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 취주악단들의 상호 교류와 연주 활성화를 위한 국제 단체로 WASBE(World Association for Symphonic Bands and Ensembles)가 있는데, 이 단체에서는 정기적으로 'WASBE 컨퍼런스(WASBE Conference)' 라는 명칭으로 취주악 페스티벌과 워크숍, 세미나를 열어 각국의 취주악단들이 교류하도록 하고 있다. 이 행사에서 특히 자주 보이는 악단들은 미국과 독일, 영국, 중국, 일본, 대만 등의 악단인데, 한국 악단의 경우 두 번의 참가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행사의 모든 공연 실황이 미국의 마크 커스텀 레코딩 서비스라는 녹음 전문 회사에 의해 녹음되어 음반/음원으로 발매되고 있는데, 당연히 저 참가 기록도 모두 들어볼 수 있다. 다만 이 물건 자체가 행사의 기록에 치중하는 사가반 성격이라, 연주곡에 대한 해설은 일체 없고 참가 단체의 프로필 정도가 속지 내용의 전부라 취주악 입문자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물건이기도 하다.
1999년의 제9회 WASBE 컨퍼런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개최되었는데, 주최국인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독일, 스위스, 일본, 한국의 취주악단 총 아홉 개 단체가 참가했다. 한국 대표로 참가한 취주악단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크누아 윈드 앙상블(KNUA Wind Ensemble)이었고, 지휘는 동교 취주악 담당 교수이자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이기도 한 서현석이 맡았다.
서현석은 원래 트럼펫 전공으로 시작해 지휘로 전향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첫 지휘봉도 취주악단인 서울 윈드 앙상블에서 잡았고 첫 음반도 마찬가지로 같은 단체와 만들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린나이 콘서트 밴드와 공동으로 SKC에서 낸 음반은 지난 포스팅에서 쓴 바 있다.
사실 크누아 윈드 앙상블은 이 음반 외에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의의 사가반 형태로 여러 장의 음반을 낸 바 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국립예술자료원에 대출 가능 형태로 소장되어 있어서 나도 이들 음반으로 처음 연주를 접했다. 하지만 본격적 상업 음반/음원 형태로 낸 음반은 이것이 유일하고, 한국에서도 관악도가 아니면 이 음반의 정체도 모르는 형편이다.
1999년 WASBE 컨퍼런스에서 크누아 윈드 앙상블이 선곡한 곡은 다음과 같았다.
보리스 코제프니코프 (Boris Kozhevnikov, 1906-1985): 교향곡 제3번 '슬라브 풍'
이건용 (1947-): 상주 모심기 노래에 의한 변주곡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환상곡과 푸가 G단조 BWV 542 (취주악판. 편곡자 불명)
필립 스파크 (Philip Sparke, 1951-): 극장 음악 (Theatre Music)
얀 판 데어 로스트 (Jan Van der Roost, 1956-): 교향시 '스파르타쿠스'
아리랑 (취주악판. 편곡자 불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 BWV 147 중 코랄 '예수는 나의 기쁨 속에 계십니다(Jesus bleibet meine Freude)' (취주악판. 편곡자 불명)
각각 구 소련(러시아), 영국, 벨기에 작곡가들인 코제프니코프, 스파크, 로스트는 일반인들에게 지명도가 낮지만 취주악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들이고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바흐의 오르간 작품 편곡과 한예종 작곡과 교수이기도 했던 이건용의 곡을 추가했는데, 이건용의 곡은 앨범에 단순히 '한국 농부 선율에 의한 변주곡' 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저 곡이 맞다.
스파크의 곡은 한예종 사가반에 들어 있어서 미리 접했지만, 나머지 곡들은 모두 처음으로 접하는 곡이라 생소한 레퍼토리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대부분 통속적인 맛이 느껴지는 곡들이었고, 특히 코제프니코프의 교향곡과 로스트의 교향시가 상당히 드라마틱하고 박력있게 연출되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크누아 윈드 앙상블의 WASBE 컨퍼런스 참가는 2013년 현재도 저 행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또 다른 한국 취주악단이 등장하기까지는 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WASBE의 제12회 컨퍼런스는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는데, 개최국 싱가포르 외에 미국, 캐나다,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홍콩, 일본, 대만, 한국의 밴드 총 12개 단체가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해군군악대가 당시 군악대장이었던 박준형 중령의 지휘로 참가했는데, 이 때의 선곡은 이랬다.
김정길 (1933-2012): 제24회 올림픽 팡파르
김정길: 취주악단을 위한 축전 서곡
마크 캠프하우스 (Mark Camphouse, 1951-): Watchman, Tell Us of the Night
로버트 W. 스미스 (Robert W. Smith, 1958-): Rising Dragons
김은혜 (1956-): 새야 새야 파랑새야 주제에 의한 변주곡
황성호 (1955-): 해군 환상곡 '황해'
한국 민요 연곡 (제임스 커노 편곡)
크누아 윈드 앙상블과 달리 한국 작곡가 작품의 선곡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는데, 다만 미국의 취주악 전문 작곡가들인 캠프하우스와 스미스의 곡은 각각 15~16분에 이르는 대곡들이라 전체적으로는 미국과 한국 작품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쓰인 팡파르를 비롯해 한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취주악 작품을 여럿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음반인데, 스미스의 곡도 부제가 'Yi Sun Shin: A Call to the Sea' 라서 한국의 이순신과 임진왜란 해전을 염두에 둔 곡으로 여겨진다.
다만 미국인으로서 접할 수 있는 한국의 이미지와 음악이 좀 이상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가장 '깨는' 곡이었는데, 특히 플루트가 중간에 연주하는 독주 악구는 대금이 아닌 샤쿠하치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질감이 심했다. 차라리 존 반스 찬스의 아리랑 변주곡 같이 뚜렷한 한국 선율에 의한 곡을 선곡했으면 더 모양새가 괜찮았을 텐데.
해전이 동기가 되어 작곡된 또 하나의 작품이 황성호의 환상곡이다. 앨범에는 단순히 'Sea Fantasy' 라고 되어 있지만, 서해교전 때 전사한 한국 해군 장병들에게 헌정된 추모곡이다. 중간에 몽금포타령 등의 민요가 인용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어둡고 전투적인 느낌의 곡이라 작곡 동기를 모르면 좀 알쏭달쏭한 곡일 듯 보인다.
하지만 이 2005 WASBE 컨퍼런스를 끝으로 어느 한국 취주악단들도 이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예산 부족이나 역량 부족 등의 문제가 가장 클 것 같은데, 관악기라는 악기 자체가 아무래도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할 수 없는 만큼 취주악도 그 발전과 성장세가 현악기나 피아노 같은 분야에 비해 다소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국제적인 행사에 참가하고자 하는 의지-모 걸그룹의 그 볍신같은 의지 말고-의 부족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두 종류의 음원은 그나마 한국의 취주악계가 세계 무대에서 연주를 보여준 보기 드문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비록 하룻 동안의 실황이 그대로 녹음된 것이라 종종 덜컹거리는 연주력이 보여지는 점이 아쉽지만, 이런 음원 조차 구하기 힘든 게 현실이니까.
그리고 아마 이 즉흥적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물건이 일본에서 주문한 세트 두 종류다. 이 세트는 이미 이전에도 포스팅한 바 있고, 또 냉소적인 내용이 될 것이라는 예고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