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솔로에 무교인이라 크리스마스 이브니 크리스마스니 하는 것도 내게는 그냥 지나가는 나날의 연속일 뿐인데,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는 휴일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서코 갔다오는 길에 오랜만에 용사의 집 양식당에서 돈까스 좀 썰어볼까 해서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기가 연말이라는걸 깜빡 했는데, 양식당은 어느 전역자 단체가 잡은 망년회 일정 때문에 휴업한다고 되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배는 고프고 해서 어디서 좀 채울 수 있으려나 생각을 해봤는데, 집에서 지하철 정거장으로 한 정거장 쯤 거리에 있는 순대국집으로 가봤다. 이렇게 해서 귀국 후 가장 많이 입에 댄 음식은 순대국이 되었다.
가게는 6호선 약수역 7번 출구로 나와서 왼쪽 골목으로 돌아가다 보면 왼편에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골목임에도 큰길과 매우 가까워서 접근성은 좋아보였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동네 순대국집으로 보였는데, 여기도 뭔가 '마케팅 전략' 인지 뭔지 나름대로 유명하다는 연예인들의 사인지를 가게 벽에 붙여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이 꽤 많아서 어쩔 수 없이 합석을 해야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가게 내부는 주방과 식사 공간 사이에 벽이나 칸막이가 없이 탁 트인게 특이했는데, 문 바로 앞에서는 고기나 내장, 순대를 분주하게 썰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양념과 밥을 담아내고 설거지를 하느라 부산한 모습이었다. 다만 육수를 끓여 토렴하는 커다란 솥은 밖에 내놓고 있었는데, 이런 점에서는 낙원상가 옆의 여러 순대국집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식탁 차림새도 여느 순대국집과 별다를 바 없었다. 다만 깍두기나 새우젓을 옹기 그릇에 담아서 손님들이 먹을 만큼 덜어먹을 수 있게 한 것은 마치 설렁탕집 같은 모양새였다.
각각 깍두기와 새우젓을 담아먹도록 내오는 접시와 종지.
주문한 순대국이 나왔다. 가격은 순대국 치고는 꽤 고가인 7000원이었는데, 그 외에는 술국(12000원)과 안주(15000원) 정도가 전부였다. 안주는 아마 머릿고기나 부속물, 순대 종류를 썰어서 내오는 것 같았는데, 어차피 술 빨러 온 것도 아니었고 여럿이서 가서 시켜야 경제적이니 그냥 지나쳤다.
곱게 간 들깨와 송송 썬 파가 올라가 있는 것은 여느 순대국과 비슷한 모양새였는데, 특이하게 풋고추 송송 썬 것도 고명으로 들어가 있었다. 약오른 풋고추에 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골라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일단 속는 셈 치고 그냥 먹기로 하고 휘휘 저어 섞었다.
그릇 밑에 다대기가 잠겨 있었는지, 젓다 보니 국물 색이 발갛게 변했다. 속에는 토렴한 밥과 순대 몇 점, 머릿고기, 오소리감투 등이 들어 있었는데, 이런 점도 평범해 보였고. 다만 끓일 때 나름대로의 기술이 있는지 돼지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고, 오돌뼈 붙은 부위들도 부드러운 편이었다. 순대와 고깃점들의 양도 나름대로 푸짐한 편이었고.
우선 순대와 고기들을 건져 새우젓에 찍어먹으면서 국밥을 비우기 시작했는데, 다대기 양념이나 풋고추 모두 예상 만큼 심하게 맵지는 않아서 몇 술 뜬 뒤에는 큰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이 집의 유일한 단점으로 여겨진게 깍두기였는데, 담글 때 설탕 등 감미료를 많이 쓰는 편인지 굉장히 달달한게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단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후식이나 과자가 아닌 음식을 지나치게 달게 만드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많이 덜어놓지 않았던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깨끗하게 비웠다. 비워낸 그릇을 찍고 있자니 식당 아주머니가 '왜 빈 그릇을 찍고 계세요, 손님?'이라고 살짝 짖궃은 어조로 물어보았다. 히죽거리며 '다 먹은거 인증하는 거에요'라고 대답하니 말없이 쿡쿡 웃으신다. 여기 순대국이 양이 엄청 많아서 다 못먹고 남긴 사람도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나한테는 지난 번 어떻게든 비워내려고 그야말로 개고생했던 승혜네 떡볶이 건처럼 지독하게 많은 것도 아니어서 아무 문제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비록 지나치게 달았던 깍두기 때문에 좀 켕기기는 했지만, 순대국 자체는 가격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맛도 괜찮았고 잡내나 지나친 기름기도 없어서 사람이 많이 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뒤에도 몇 차례 먹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점심이나 저녁 시간대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밖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언제 쯤 다시 먹어볼 수 있으려나.
그리고 크리스마스 다음날에는 꽤 특이한 맛의 막국수를 한 그릇 비워냈는데, 그건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