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태주의' 는 굳이 현대사에서 최악으로 치달은 나치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훨씬 전부터 태동되기 시작해서 나름 (개볍신이기는 하지만) 논리를 갖추고 유럽 사회에 출몰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종교개혁자로 유명한 마르틴 루터나 철학자 요한 고틀리브 피히테도 반유태주의 발언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고. (바그너는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어쨌든 저 유서깊은(???) '주의' 를 정치 마케팅에 철저히 이용한 것이 나치였고, 그 주의를 '홀로코스트' 라는 철저한 실천에 옮긴 것도 나치 휘하의 친위대를 비롯한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의 탄압은 비단 살아있던 사람에 한하지 않고 과거의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멘델스존이나 오펜바흐, 발트토이펠, 말러, 쇤베르크, 바일, 아이슬러 등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와 녹음, 음반 발매가 일체 금지되었던 것이었는데, 나치는 이들 작곡가들의 음악을 '퇴폐음악(Entartete Musik)' 이라고 칭해 (엿먹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전시회까지 열며 선전에 열을 올렸다.
물론 이미 타계했거나 해외로 망명한 인물들이야 차라리 나았다고 치더라도, 그러한 기회를 잡지 못했거나 여타 상황정세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인물들의 인생사는 절대 다수가 비참한 결말로 끝났다. 특히 독일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을 망명처 혹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가 2차대전 발발로 인해 점령국인 겸 유태인으로 발각된 인물들은 거의 예외없이 게토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 했고.
나치는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령국에도 유태인이나 집시,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 등 '공적' 으로 규정한 이들을 착취하고 박멸하기 위해 강제수용소를 수백 군데 설치했는데, 체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부터 요새 도시로 유명했던 테레진의 경우에는 나치가 요새를 강제수용소로 용도변경하기 비교적 수월했다고 하는데, 1940년에 점령지가 되자마자 친위대가 곧바로 증축 계획을 실행에 옮겨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이하 테레지엔슈타트)' 를 설치했다.
테레지엔슈타트가 유태인 위주 수용소가 된 것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 총독에 부임하면서였는데, 하이드리히는 반제 회의에서 유태인 절멸 계획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수용소 부근에 거주하던 체코인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각지의 중소규모 수용소나 게토에 억류되어 있었던 유태인들을 테레지엔슈타트로 끌고 왔다.
테레지엔슈타트 억류 유태인들의 생활도 다른 억류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열악했으나, 그들은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휴식 시간이나 밤에 몰래 종교 집회를 열거나 여타 문화 행사를 주관할 정도로 상호간의 결속력을 과시했다. 악기를 몰수당하고 억류되어 있던 음악가들도 비밀 합창 모임을 결성했고, 이들은 소리굽쇠나 하모니카 등 외부로부터 밀반입이 용이한 작은 악기나 도구들을 입수해 기악 연주도 조금씩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비밀을 유지하려 해도 이러한 활동이 수용소 감시병들이나 소장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는데, 처음에는 이러한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도 했지만 이후 이것을 오히려 장려해 일종의 '기만 술책' 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의 현악기와 (다리가 없는) 그랜드 피아노, 아코디언 등이 반입되었고, 연주 경험이 있는 이들은 이 낡은 악기들을 가지고 연주회를 열기 시작했다.
나치의 유태인 탄압에 관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전유럽에 확산되자, 국제 적십자 위원회에서는 그 진상 조사를 위해 1943년에 나치가 만든 게토나 강제수용소의 운영 실태를 관찰하기 위한 조사단을 보내겠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고도의 통제국가였던 나치 독일에서 조사단의 역할이나 성과에 대해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독일 측은 적십자의 발표를 받아들여 그들을 테레지엔슈타트로 초대했다.
이 '외부 손님들' 을 위해 테레지엔슈타트에서는 대대적인 '위장 작업' 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살풍경이었던 수용소의 대대적인 환경 미화와 편의 시설 건립이 신속히 진행되었고, 대장간이나 구두 수선장, 직물 작업장 등도 최신 설비를 갖춘 곳으로 보이기 위해 갖가지 설비가 반입되었다. 숙사도 마치 여관처럼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었고, 실내악과 합창 모임에 참가한 음악가들에게도 나름 신경쓴 강당 등의 연주 무대가 준비되었다.
이러한 사전 정리 작업 결과 적십자 조사단의 눈에 비친 테레지엔슈타트는 '수용자들의 기본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 비교적 안락한 곳' 으로 인식되었고, 이것을 기록 영화로 만들어 더더욱 완벽하게 기만하기 위한 작업까지 진행되었다. (이 기록 영화는 수감자였던 유태인 배우 쿠르트 게론의 손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결국 미발표 상태로 10여 분의 필름만 남아 있다.)
그러나 적십자 조사단이 떠난 뒤, 나치는 이내 다시 본색을 드러내 테레지엔슈타트에 억류되어 있던 유태인들을 그 곳보다 더 악랄한 신규 수용소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 이송된 이들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거나 고된 노동과 고문, 생체실험 등으로 극한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위장 작업에 동원된 예술인들 또한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대부분이 수용소 생활 중에 목숨을 잃었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 나름대로 창작 활동에 열성을 보인 인물들로 야나첵의 제자였던 파벨 하스(Pavel Haas, 1899-1944)와 한스 크라자(Hans Krása, 1899-1944),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빅토르 울만(Viktor Ullmann, 1898-1944), 알로이스 하바의 제자였던 기데온 클라인(Gideon Klein, 1919-1945), 드보르작의 제자였던 루돌프 카렐(Rudolf Karel, 1880-1945) 등이 있었다. 이들 중 하스는 게론이 촬영한 필름에서 자작곡이 수용소 현악 합주단의 연주로 공연되는 장면도 잡혀 있었고. (참고로 지휘자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카렐 안체를이었음)
이들 역시 비밀리에 작곡 활동을 재개했는데, 피아노는 고사하고 오선지와 연필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종이나 거기에 무언가를 그려 남길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동원해 창작에 몰두했다. 루돌프 카렐의 경우 약 240 조각의 휴지와 몽당연필, 숯조각 등을 사용해 오페라 한 곡을 완성했고, 여타 작곡가들도 수용소 물자 창고 등에서 몰래 빼돌린 기록용지나 필기구를 사용해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수용소 측에서 예술 활동을 선전책으로 양성화하면서 오선지와 필기구가 정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연주가 되던 안되건 간에 계속 창작에 몰두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용소의 열악한 악기 상태나 악단 규모에 맞춘 실내악이나 합창곡, 가곡, 피아노곡 등 소규모의 것이었고, 작품을 출판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창작 활동은 힘든 수용소 생활 속에서 마지막 위안이었고 자신들의 긍지였기 때문에, 가능한한 많은 작품을 쓰고 공연하고자 하는 욕구는 계속되었다. 작곡자들이 적십자 조사단의 방문 후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분류되어 아우슈비츠 등으로 압송된 뒤에도, 악보는 동료 음악인들의 손으로 몰래 사보되거나 자필보를 숨겨놓는 등의 노력으로 꽤 여러 종류가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홀로코스트의 처참한 실상이 보도되면서 세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음에도, 가해국이었던 독일에서는 (물론 일본 보다는 철저했다고 해도) 과거의 죄상에 대한 고발이나 단죄 보다는 경제 재건을 중시하는 소위 '원점(Nullpunkt)' 정책이 정치판을 주도하게 되었다. 비참한 과거를 들먹이며 자조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물질적 풍요 속으로 도피하고자 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에 좌파 언론인들이 나치 부역자들의 행태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소식을 보도하면서 조금씩 수정되었다.
종전 50주년이 가까웠던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국 음반사인 데카(Decca)에서 나치가 주창했던 '퇴폐음악' 이라는 단어를 반어적으로 사용한 시리즈의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는데, 메이저 음반사에서 나치에 탄압당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소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물론 저 시리즈에도 테레지엔슈타트 활동 작곡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었는데, 하스와 크라자, 울만의 오페라와 기악곡 등이 녹음되어 음반화 되었다.
데카 외에도 여러 음반사들이 나치 시기의 유태인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서서히 음반화하기 시작했는데, 독일의 오르페오(Orfeo)도 '무지카 레디비바(Musica Rediviva)' 라는 부제를 사용해 여러 장의 CD를 발매했다. 그 중에 케이스 뒤쪽 속지가 날아간 상태였던 것을 신촌기차역 근처 중고음반점에서 3900원이라는 가격에 입수했고.
ⓟ 1994 ORFEO International Music GmbH
음반에는 테레지엔슈타트 작곡가들로 분류되는 하스와 클라인, 울만의 작품과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 1894-1942)의 작품이 같이 들어 있는데, 연주는 네 작곡가 모두의 출생지이기도 한 체코의 대표 관현악단인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독일인 상임 지휘자 게르트 알브레히트(Gerd Albrecht)의 지휘로 맡았다.
나치의 체코 점령 이전에 쓰인 슐호프의 교향곡 제 2번(1932)은 작곡자가 극단적인 다다이즘의 영향에서 벗어나 재즈와 신고전주의를 지향하던 시기의 작품인데, 전체 연주 시간이 20분도 안되는 간결함과 명쾌한 악상, '재즈 풍의 스케르초(Scherzo alla Jazz)' 로 주기된 3악장의 폭스트롯과 탱고풍 리듬 등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테레지엔슈타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슐호프도 프라하에서 바이에른의 바이센부르크에 있던 뷜츠부르크 강제수용소로 압송된 뒤 작곡을 계속 했는데, 결국 그 곳의 강제 노동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하스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습작(1943)' 은 위에 언급한 쿠르트 게론의 필름에 연주 장면의 일부가 담겨 있기도 한 곡인데, 야나첵의 제자임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모더니즘과 체코 민속 음악의 요소가 꽤 적절히 융합된 형태의 작품이다. 이 곡의 총보는 분실되었지만, 1991년에 파트 악보들과 게론이 촬영한 필름의 연주 단편을 참고해 루보미르 페두치(Lubomír Peduzzi)가 복원했다. 다른 테레지엔슈타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하스도 적십자단 방문 뒤 아우슈비츠로 압송되었고 그 곳의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세 번째 수록곡은 클라인의 '현을 위한 파르티타' 인데, 1944년에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작곡된 현악 3중주가 원곡이다. 하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라비아 지방의 민속음악 어법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작품인데, 현재 알려진 클라인의 완성작으로는 최후의 것이다(여기에 수록된 현악 합주판은 1990년에 보이텍 자우덱(Vojtěk Saudek)이 편곡한 것임). 클라인은 작품 완성 뒤 불과 2주일 남짓 후 아우슈비츠를 거쳐 그 부속 수용소인 퓌르스텐그루베로 압송되었고, 그 곳의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마지막으로 울만의 교향곡 제 2번이 담겨 있는데, 이 곡은 클라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1944년작인 피아노 소나타 제 7번을 베른하르트 불프(Bernhard Wulff)가 1989년에 관현악 편곡해 교향곡화한 작품이다. (불프는 이후 1993년에 피아노 소나타 제 5번을 '나의 청년 시절로부터' 라는 제목의 교향곡 제 1번으로 관현악 편곡해 발표하기도 했다.) 울만은 쇤베르크의 무조나 음렬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수용소에서는 일반 청중들을 의식해서였는지 다시 조성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바흐의 이니셜을 딴 B(Bb)-A-C-H(B) 동기나 호이베르거의 오페레타 '오페라 무도회' 의 인용, 후스 교도의 찬송가와 독일 코랄의 의도적인 대결 구도 설정도 집어넣고 있는데,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가장 의욕적인 창작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양적인 두각 외에도 독일의 그릇된 민족주의와 나치즘을 은유적으로 공격하는 대범함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울만 역시 위의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1944년 가을에 아우슈비츠로 압송되었고, 하스와 크라자가 살해당한 이튿날 역시 그 곳의 가스실에서 생애를 마쳤다.
데카와 오르페오의 대대적인 시리즈물 외에도, 최근에는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테레지엔슈타트 작곡가들의 광범위한 노래나 기악곡들을 수록한 '테레진-테레지엔슈타트' 라는 CD를 발매했다. 음반 작업 외에 공연 활동도 체코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데, 악보도 출판되고 있으니 머지 않아 한국에서도 저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클로드 토레의 '테레진 음악가들' 사이트 (프랑스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의 상세 정보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슐호프도 메인 페이지의 왼쪽 위에 있는 붉은 바탕의 '퇴폐음악 전시회' 포스터를 클릭하면 따로 정리된 페이지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