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국악관현악이라는 형태로 연주되는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북한처럼 나라에서 강제로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더라도, 기존 전통악기를 크게 개량하지 않고 쓰는 데다가 서양관현악의 그것을 모방하는 모양새이면서도 악기군 사이에 나타나는 심각하게 불균형한 음량 등 여전히 산적한 과제가 많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관점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다만 한국의 국악계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과거만 중시하는 어리석은 모습 일색은 아니고, 또 그러한 관념을 뒤집어 제한된 전통악기 위주로 편성하더라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미덕을 추구하고 끄집어내는 작품들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로 전통음악에서는 종묘제례악 같은 정악, 창작음악에서는 김희조와 김대성의 작품을 시작으로 국악관현악 혹은 그에 준하는 형태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아무래도 전통음악에서는 지금의 국악관현악에 해당되는 개념의 음악이 극히 적었던 탓에, 많은 국악관현악단들은 지금도 창작 연주곡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국립극장 전속 악단인 국립국악관현악단도 이러한 창작 연주곡 모집과 보급 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국가브랜드 공연' 이라는 꽤 거창한 타이틀과 컨셉을 잡고 시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도 포함되고 있다.
물론 이 공연 사업이 너무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생각보다 해외에 국가브랜드로 지니는 가치가 낮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는데, 우선 들어나 보자 하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가 옥션 중고장터에 이 국가브랜드 공연 중 창작관현악 네 편을 공모해 진행한 공연의 실황 DVD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당 DVD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07년 10월 13~14일 이틀 동안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최한 공연 실황을 녹화한 것이었고, 공연 제목은 '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 였다. 이 공연은 실제로 그 당시에도 가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솔깃한 구석이 많았는데, 우선 그 동안 주로 서양악기를 위한 작품만을 써온 재독 작곡가 박영희가 처음으로 국악관현악곡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범훈 곡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곡들의 지휘를 그 동안 서양관현악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던, 현재 울산시향 상임 지휘를 맡고 있는 재일교포 지휘자 김홍재가 맡아했던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물론 이보다 예전에도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지휘자로 등장한 정치용을 통해 서양관현악 전문 지휘자가 국악관현악 공연을 능란하게 이끈 사례를 직접 보기도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새롭고 신선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공연 곡목을 개괄해 보면 이랬다.
-1부-
박영희: 온 누리에 가득하여,... 비워지니...
김영동: 화엄
박영기(불교성악)/선불(宣佛) 남성합창단(불교합창 및 독경) 협연
-2부-
박범훈: 신맞이
김덕수(장구 및 지휘)/서경욱(무가 및 춤)/전영랑(무가)/중앙음악극단(무가 합창) 협연
나효신: 태양 아래
공연 관련 홍보 자료들에서는 네 곡이 각각 한국을 대표하는 네 종교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박영희는 도교, 김영동은 불교, 박범훈은 한국 토속 무가 신앙, 나효신은 기독교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갈지 말지 갈피도 못잡고 있다가 결국 공연은 끝났고, 그 이후 잠시 잊은 채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 공연의 DVD가 제작되었다는 소식은 또 다른 의미의 신선한 충격이었고, 착불 택배비 2500원을 포함해도 만원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물론 이러한 설레임이 곧장 영상물을 보았을 때의 감흥으로 언제나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쉽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 (Years unknown) The National Theater of Korea
아마 국립극장 측에서 공연 후 관계자들이나 공연에 초청된 외국 대사 등 '높으신 분들' 에게 홍보용으로 돌린 비매품 DVD 같았는데, 그 때문에 비매품 치고는 비교적 깔끔한 디자인의 외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외관과 달리 속은 어땠을까.
우선 제작진 소개를 보니 Art TV에서 '예술무대' 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촬영한 영상을 쓴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 영상을 영상작업공간 '틀어' 에서 편집하고 서울음반(현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것이 이 DVD라고 되어 있다. 물론 텔레비전 중계 프로그램을 그대로 DVD로 만드는 것이야 다른 비매품 영상물도 마찬가지라 그리 생경하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그 영상의 만듦새였다.
특히 가장 기대하고 틀어본 첫 곡 박영희의 영상에서 심각한 결함이 보였다. 영상 편집 과정의 실수인지 촬영 혹은 중계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영상과 소리 모두가 튀고 씹히는 곳이 너무 많았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마치 버퍼링 걸린 것 마냥 연속으로 끊기며 재생되는 부분까지 있었는데, DVD 뒷면에 심한 흠집이라도 난거 아닌가 봤지만 뒷면은 새것 마냥 아주 깨끗했다.
비교적 정상적인 나머지 곡들의 영상도 뭔가 괴이한 편집과 카메라 워킹으로 가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영동의 작품은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상이 편집되었고, 그나마 양호한 편인 박범훈과 나효신의 곡들은 전체 영상에서 골고루 나타나는 고질적인 난점인 어설픈 카메라 워킹으로 뒤덮여 있다.
어느 곡에서든 주선율을 연주하거나 두각을 나타내는 악기는 영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찾더라도 그 대목이 이미 지나간 뒤인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연주를 쉬고 있는 연주자라던가 하는 쓸데없는 장면도 자주 잡혀서 정말 계획없이 급하게 만든 티가 많이 났는데, 중계한 방송국은 Art라는 이름은 달고 있을 지언정 영상은 Art라고 하기에는 좀 심히 미숙했다.
영상 프로듀서까지 리허설에 악보를 들고 나와서 음악의 진행에 따른 카메라 워킹과 편집을 세세히 계획/조정하는 외국 방송국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영상이 음악과 합일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 것이 공연 중계다. 하지만 이 영상은 국가브랜드 공연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원대한 사명에 비해 너무 대충 만든 티가 심하게 나고 있다.
프로그램 노트도 집필한 사람이 며칠 동안 국수만 삼시 세끼 먹었는지 심히 국수적이었는데, 박영희의 프로필 소개에서 자행한 "...유럽에서는 영희 박-파안(Younghi Pagh-Paan)을 모르면 문화인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유명하다." 라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펴지질 않는 개드립이 특히 압권이었다. 대체 몇 억명을 비문화인으로 돌리려는 어그로야
그나마 곡에 대한 설명은 작곡가의 것을 그대로 썼는지 한결 나았지만, 각 작곡가에 대한 소개글은 아무리 띄워주기 위한 의도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이고 유치할 정도였다. 발편집된 영상에서, 그리고 국수타령하는 프로필에서 2중으로 수모를 당한 박영희 선생 지못미.
그렇다고는 해도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박영희의 작품이었다. 물론 국악관현악이라고 해서 특별히 전통 가락이나 장단을 쓰지 않고 자신만의 어법을 밀고 나갔기 때문에 연주하고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힘들었다고 하지만, 국악관현악은 반드시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편견에서 탈피해 한결 자유롭게 큰 폭으로 울리는 소리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재미 작곡가 나효신의 곡도 그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작품이었는데, 다만 박영희의 곡 만큼의 임팩트는 받지 못했다. 전통 장단과 가락을 써서 보수적이기 때문...이라는건 훼이크고, 작곡자 자신이 설정한 의도와 그것이 실제로 무대에 구현되는 상황을 비교해 봤을 때 뭔가 괴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작곡자는 지휘자에게도 특별히 특종과 특경, 북, 박 같은 타악기를 연주하도록 했는데, 지휘자가 지휘하면서 타악기도 연주하는 모습은 처음 보기에는 신기해 보여도 곡이 진행되면서 뭔가 굉장히 어수선하고 정신사나워 보였다. 악단의 타악 주자에게 맡겨도 되지 않았을까? 공간 음악의 효과를 지향했는지 곳곳에서 연주자들이 돌아다니며 나발 등을 연주하거나 하는 장면도 보기에는 신선했지만, 정작 본 공연에서는 음향 효과가 제대로 구현되었는지도 좀 의문스러웠다.
다소 전위적인 색채를 보인 박영희와 나효신 작품과 달리, 김영동과 박범훈의 경우 음악 교육을 전통음악으로 받기 시작했고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음악인들 답게 전통음악 요소에 깊게 뿌리박은 음악을 선보였다. 각각 불교의 예불과 무가의 굿을 중심 소재이자 연주 형태로 잡았는데, 평상시 국악관현악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종교 의식이나 연극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서 아마 당시 공연에서 통속적으로 가장 어필한 곡들이 아닐까 싶었다. 김영동 곡에서는 비교적 정적인 흐름 속에서 남성들이 읊는 예불 소리나 목어 같은 불교 음악 특유의 타악기들이 더하는 음색 등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그 여운을 끊어버린 괴이한 영상 편집이 웬수지만.
보는 측면에서 가장 화려했던 곡은 박범훈 작품이었는데, 통상적인 지휘자 대신 사물놀이로 유명한 국민 국악인 김덕수가 무대를 이끌며 보여주는 현란한 장고 연주 뿐 아니라 실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굿판, 거의 오르가즘까지 느끼게 하는 신들린 장단의 무속 타악 연주가 이 곡의 백미였다. 다만 그런 효과가 전면에 나오다 보니 오히려 국악관현악단 자체는 다소 공기화된 것이 좀 걸렸지만.
네 곡이 모두 창작곡이었던 만큼, 전통악기들을 기본으로 편성하면서도 색다른 악기들을 더하고 있던 것도 이채로웠다. 특히 대금 파트에는 북한에서 개량한 저대가 포함되어 있었고, 피리 연주자들도 태평소 외에 훈이나 나각, 나발 같은 정악용 악기를 연주하거나 곡에 따라 소리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일탈 편성이 허용된다는 것 자체가 창작국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묘미고, 또 그러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소리를 찾아낼 수 있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공연 무대는 다소 격식을 차리는 모습이었는데, 개량 한복을 연주복으로 삼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같은 다른 연주단체와 달리 이 공연에 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모두 서양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라 연주하고 있었다. 물론 박범훈 작품에서 등장한 김덕수와 무가 공연진들은 한복 차림이었지만.
다만 그게 오히려 내 편견인지는 몰라도 좀 위화감이 들었다. 국가브랜드 공연이라는 컨셉에서 복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양장 차림을 택해 민족성에 함몰되기 쉬운 국악 무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는지, 그 정확한 의도가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국가브랜드 공연 시리즈는 정권이 바뀐 뒤에도 계속 정책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사이에 이런저런 토론과 개선책 마련도 있었겠고, 국격이라는 단어를 유달리 선호하는 가카 때문에라도 이 공연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국가브랜드라는 개념의 정립이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사이의 균형, 미디어 보급을 위한 노력, 공연 작품 선정의 공정성과 예술성 추구 같은 실질적인 노력 없이는 그 동안 어느 성향의 정권에서든 거창하게 한 판 벌리다가 주저앉고 버로우한 이벤트성 공연들과 비슷한 말로를 걸을 수도 있다. 과연 다음에는 어느 국가브랜드 공연이 내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을까? 비판적인 시선은 유지하겠지만 또 기대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