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도로지상주의 국가다. 철도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주민들에게 혐오 시설 내지는 역 지어달라고 떼쓰는 핌피 현상의 먹잇감이며, 그 때문에 예정되었던 설계나 건설 계획도 토지 보상 문제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 공사 대금 체납 등으로 인해 종종 틀어지거나 무자비하게 지연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종합적으로 아주 잘 반영하는 수도권 광역 철도 노선이 분당선이다.
내가 아직 중딩 때였던 1990년대 중반 5호선이 개통되었을 때는 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리에서 왕십리까지 쭉 이어진 노선도가 역내에 붙어 있을 정도여서, 공사 진척도가 상당히 높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 이 '현실' 이 되기까지는 10년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강남구 '일부' 지역 주민들의 핌피로 인해 쓸데 없는 역들이 촘촘히 들어서면서 광역 전철이 아닌 지하철화 시켰다는 욕을 들어먹는 띨띨한 촌극도 있었고.
너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왕십리까지 분당선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근처에 사는 주민인 내게도 희소식이었다. 예전까지는 선릉 이서 구간을 가려면 2호선으로 빙 돌아서 가야 했지만, 훨씬 짧은 구간으로 쭉 잇듯이 건설한 분당선 구간을 이용하면 갈아탈 때의 귀차니즘은 있지만 한결 빨리 갈 수 있다.
왕십리역 분당선 승강장은 중앙선 승강장과 나란히 건설된 섬식 승강장이었는데, 아직 스크린도어 설치 계획은 없는 듯 했다. 짤방은 회송을 위해 막 문을 닫고 있는 왕십리 종착 열차.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 발차를 기다리고 있는 기흥행 열차. 갓 개통한 노선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게 속설이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물론 왕십리역이야 종착역이니 앉아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자리는 남아 있었지만.
일단 저 열차를 타고 선릉역으로 향했다. 도중에 한강을 건너기는 하지만, 서울숲역에서 왕십리역으로 올라오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하 구간으로 건설되어 있었다.
분당으로 향하는 노선이라 그랬는지, 차내에는 이렇게 문가마다 분당 지역 아파트 경매 안내 불법 광고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중에는 회수되었겠지만, 코레일 측에서 저 광고물을 붙인 경매업체를 고발했는지 벌금을 먹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번 개통된 구간에서 최고의 병신력 작명 센스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압구정로데오역. 영어 표기부터 죄다 붙여놓아서 압구정로데오로 읽는지 '압구전그로데오' 로 읽는지 뭔지부터 헷갈리고, 경마공원이나 대공원 처럼 이 역 근처에 로데오 경기장이 들어서지 않는 한 이미지도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걸 따지자면 왜 소위 번화가에 이미지와 하나도 맞지 않는 로데오 운운하는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해서부터 딴지를 마구 걸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열차는 7호선과 맞닿은 강남구청, 차후 9호선과 연결될 선정릉역을 거쳐 계속 달렸다.
그리고 선릉역 도착. 여기만 역명판 바탕이 기존의 베이지색이라 연륜차(??)가 느껴졌다.
이렇게 새 노선을 편하게 이용했겠구나 싶겠지만, 이제부터는 까는 대목이다. 개통하고도 며칠이 지났지만, 일단 뚫어놓고 세세한 건 나중에 수습하자는 식의 '빠진' 관행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직도 종착역 간판을 떼지 못해 종이로 땜빵해놓은 왕십리 방면 행선 안내. 하지만 영어 안내는 전혀 없어서, 한국어를 못하거나 서투른 외국인들은 좀 헤맸을 것 같기도 하다.
왕십리 방향 스크린도어의 역명 안내판. 다음 역인 선정릉 표기? 그런 거 없었다.
선릉으로 올 때는 구형 열차를 탔는데, 노선도에 새로 개통된 구간이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왕십리로 돌아갈 때는 신형 열차를 탈 수 있었는데, 이 열차에는 이렇게 갱신된 노선도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노선도에서도 아직 개통이 안된 기흥 이서 구간에는 개통 예정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아서, 수도권 전철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망포행 왜 안오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듯 하다.
그리고 기존 개통역인 선릉역 외에 모든 역의 종합안내도는 이렇게 앗카링~투명화된 상태였다. 이것도 개통과 동시에 다 갖춰놓고 있어야 정상인데, 아무리 코레일과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막장이라고는 해도 '역 새로 뚫어놨으니 손님들은 알아서 찾아가라' 는 식의 호갱 대접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 구간을 마지막으로 이용한게 10월 19일이었는데, 그 때도 종합안내도는 마찬가지로 이렇게 훌륭한 백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네이뷁이나 당므 등 포털 사이트의 지도 갱신이 더 빨랐으면 빨랐을 테니, 코레일에서 정신 차리지 않는 한 스마트폰 이용자만이 새 개통 구간의 선구자가 될 것 같다.
왕십리역 승강장의 선릉 방향 행선지 표시도 이상한 건 매한가지였다. 분명 뚫려 있는 구간은 기흥 까지지만, 저기서는 선릉과 죽전 두 역만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저렇게 종이로 가려놓은 상태였는데, 제대로 만들었다면 죽전 대신 기흥 혹은 올해 말에 개통될 예정인 망포를 넣어야 했던 게 정상이었다. 행선지 표시판 제작을 발주한 업체가 분당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는지 뭔지.
이렇게 공사 자체는 완료되었어도, 편의성 면에서는 날림 개통이라고 밖에 평가할 수 없는 답사를 끝냈다. 아무리 한국의 철도 공사 완료일이 들쭉날쭉이라고는 해도, 적어도 개통 몇 달 전부터는 해당 구간의 시운전도 시작되고 역 내외부 마무리 공사도 진행되는 만큼 그 때부터는 노선도나 안내도의 제작이 병행되어야 하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도 제대로 못해서 개통 뒤에도 승강장에 공구들이 굴러다니고, 처음 내린 손님은 역 정보가 없어서 우왕좌왕하고, 새 구간이 뚫렸는 지도 몰라서 기존의 구간을 돌아서 가는 해프닝이 계속되는 건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작태다. 기차 타면 소나무 몇 그루 심는 효과가 있다고 철도의 친환경적인 면을 선전하기 전에, 그 기차를 타는 고객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또 새로 개통되었다는 7호선 온수~부평구청 구간도 아직 가보지는 못했는데, 여기는 과연 어떨 지 모르겠다. 그래도 운영 주체가 코레일이 아닌 도시철도공사니까 기본적인 개념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