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에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도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미미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것도 지방 도시에서 이렇게 오래 존속되고 있는 음악제는 정말 드물기 때문에라도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주된 레퍼토리는 현대음악이라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방한하는 연주자들이나 연주 단체가 고전 레퍼토리만 가지고 공연을 하기도 하고, 당대 악기와 연주 관습을 재현하는 정격연주 단체도 중세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곡들을 연주하러 오기도 하고, 또 창작 국악을 연주하는 무대도 마련되는 등 음악제의 스펙트럼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다만 올해의 경우, 물론 음악제 측에서 노골적으로 강조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 음악제의 키워드 중 하나라고 볼 수밖에 없는 '윤이상' 에 대해 전년도부터 소위 보수 진영에서 종북주의자라는 문제를 가지고 태클을 걸기 시작하면서 다소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 잡음은 통영 시내에서 '간첩 윤이상의 기념사업을 중단하라' 는 내용의 피킷을 가지고 시위를 진행하던 어느 어르신의 존재로 확인할 수 있었고.
동족간의 전쟁이 한 차례 크게 있었고, 그 여파로 이념 논쟁에 있어서는 어느 나라도 따르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 되고 있는 한국에서 이 문제는 그리 풀어내기 간단치 않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때마침 국회의원 선거도 있어서 시내에서 유세 중인 후보들의 공약 사항을 눈여겨 봤지만, 저 어르신이 소망하는 윤이상 기념사업(과 통영국제음악제의) 중단을 내건 후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위에 쓴 대로, 음악제는 10년 동안 이어져 오면서 계속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윤이상의 발자취는 여전히 짙게 각인되어 있지만, 이 음악제에 참가하는 모든 공연 단체들이 반드시 윤이상 작품을 연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음악제를 기회로 그 동안 이 도시에서 공연할 일이 없어 보였던 해외의 쟁쟁한 연주자들이나 연주 단체들이 통영을 찾아와 공연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영국제음악제가 통영시와 경상남도의 음악 생활 전반에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좀 더 나아가 내 견해를 밝히자면, 애초에 정치선동적 행사가 발붙이기 힘든 음악제에 대해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중단하라는 것부터가 별로 먹힐 수 없는 태클로 보인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정명훈의 서울시향 상임 지휘자 급여 문제나 KBS 교향악단-함신익-KBS의 내분에서도 보이는 경향인데, 진보나 보수를 떠나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인 영역으로 끌고 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명훈과 KBS향에 관한 문제들을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이들이 윤이상 기념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측과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바램대로 윤이상 기념사업과 통영국제음악제가 중단된다면? 일단 음악제를 위해 찾아오던 외지인들의 발길은 당연히 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 통영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서 음악 활동을 펼친 다른 인물에 대한 기념 사업이나 음악제?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통영 출신 작곡가로 기념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거나 '국제' 음악제를 개최할 정도로 나라 밖에서까지 명성있는 다른 인물은 없다.
요컨대, 뭔가를 없애고 싶다면 그것에 대한 댓가를 충분히 각오하던가, 아니면 그것을 없앤 뒤 확실히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내놓고 주장하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음악제 없애자, 지휘자 바꾸자, 운영 주체 바꾸자는 식으로 가열차게 주장하기에는 이 사회가 그리 단순하고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소한' 1인 시위 외에 이 음악제에 대한 태클은 아직까지 없는 상황이고, 나도 그에 구애받지 않고 마지막 3일 동안의 음악제를 충분히 즐기고 올 수 있었다. 내가 본 공연은 다음과 같았다.
27일: 나이트 스튜디오 2-켈러 현악 4중주단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
마음 같아서는 23일과 25일 두 차례 있었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먼저 보고 싶었다. 타케미츠 토루 이래 국제 무대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는 호소카와 토시오의 신작과, 오스트리아의 신예 타악기 주자 마틴 그루빙어의 연주가 정말 끌렸기 때문인데, 그러자니 체재 기간도 연장될 뿐 아니라 티켓 값을 감당하기에도 무리가 있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나마 욕구를 최대한도로 줄여서 처음 선택한 공연이었는데, 아무래도 공연이 공연이다 보니 밤 10시에 시작해서 자정이 거의 다 되도록 진행되어 집중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내 옆에서 공연을 보던 어느 영국인 혹은 미국인 관객은 1부도 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졸다가 나가버렸고.
하지만 그 때까지 이미 '저녁형 인간' 이었고, 무엇보다 예전에 부산까지 내려가 악보를 복사해온 윤이상의 현악 4중주 제 1번의 연주를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기회라 피곤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런저런 문헌에서 언급된 것처럼 버르토크 벨러의 영향과 한국 민요 등 전통음악의 향취가 섞여 있었는데, 다만 김순남처럼 거기서 전위적으로 나가는 경향은 없었고 전체적으로 듣기에 편한 곡이었다. 물론 윤이상 자신은 그 작풍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실상 초기 습작으로 여겨 작품 목록에서 제외했다고 하지만 말이다.
연주 단체인 헝가리의 켈러 4중주단도 아마 이 점을 노렸는지, 공지된 연주곡의 순서를 바꾸어 1부에서 위의 윤이상 곡과 버르토크의 현악 4중주 5번을 연주해 두 곡을 비교 청취할 수 있도록 했다. 버르토크 작품도 실연으로 처음 들어본 사례인데, 항상 느끼지만 버르토크 작품은 들을 때마다 뭔가 좋은 의미로 자극제가 되고 있다.
2부에서도 공연 순서가 바뀌어서, 원래 맨 처음 연주될 예정이었던 쿠르탁 죄르지의 '안드레에 제르반즈키를 위한 성무일도' 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9번이 연주되어 공연을 끝맺었다. 매우 짧은 곡들이 단편적으로 연주되는 식으로 구성된 쿠르탁의 작품은 물론 이 날 연주된 곡들 중 가장 최신곡이었고 또 난해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거나 지루해 죽을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여타 쿠르탁 작품들보다 더 단순해 보였다.
'라주모프스키' 세트의 마지막 곡인 베토벤 작품도 내가 실연에서 처음으로 들은 베토벤 4중주라는 점에서 꽤 기대했는데, 한 밤 중의 공연이고 맨 마지막 곡이라 그랬는지 합주력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모습이 노출되어 좀 아쉬웠다. 어떻게 보면 막판에 대중적인 환호를 이끌어 내기 위한 선곡이 아닌가 싶었는데, 사실 이 곡도 베토벤 당대에는 버르토크, 아니 쿠르탁 만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으니 그런 관점에서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28일: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
한국에서 유일하게 창작 국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위해 창단된 단체가 저 악단인데, 물론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들 외에 외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작품의 연주도 하고 있다. 이 날 공연에서는 총 일곱 개의 작품이 연주되었는데, 이 공연에서도 몇 곡들의 연주 순서가 변경되었다.
1부 첫 곡이었던 미국 작곡가 루 해리슨의 '무궁화 새당악' 과 2부 끝 곡이었던 백병동의 '운악' 을 제외하면 지휘자 없는 실내악 스타일의 작품들이 연주되었는데, 창작 국악들인 만큼 기존 국악 작품들에서 보기 힘든 연주법이나 악기의 조합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있었다.
다만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는데, 강효지의 '향취' 는 녹음된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거나 장고 대신 정악에 쓰는 타악기인 어를 대신 쓰고, 연주자들이 손뼉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어찌 보면 해프닝스러운 아이디어를 써서 처음에는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을 너무 늘어뜨리고 장황하게 만들어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였다.
논산 상여 소리를 소재로 했다는 나효신의 '새벽빛' 도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고 대금과 비슷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다른 '법금' 이라는 관악기가 들어가서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상여 소리로 이끌어 가던 초반부와 중반부에 이어 갑자기 전위적인 후반부가 이어져서 작품이 뭔가 두 갈래로 심하게 끊겨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해프닝스러운 몸짓이나 여타 리액션을 자제하면서도 실제로 연주자가 물그릇에 손을 넣어 물소리를 내거나 발로 밟아 북면의 장력을 조절하는 독특한 장고, 작곡자가 직접 연주한 산조아쟁의 다양한 음색과 주법 등으로 난해하면서도 드라마틱한 구조를 갖고 있었던 김남국의 '부벽준' 이나 일본판 알파벳송인 '이로하 노래' 를 소재로 하되 가사의 의미 보다 음성학 개념의 발음 표현에 신경을 쓴 마츠미야 케이타의 '이로하' 가 좀 더 자연스럽고 진지해 보였다.
29일: 폐막공연-베아트 푸러의 음악극 '파마(FAMA)'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현대음악 쪽에서 올해 음악제의 중심 축은 확실히 스위스 출신의 푸러와 일본 출신의 호소카와 두 작곡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공연을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고, 전날 오후 네 시에 윤이상기념공원 메모리홀에서 푸러 자신이 직접 저 음악극-엄밀히 하자면 소리극(Hörspiel)-에 대한 강연을 했을 때도 참가했다.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푸러의 독일어 설명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됐는데, 다만 프로그램 노트와 푸러 자신의 설명 사이에 차이점이 있었다.
푸러 자신은 강연에서 '전자 음악 뿐 아니라, 마이크로 들어가 앰프로 걸러져 스피커로 나오는 일체의 전자 음향을 배제하려고 했다' 라고 설명했지만, 정작 프로그램 노트에는 '...첫 장면은 음산한 전자 음향으로 이루어진...' 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작곡자이자 이 공연에서 직접 지휘까지 한 푸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이번 음악제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런 엉성한 프로그램 노트 편집과 공연 정보의 미비함이었다.
원래 초연 때는 무대 위에 또 하나의 방을 만들어 그 속과 바깥에서 나오는 음향의 대조나 조합을 실험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지 따로 방을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처음에는 청중석 바로 앞의 오케스트라 피트 쪽에서 연주하고 노래한 악단과 성악가들이 공연이 진행되면서 차츰 무대로 이동하며 연주했다. (다만 무대 양옆에 위치한 타악기 주자들은 아무래도 악기 이동이 힘들어서였는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계속 공연했다.)
일부러 성악가가 아닌 무대 배우로 설정한 주역 여배우인 올리비아 그리골리도 처음에는 악단에 섞여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풍의 낭창조 낭독을 하다가, 무대 바깥으로 나와 왼쪽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잊혀질 즈음 다시 낭독을 시작하더니 무대 위로 올라와 에바 푸러가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플루트와 일종의 듀엣으로 어우러졌다. 그리고 상자가 없어진 대신 오케스트라 피트와 무대 사이의 차단막에 추상적인 그래픽을 비춰주며 관객들의 상상력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래 악단에 푸러가 창단한 오스트리아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인 클랑포룸 빈(Klangforum Wien)을 섭외하려고 했지만, 섭외 비용이 음악제 예산을 초과하는 관계로 대신 앙상블 TIMF에 클랑포룸 빈의 멤버인 에바 푸러와 아코디언 주자 비비안 샤소, 소프라노 가수들인 페트라 호프만과 엘렌 포셰르, 그리고 배우 그리골리 정도만 불러왔다고 한다.
확실히 난해하기는 했지만, 이 작곡가가 평소 보여준 공간 이동에 따른 음향 변화나 언어와 악기 음색의 다양한 조합 등에 관한 집요하리만한 관심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폐막 공연에 걸맞는 축제 분위기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 음악제에서 현대음악의 최신 조류를 보여주며 마무리한다는 기본 컨셉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공연과 세미나만 참석한 것은 아니었고, 통영에 갈 때마다 그랬듯이 쳐묵쳐묵이라던가 생각치 않았던 레어템의 입수 등 깨알같은 이벤트들도 있었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