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외치는 '다문화' 라는 구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그런 행사를 통해 다른 문화권이나 나라들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체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굳이 그것까지 깔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관제 행사에 거의 참가 안하는 나도 그 먹을 것 덕분에 지난 5월 초에 진행된 '지구촌나눔한마당' 이라는 행사 말미에 슬쩍 끼여들어 여러 나라의 음식 문화를 체험한답시고 미친듯이 쳐묵쳐묵했는데, 지금 봐도 그 때 내가 정신줄 꽤 놓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행사장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 지도 제대로 몰랐고, 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음식들이 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 두서없이 먹고 마셔댔는데, 순서대로 써본다. 가격도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놨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싹 날아가 버린 바람에 기억나는게 없어서 그냥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독일 코너의 맥주. 사실 저 크롬바허 맥주는 한국에도 꽤 많이 수입되어 독일산 수입 맥주 중에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축에 속한다. 다만 뒤셀도르프에 머물 때는 라거 맥주(독일어로는 필스너 혹은 필스)보다는 그 고장 특산물 취급을 받는 에일 스타일의 알트비어나 밀맥주인 바이스비어, 엑스포트 같은 종류를 더 즐겨 마셨기 때문에, 오히려 크롬바허는 유명한데도 별로 마시질 않았다. 물론 벡스 같은 한국에서 인지도 높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였지만.
약간 미지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첨가물 이것저것 섞어서 입맛 버리게 하는 몇몇 한국 맥주나 드라이 맥주 같은 것 '따위' 보다는 훨씬 마실 만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안주도 없이 500ml짜리 캔을 비우다 보니 점점 정신줄이 풀리기 시작했다.
라거 맥주로 씁쓸해진 입을 가신다는 가당찮은 명목으로 두 번째 손을 댄 러시아 코너의 블린늬. 얇게 부친 팬케이크 혹은 밀전병에 이것저것 싸먹는 음식인데, 여기서는 약식으로 딸기잼을 발라서 주었다. 맛은...상상할 수 있는 대로 딸기잼 바른 핫케이크 맛. 사실 이것 보다는 같이 팔던 발찌카 맥주가 더 땡겼지만, 결국 포기했다.
세 번째로 쳐묵한 것은 베네수엘라 코너의 아레빠 꼰 하몽 이 께소. 옥수수가루로 반죽해 만든 빵 사이에 치즈와 얇게 저민 햄을 끼워 먹는 일종의 샌드위치였다. 갓 만든 빵에 끼워주다 보니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에 대기는 커녕 쥐고 있기도 힘들었는데, 그 열기로 치즈가 녹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먹어봤다. 물론 이것도 흔한 햄치즈 샌드위치 맛이었지만, 빵의 고소한 옥수수 내음과 맛은 꽤 괜찮았다.
그리고 과테말라 코너였나? 아무튼 가물가물하지만 거기서 입가심으로 마신 오르차따. 곡물과 견과류를 갈아 물과 섞어 만드는 음료인데, 약간 묽은 아침햇살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그 옆의 하마이까라는 음료도 궁금했지만, 이것도 결국 못마셔 봤다.
가나 코너의 쇠고기 꼬치구이와 바나나 도넛. 꼬치구이는 딱 하나 남은 것을 샀는데, 너무 구워졌는지 좀 질겼지만 그래도 매콤한 소스 덕에 먹을 만 했다. 오히려 정말 맛있다고 느낀 것이 바나나 도넛이었는데, 그렇게 심하게 달지 않으면서도 바나나향이 기분좋게 감도는 것이 한국 길거리 음식으로 팔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흔히 '지옥의 요리' 로 심심하면 까이는 영국 요리는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영국 요리였지, 어느 정도 한국식 로컬라이징(??)을 거친 것을 팔고 있는 것 같아서 영국 코너에서도 하나 사먹었다. 평범한 소시지 두 꼬치. 조금 짜기는 했지만, 다행히 '영국적' 인 맛은 아니었다.
터키 코너의 돈두르마. 터키 아이스크림이 특이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직접 먹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케밥 쪽도 땡기기는 했지만, 워낙 줄이 길었고 소시지의 소금기를 좀 없애보려고 이 쪽을 골랐다. 정말 아이스크림 장수가 사람들을 그렇게 농락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나도 속절없이 당했다.
맛은 그냥 아이스크림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아이스크림 장수가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쫀득한 특유의 식감과 잘 녹지 않는 특징 때문에 여름에도 쉽게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시지 하면 흔히 독일을 떠올리겠지만, 애석하게도 독일 코너에서 맥주 살 때 물어보니 '이미 다 팔렸어요(Es war schon ausverkauft)'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영국 코너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코너에서도 역시 먹어보려던 메밀전병인 갈레뜨 드 사라쟁(Galette de sarrasin)이 떨어졌다고 해서, 결국 여기서도 또 소시지를 먹었다.
반으로 가른 바게트빵 조각에 겨자를 바르고 작은 소시지 두 개를 끼워주는 단순한 모양새였는데, 이게 정말 프랑스 스타일 소시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코너에서 먹은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설마 같은 데서 사와서 만들었나?
아무튼 이 즈음 이미 채워넣는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절반 돌아봤을 뿐이었고, 아직 동남아시아나 중동 쪽은 가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먹어보겠냐는 식으로 또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먹은 네팔 코너의 치킨 티카와 일종의 요구르트 드링크인 라시. 원래 밥이나 다른 것도 팔고 있었다지만, 파장 분위기라 남은 건 이것 뿐이었다. 닭고기는 그 자체로도 간간해서 특별히 소스를 찍어 먹을 필요가 없었는데, 좀 짜다 싶으면 라시로 입을 가셔가며 마지막 쳐묵쳐묵을 끝냈다.
하지만 뭔가 아쉽기도 했고, 또 너무 배불러서 소화도 시킬 겸 계속 행사장을 왔다갔다 했는데, 영국 코너에서 팔던 에일 맥주에 자꾸 눈길이 갔다. 영국 맥주는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지만-구인네스기네스는 엄연히 아일랜드 맥주다-, 에일 맥주의 색깔이 뒤셀도르프에서 입에 달고 살았던(?????) 알트비어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시음도 하고 있어서 몇 종류를 마셔볼 수 있었다. 맛도 알트비어와 매우 흡사했는데, 어땠냐고 묻는 영국인에게 되도 않는 어설픈 영어로 '이거 독일의 알트비어라는 맥주와 정말 비슷한 맛이네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알트비어 자체도 독일에서 영국 에일 맥주 기술을 참고해 만든 것이니 비슷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만.
그래서 그 그리운 맛 덕분에 마지막 뽐뿌질이 발동해 한 병을 사왔다. 마셔본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든 스코틀랜드 에일인 벨헤이븐이었는데, 나중에 와서 찾아보니 영국도 독일 못잖게 맥주를 많이 마시고 특히 에일 맥주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곳이라고 했다. 다만 한국 맥주 소비량의 대부분이 라거고 나머지 맥주들은 수입 쪽으로도 찾아보기 힘든데, 특히 이 에일 혹은 알트비어는 정말 보기 힘들다. 사실 그 영국인한테도 이걸 가지고 푸념을 했고.
이렇게 돌아댕기고 나니 몇만원이 홀라당 날아갔다. 디저트고 간식이고 두서없이 쳐묵쳐묵한 탓에 결국 집에 와서는 설사크리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입의 즐거움까지 상쇄된 것은 아니었다. 행사장 구성과 음식들이 좀 중구난방스러웠고 개중에는 '정말 이 나라 음식 맞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비슷한 것들도 있었지만, 야매스럽게나마 다른 나라 음식들을 조금씩 먹어보며 어설프나마 대화도 해보고 할 수 있던 점에서 꽤 즐거운 기회였다. 특히 오랜만에 독일인들과 독일어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 그랬고.
어쨌든 다음 식충잡설은 고대 쪽에서 먹은 것 두 가지와 종로에서 먹은 김치찌개, 그리고 을지로 쪽에서 먹은 보쌈 순으로 진행될 것 같다. 아, 그리고 동물원과 짜장면 박물관 이야기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