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딩 시기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해 이런저런 것을 배우고 익히고 느꼈던 시절이었는데, 전역 후 복학한 뒤로는 휴학 없이 곧장 학사 일정을 다 채우고 졸업했기 때문에 꽤 바쁘고 정신 없던 시절이었다. 학점을 채우려고 별의별 교양 수업을 다 신청했는데, 그 중에 '재즈음악의 이해' 라는 수업이 있었다.
물론 그 때까지도 내 주 전공은 클래식이었고, 재즈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혹은 '소 닭 보듯 하는' 정도에서 별로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학점 사냥에 정신이 팔려 등록한 이 수업이 내 음악관과 취향을 꽤 많이 바꿔놓았다.
강의는 현역 재즈 드러머라고 자신을 소개한 윤상필이라는 분이 진행했는데, 물론 전문적인 전공 수업은 아니었으므로 재즈의 기본적인 이론이라던가 블루스 형식, 중요한 재즈 아티스트들과 전반적인 흐름 위주의 다이제스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수업을 들으면서 그 다이제스트의 사이사이를 메꾸고 싶었고, 그래서 제임스 링컨 콜리어라던가 유이 쇼이치 등의 재즈 관련 서적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짬짬이 읽고 이 분야의 명저라는 요아힘 베렌트의 '재즈 북' 까지 손을 댔다.
그러면서 재즈 음반과 음원도 이것저것 들어보게 되었고, 수업 과제 중 하나인 재즈 공연 감상 경험도 하면서 다방면에서 이 음악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덕분에 수업이 끝날 무렵에 나는 재덕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즈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업 후에도 강사분의 공연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 강사분의 예명은 필 윤(Phil Yoon)인데, 1988년에 '이데아' 라는 헤비메탈 밴드의 드러머로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해 이후 김창남이 이끄는 '김창남의 도시로' 의 멤버로 공연과 방송 출연, 음반 녹음을 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이력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고, 내가 아는 필 윤이라는 아티스트는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재즈 드러머로 변신한 재즈 아티스트였다.
유학 후 몇 년 동안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뒤에는 필 윤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리더 활동을 비롯해 여타 국내 뮤지션 밴드의 사이드맨, 대학 강사 또는 교수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미 2007년에 첫 리더 앨범인 'E.J.' 를 한국 EMI 레이블로 발매했다고 한다.
ⓟ 2007 Phil Yoon / MOG Interactive
이 앨범이 내가 구입한 최초의 국내 재즈 뮤지션 음반이 되었는데, 도니 매카슬린(Donny McCaslin, 테너/소프라노 색소폰)과 조지 콜리건(George Colligan, 피아노), 요하네스 바이덴뮬러(Johannes Weidenmüller, 베이스)가 참가한 4중주(쿼텟)로 2006년에 뉴욕에서 녹음한 음반이었다. 앨범 제목인 E.J.는 존 콜트레인 밴드의 드러머로 유명한 엘빈 존스(Elvin Jones)의 이니셜인데, 실제로 강의에서 필 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재즈 드러머가 루이 벨슨, 맥스 로치와 엘빈 존스였다.
이들 중 피아니스트 콜리건은 예전에 포스팅한 찰스 밍거스의 '묘비명' 2007년 리바이벌 공연에도 참가했기 때문에 꽤 익숙한 이름이었고,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는 등 현지에서 꽤 잘나가는 뮤지션으로 여겨진다. 매카슬린과 바이덴뮬러도 각각 영문 위키와 독문 위키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의 이름값을 가지고 있어서, 수준급 사이드맨들을 대동하고 진행한 세션임을 알 수 있었다.
수록곡 대부분은 이미 원스 인 어 블루문과 클럽 에반스, 올댓재즈 등지에서 있었던 재즈 클럽 공연을 통해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곡이라 생경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즈 하면 흔히 짝수 박자 위주라는 통념을 깨듯 5박이나 7박 같은 홀수 박자 혹은 혼합 박자로 되어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 리듬을 갖는 곡도 있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Nardis와 지그먼드 롬버그의 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 같은 기성 재즈 넘버들도 상당히 모던한 느낌으로 편곡해 싣고 있다.
여기에 진도 아리랑과 한오백년 같은 한국 민요들도 재즈 편곡 버전으로 포함되어 있고, 타이틀 곡인 E.J.를 비롯한 필 윤의 자작곡과 그와 자주 협연하고 있는 베이시스트 송우영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아우르는 구성이다. 강의 말미에 현대 재즈의 조류는 다양한 리듬과 템포의 변화라고 강조한 것을 스스로 보여주는 느낌의 앨범인데, 약 5년 뒤인 2012년에 두 번째 솔로 앨범이 발매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 2012 BIC Music
사실 이 정보는 앨범이 아닌 다른 데서 얻었는데, 후술할 책 'Jazz and the City' 의 소개문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 2011년에 모친상을 당한 뒤 어머니에게 헌정한다는 의미에서 'Reminiscences of Mom' 이라는 타이틀을 붙였고, 1집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름의 타이틀 곡도 수록되어 있다. 사이드맨은 1집과 똑같이 매카슬린, 콜리건, 바이덴뮬러였고, 이번에도 스튜디오는 다르지만 뉴욕에서 녹음했다고 되어 있다.
이 2집에서는 자작곡의 비중이 더 확대되었는데, 첫 수록곡인 빅터 펠드먼의 Joshua를 제외하면 나머지 일곱 곡이 모두 자작곡이었다. 물론 Joshua도 기존의 짝수 박이 아닌 홀수 박으로 편곡되어 상당히 색다른 느낌이고, Bull's Eyes는 이 앨범이 나오기 전에도 라이브 무대에서 꽤 자주 연주해서 코러스가 낯익을 정도로 기억에 남은 곡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수록곡도 앨범을 구입하기 전에 미리 접할 수 있었는데, 예술 전문 채널인 아르떼 TV의 수목 콘서트에서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개최한 것을 웹 스트리밍 녹화 방송으로 볼 수 있었다. 직접 가서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고 아직 VOD로 나오지 않아서 언제 쯤 반복 감상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Bull's Eyes를 제외한 모든 앨범 수록곡이 연주되었기 때문에 이 앨범의 프리뷰로 적당한 공연이었다.
아르떼 공연을 본 뒤 2집과 함께 'Jazz and the City' 를 인터넷으로 구입했는데, 저 책은 여행 전문 채널인 채널T의 4부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사진과 함께 엮은 일종의 여행 서적이었다. 2집 녹음도 이 프로그램 제작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는데, 이전까지는 저 다큐멘터리의 정체는 고사하고 채널T라는 방송국 자체도 아예 모르던 터라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 2012 Phil Yoon / Broadcasting Team of 'Jazz and the City', Channel T
책은 다큐멘터리 순서대로 뉴올리언스와 시카고, 보스턴, 뉴욕을 한 챕터 씩 담고 있는데, 이 중 보스턴의 경우 사실 재즈 역사의 큰 줄기에서는 좀 중요성이 덜한 도시지만 필 윤의 모교이기도 했고 중요한 재즈와 실용음악 교육 기관인 버클리 음대가 있기 때문에 선정된 것 같다. 문체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여행기인 만큼 비교적 간결하고, 심지어 'ㅋㅋㅋ' 같은 초성체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걸 재미있다고 볼 지 경박하다고 볼 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하겠지만.
여행 다큐였기 때문에 재즈의 역사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 보다는 이들 도시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레전설들의 발자취라던가 재즈 교습 장면, 재즈 클럽의 공연이나 축제, 재즈 댄스나 재즈가 곁들여진 교회의 예배 등 현재 미국 사회에 녹아 있는 재즈의 모습 자체를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도시마다 한 번씩 나오는 특산 음식 맛보기 같은 위꼴사 코너도 있다
호스트인 필 윤 자신이 재즈 뮤지션이라 즉흥 잼 세션을 비롯해 실제 공연 장면도 담고 있다는데, 이런 건 책 보다는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로 직접 봐야 제맛일 것 같다. 근데 다큐 다시보기 VOD 서비스 같은 건 왜 아직 안되는 건가...lllorz
이렇게 갑툭튀한 음반과 공연 방송, 책 덕분에 2012년 한 해의 마지막 포스팅을 재즈로 마무리했다. 지구 멸망 설레발은 끝났고 이제 2013년인데, 먹어가는 나이와 저질임을 실감케 하는 체력, 앞이 보이지 않는 장래 등으로 점점 회의적 혹은 냉소적 인간이 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주어진 삶이니 뭔가 격변을 기대하며 계속 살아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