가 꽤 저렴한 편이었다.
여럿이 간 것도 아니고 혼자였던 데다가 술마실 생각은 없었으니 내게 해당되는 메뉴는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일단 미리 점찍어둔 코렁탕설렁탕(5000\)을 시켰다.
주문하자마자 상에 깔린 밑반찬들. 별로 맵지 않아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맛인 배추김치와 깍두기다. 다른 곳과 달리 국물이 많은 것도 눈에 띈다.
수저통, 냅킨통과 후춧가루(맞나?)가 든 양념병. 소금과 고춧가루가 든 양념통은 오른편에 있었다. 24시간 영업이라는 크나큰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애연가들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을 금연 지시도 보인다.
왕십리 뉴타운 개발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주방에서 밥을 육수에 토렴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받은 설렁탕. 파가 수북해 내용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간을 맞추기 위해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이리저리 저어 보니 겉보기부터 만만찮은 모습이었다. 겨우 5000원이라는 가격임에도 고깃점들이 꽤 수북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것도 개인적으로 쫄깃한 식감 때문에 굉장히 좋아하는 젤라틴질이 삼겹살의 비계처럼 잔뜩 붙어 있는 편육들이었다. 국물은 약간 맑은 편이었고.
일단 고기 씹는 맛 부터 매우 만족스러웠는데, 싱거워 보이는 김치와 깍두기랑도 궁합이 잘 맞았다. '젠장, 왜 이리 늦게 찾아온 거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이제 여기 남아 있을 나날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포장도 해주는지, 해장국 포장해 달라고 찾아온 아저씨도 있었다.
아직 봄인데도 거의 장마삘로 비가 퍼붓던 바로 다음날에 두 번째로 찾아갔는데, 이번에는 해장국(5000\)을 시켰다. 메뉴판에 그냥 해장국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대체 무슨 종류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사골 육수에 된장을 약간 풀고 삶은 선지가 주가 되는 선지해장국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큼직한 선지 덩어리들과 흐물흐물하게 푹 익은 배추가 사실상 건더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 외에는 비계 한 조각이 같이 들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선지 자체에 환장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인상부터 좋게 느껴졌고.
들은 바로는 이 집 선지는 물을 타서 농도를 조절하지 않고 생선지 그대로를 삶아 사용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지는 몰라도 숟가락으로 뜰 때의 감촉이나 입에 넣고 씹을 때의 식감도 꽤 무겁고 두꺼웠다. 심지어 숟갈로 끊어서 먹으려고 해도 잘 끊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맛이나 냄새도 여타 선지보다 좀 더 진하고 강한 편이었고.
선지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먹기 고역이겠지만, 일반적인 부산물도 잘 먹는 편인 나로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다만 한창 뜨거울 때 마구 입에 처넣어서 그랬는지 다 먹고 나니 입천장이 마구 까지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가게 바로 앞에 보이는 공터. 멀리 교통안전공단과 수많은 아파트들이 보인다. 뉴타운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고는 해도, 아마 이 공간도 머지 않아 마찬가지로 아파트와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찬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이런 시공을 초월한 듯한 분위기도 느끼지 못할 테고.
어쩌면 맛 보다는 이런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다만 분위기는 변해도 이런 맛을 계속 즐길 수 있다면 어디든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일단 먹으면서 들어본 바로는 이전 장소도 마장동 축산물시장 근처에 미리 잡아 놓았으니 5월 말 쯤 옮긴다고 하는데, 아마 내가 독일로 가는 것과 동시에 옮겨지게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