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몇 시간 뒤면 이체에(ICE) 편으로 뒤셀도르프에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그리고 다음날(일요일) 아침에 공항에서 타이페이를 거쳐 나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줄 비행기를 타게 된다. 5월 말에 출국해 11월 말에 귀국하게 됐으니, 거의 반 년을 외국에 머무른 셈이다. 외국 체류 경험이라고는 단기 여행까지 포함해 전무했던 내게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을 지도 몰랐던 계획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위축된 채로 지냈다.
하지만 대략 두 달 지나서부터는 문법 두서가 여전히 안맞고 단어 선택도 어색하기는 했지만 독일어로 일상 대화는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고, 여기도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익히 들어온, '서비스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라던가 '아프면 고생하는 나라' 라는 편견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느끼기도 했다. 특히 유학 초반 치질로 추정되는 항문 질환 때문에 병원에 두 차례 갔다온 것이 화근이었다.
다행히 치료는 되었고 보험 처리했으니 더 이상 비용 부담은 없겠지 했지만, 하필이면 체류가 한 달도 남지 않은 11월 초에야 추가비용 청구서가 도착한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덕분에 TestDaF 시험 끝나고 잠깐이나마 뒤셀도르프 밖으로 놀러가 볼까 했던 계획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어학 공부에 치이고 살다 보니 주말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는 것도 못내 아쉽다. 그나마 일본의 날(Japan-Tag) 행사에 같은 층에 사는 일본인과 대만인, 중국인과 함께 참가해 나름대로 짜릿한 토요일 밤을 즐겼던 것이 기억에 남을 따름이다.
그리고 체류 기간 절반을 넘은 뒤에는 클로스터슈트라세 거리에 있던 일본 라멘집 나니와(Naniwa)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점심 메뉴로 라면과 밥 종류를 시켜먹으며 '동양 음식' 에 대한 갈증도 풀었고. 다만 한국 음식점은 MSG 떡칠하네 양과 질에 비해 너무 비싸네 하며 악평이 많아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래도 한국 식품점에서 김치나 두부 사다가 먹으면서 한국 음식에 대한 욕구 불만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사실 떠날 때도 가족들이 음식 안맞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지 고추장이며 멸치, 김, 누룽지, 율무차 등을 빵빵한 캐리어 가방에 우겨넣어줄 정도였지만, 막상 독일 와서는 별로 먹지도 못하고 그냥 룸메이트들에게 줘버렸다.
이미 한국에서도 서구식 식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굳이 고국의 음식만 찾으며 향수병에 젖어들기 보다는 독일 아니면 먹어보지 못할 것들을 (가능한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먹어보자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진한 맛의 초콜릿과 자파 케이크, 쇼코크루아상, 다양한 과일 맛의 저지방 요구르트, 커리부어스트와 포메스(감자튀김), 구수하면서도 강렬한 맛의 알트비어는 정말 못잊을 것 같다.
독일인들 기준으로 얼마나 잘한다고 여겨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 악단인 뒤셀도르프 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 두 번,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곳 음대인 로베르트 슈만 호흐슐레의 교향악단 연주회 한 번 해서 세 차례의 관현악 연주회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이채로운 경험이었다. 심지어 세계초연작도 들어볼 수 있었고, 말러의 '대지의 노래' 도 흔히 공연되는 알토-테너 독창이 아닌 바리톤-테너 독창판으로 들어보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고.
다만 마지막으로 보려던 공연은 협연자로 내정되었던 바리톤 토마스 크바스토프가 후두염 악화로 출연을 취소한 데다가, 윗층 룸메이트가 신장 질환으로 쓰러졌다고 해서 문병가는 바람에 결국 고스란히 놓칠 수밖에 없었고. 크바스토프의 출연 취소로 바뀐 1부 프로그램이었던 말러 교향곡 10번의 아다지오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 모두 여지껏 공연장에서 들어본 적이 없던 곡들이라 더욱 아쉬웠다.
시험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어려웠고, 어쩌면 내년에 또 한 번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음대에서 석사(Master) 과정에 요구하는 등급이 낮은 편이라 최저점만 받아도 입학 요건이 충족되지만, 시험 점수는 시험 점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서 대학을 다닐 경우에도 또 독일어 실력이 발목을 잡을 것이 뻔하다. 결국 내가 독일에서 무엇을 계속 원하고 추구하는 한 독일어는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테니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이 쯤 오니 오히려 영어보다 편하고 이제 되레 영어를 못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무교인이지만 여기서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가는 것도 좀 아쉽다. 이미 뒤셀도르프 아카덴 앞에는 아이들을 태우고 경쾌하게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감자지짐, 글뤼바인, 소시지, 군밤, 렙쿠헨, 당과류, 크레페 등을 파는 노점들이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이제 내게 시간은 얼마 없다. 그저 가족과 지인들 선물로 바움쿠헨이랑 초콜릿 몇 개 싸들고 가는 데 만족할 수밖에. 아무튼 별 탈 없이 귀국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독일 왔을 때만큼의 짐을 또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하기 때문에 추가 수화물 요금을 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여전하다. 소포로 미리 캐리어 가방을 부치려고도 해봤지만, 병원 치료비로 90유로가 확 나가 버리니 그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타격이었다.
사진기라던가 폰카 기능 있는 휴대폰이라도 가져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많았다. 언제 또 이 도시에 올 지 모르는 일이라, 사진으로라도 내가 반 년동안 머문 이 도시를 기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학원에서 같은반이었던 학생들과 찍은 사진도 있으니 그걸로라도 만족하고 싶다.
아무튼 이제 다시 한국으로 가게 되니 기대 반 아쉬움 반인 상태인데, 정치적으로 꽤나 거지같은 일이 벌어져서 어수선한 분위기라고 하는 데도 여전한 집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일단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한 순대국이며 짜장면 같은 먹거리도 즐겨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시차피로 문제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겠지만. 반 년동안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고 또 흥미롭게 만들기도 했던 독일이여, 다시 찾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