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을 매우 좋아한다. 물론 국수나 빵, 떡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식사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적은 밥을 먹을 때 뿐이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그래서 빵 식사가 주가 되는 독일에 6개월 동안 머물 때도 길쭉하고 찰기 없는 안남미(Langkornreis)든, 생각보다 찰기는 덜하고 밥 짓기가 약간 번거로웠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상식하는 쌀과 비슷한 밀히라이스(Milchreis. 모양으로 따지면 Rundkornreis)든 간에 계속 사다가 밥도 자주 해먹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찾아간 곳도 원래는 돈까스가 저렴해서 발을 들였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바로 그 밥 때문에.
바로 여기가 이 뻘포스팅의 주제인 잠실돈까스다. 잠실이라고는 해도 롯데월드나 길쭉한 고층 아파트들이 점령한 곳과는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잡은 평범한 기사식당이었는데, 일단 삼학사길사거리 버스 정류장과 가까워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듣기로는 24시간 영업이라고 했지만, 손님이 많이 없는 새벽 시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한다고 이렇게 써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주 고객인 택시 운전사들을 위한 주차 공간이나 단속에 대한 '지침' 도 강조하고 있던 것이 이채로웠다. 물론 번화가와는 다소 떨어져 있는 곳이었던 만큼, 차가 심하게 막히는 모습은 어느 시간대에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가게 안에는 4인 탁자들이 여러 개 들어차 있었지만, 혼자 먹으러 온 사람은 한가한 시간대가 아니면 원탁으로 된 탁자에서 먹는 것이 이 집의 규칙이었다. 바쁜 시간대에는 정말 정신없이 주문과 음식이 오가는 곳이라, 물이나 배추김치, 무김치 등의 반찬은 전부 직접 따라먹고 덜어먹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이거야 여느 기사식당과 마찬가지지만...
...바로 이게 이 식당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정수기 옆의 빨간 밥통. 물론 어떤 메뉴든 밥은 기본적으로 나오지만, 이렇게 더 먹고 싶은 사람은 무한 리필을 해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스스로 밥돌이로 자처하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고, 거의 예외 없이 이 서비스를 애용했다.
다만 정수기에 써붙인 경고문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는 밥을 남기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괜히 객기 부려서 고봉밥 떠왔다가 배불러 못먹을 경우 웃돈을 주고 나올 수도 있으니, 잘 조절해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양심을 찌르는 말도 주방 쪽에 붙어 있다. 사실 집에서도 너무 아파서 식욕을 느낄 수 없거나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오이, 가지, 단호박, 생당근, 감 같은 것들을 빼면 뭔가 주어진 음식을 남긴 적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까지 찔리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 반대 급부로 푸짐한 뱃살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게 문제다.
아무튼 돈까스가 가게 이름인 만큼, 처음 갔을 때는 당연히 그걸 시켰다. 일단 메뉴판에는 돈까스와 김치찌개, 순두부와 비빔밥 네 종류가 고정 메뉴로 늘 올라와 있고, 간혹 식재료 수급 상황에 따라 햄김치찌개나 오뎅김치찌개, 선지해장국 같은 '신메뉴' 가 덧붙기도 한다.
다만 이런 메뉴는 재료가 떨어지거나 제철이 아니거나, 혹은 인기가 없을 때는 소리소문 없이 내려가는 경우가 많아서 그냥 고정 메뉴 네 종류만 먹기로 했다. 모든 음식 가격은 보다시피 4000원. 음료수와 소주, 막걸리 등의 술도 팔고 있었지만, 기사식당이라 그런지 찾는 손님은 식당 근처에 사는 어르신들을 빼면 별로 없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해 보이는 테이블 세팅. 물론 밑반찬은 셀프인 만큼 덜어먹는 그릇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뒷쪽에 케첩통처럼 보이는 건 비빔밥용 고추장.
주문한 돈까스. 물론 상상한 만큼 전형적인 한국식 돈까스였다. 고기는 생각보다 심하게 얇지는 않았는데, 가끔 튀김옷과 고기의 합체 상태가 좋지 않은지 소스에 적셔지기도 전에 튀김옷이 벗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밥!
그래서 일단 돈까스부터 다 썰어놓고, 이렇게 밥을 수북하게 덜어왔다. '돈까스에 나오는 밥은 왜 이리 적을까'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없다. 물론 밥이고 곁들이고 돈까스고 싹 비워내면서 첫 번째 메뉴 클리어.
두 번째 갔을 때는 양푼비빔밥을 시켰다. 커다란 알루미늄 그릇에 잘게 부순 김과 잘게 자른 상추, 이런저런 나물들이 달걀프라이와 같이 올라와 있는 전형적인 비빔밥 세팅이었는데, 비빔밥이라고 해서 오이 같은게 들어가나 싶었지만 옆사람들이 시켜먹는 것을 힐끔힐끔 보고 있으니 그런 '위험 요소' 가 없어서 무난하게 주문할 수 있었다.
물론 밥도 밑에 깔려 있고 참기름도 뿌려져 있고, 고추장은 알아서 뿌려먹으면 되지만...여전히 밥!
그래서 밥을 더 덜어와 고추장을 팍팍 치고 비벼서 입에 쑤셔넣었다. 역시 푸성귀만으로 먹는 밥에도 고추장과 참기름만 있으면 웬만한 고기 요리 부럽잖은 맛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체질 때문인지 매운 음식이 입에는 잘받아도 위와 장을 거치며 설사의 고통으로 가기 십상이라, 늘 조심해야 하지만.
세 번째로 택한 것은 순두부찌개였다. 해물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는데, 물론 가격대가 가격이라 내용물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하지만 펄펄 끓는 뚝배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저으며 김을 빼고 속을 들여다 보니 의외로 꽤 실했다. 순두부찌개에 없으면 허전한 영혼의 투톱인 달걀 외에도, 해물이라는 이름 답게 칵테일 새우와 굴이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특히 굴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반가웠는데, 다만 날이 풀리고 나서 다시 가서 시켰을 때는 아무래도 굴이 제철이 지났기 때문인지 대부분 바지락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김이 많이 나갔어도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에, 이렇게 밥 위에 덜어놓고 비우기 시작했다. 역시 굴과 새우는 진리. 물론 저렇게 나온 공기밥도 성에 차지 않아서, 한 번 더 덜어 먹었다. 아무튼 밥!
네 가지 메뉴 중 마지막으로 택한 김치찌개. 평범하다면 평범한 백반 메뉴로 여겨지지만, 독일에서는 이것도 반 년 동안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 물론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귀국한 후에 꽤 땡긴 것도 사실이다.
역시 김 좀 나가라고 저어준 뒤. 개인적으로 김치찌개에 빠지면 굉장히 섭섭한 두부 외에도 껍질과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이것 역시 밥 위에 덜어서 쳐묵쳐묵. 김치는 너무 설익지도, 그렇다고 심하게 시어버리지도 않아서 입에 잘 맞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격하게 맵지도 않아서 부담없이 비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추가로 덜어온 밥과 함께. 역시 밥!
메뉴들도 메뉴들이었지만, 밥에 대해서 상당한 대인배 정신을 가진 식당이라 매우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진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찰기가 없어 보이는 밥이 좀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설거지할 때 귀찮아서 된밥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도 없었다.
심지어 식당 한 켠에는 충남 서산에서 수확했다고 표기되어 있는 쌀을 포대 째로 차곡차곡 쌓아 놓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는데, 물론 한 포대에 20kg 나가는 쌀포대를 차도 없는 놈이 사갖고 지고 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여기까지 욕심을 내지는 못했다. 비록 자주 애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의 사정권에서는 벗어나 있어서 교통이 약간 불편하기는 하지만, 버스 정류장과 매우 가까워서 운이 좋으면 밥먹고 환승 할인까지 받을 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다.
이 곳 레이드(???)를 마친 뒤에는 오랜만에 대학 시절 자주 드나들던 국밥집을 다시 방문했고, 또 눈여겨 보고 있었지만 막상 가보지는 못한 또 한 군데도 들어가서 쳐묵쳐묵할 수 있었다. 두 곳 다 몰아서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