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월에 구입한 2집과 3집에 이어 올해 중순에 나머지 1집과 4집을 모두 구입해 저 시리즈를 완전히 입수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때 만큼의 감흥은 없었는데, 수록곡에서 좀 매력이 떨어진 것과 제작 상의 난점이 심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롬 뮤직 파운데이션의 1집 소개 페이지: 클릭
-CD 1- (일본인 음악가 국내 녹음 1)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신교향악단/야마다 코사쿠
(일본 콜럼비아 55011~4. 1935년 녹음)
일본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남긴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다. 당시 신교향악단은 코노에 히데마로가 지나친 독선과 공금 유용 등의 문제로 쫓겨난 상태였고, 그에 따라 예전에 코노에와 맞짱뜨고 버로우탔던 야마다가 다시 악단과 관계를 회복한 뒤 상임 지휘자는 아니었어도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하고 있었다. 이 녹음 세션에서는 이 곡 외에도 슈베르트의 교향곡 8(7)번도 녹음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발매 상태다.
음질은 그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꽤 좋은 편인데, 다만 악단의 연주 수준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일단 코노에와 로젠스톡 사이의 과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한데, 특히 관악 파트의 기량이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이하게 1악장의 반복은 그대로 살리고 있으면서 3악장 중간부의 반복을 생략하고 있고, 3악장과 4악장 사이 이행부의 경우 음반이 바뀌는 과정에서 너무 음량 차가 커서 좀 벙찐 인상도 있다.
프란츠 폰 주페: 오페레타 '시인과 농부' 서곡
신교향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2067 & 일본 콜럼비아 27928 (재발매). 1933년 녹음)
코노에 재임기의 신교향악단은 물론 말러 교향곡 4번의 세계 최초 녹음 같은 대규모 녹음 프로젝트도 진행했지만, 역시 그 당시 SP의 용량 문제와 악단의 미숙한 기량 때문에 주로 소품 녹음에 주력했다. 이 녹음은 코노에의 재임 후반기에 제작되었는데, 여타 녹음과 마찬가지로 수록 시간에 맞추기 위해 후반부에서 몇몇 대목이 생략되어 있다.
음질은 당시 일본 파를로폰의 여타 녹음들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경박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연주도 빈 음악의 우아함을 살리기에는 좀 떨어지는 편이다. 다만 이 녹음을 주시한 건, 초반부의 첼로 솔로를 당시 악단 수석 첼리스트였고 이후 지휘자로 전향한 사이토 히데오가 맡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포이어만의 제자로 촉망받는 첼리스트였지만 이상하게도 솔로 연주 녹음은 독주곡이나 협주곡을 포함해 거의 없는데, 그런 점에서 귀한 녹음으로 여겨진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 '예술가의 생애'
신교향악단/사이토 히데오
(일본 콜럼비아 29885. 1938년 녹음)
마찬가지로 소품 녹음이지만, 그래도 로젠스톡이 2년 전 전임 지휘자로 부임한 뒤 악단을 바짝 조이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기합이 들어간 모양새다. 사이토는 아직 수석 첼리스트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악단의 부지휘자 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지휘자로 남긴 몇 안되는 녹음 중 하나다. 역시 많은 반복이 생략되어 있지만, 주페 서곡처럼 아예 한 대목이 통째로 생략된 부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극음악 '에그몬트' 서곡
주오 교향악단/하야카와 야자에몬
(센트럴 3517. 1936년 녹음)
지금은 도쿄에 거점을 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직계 전신이 저 주오 교향악단이었는데, 주오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본거지는 나고야였다. 이 녹음도 나고야의 로컬 음반사인 센트럴에서 제작했는데, 영세 업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녹음 뿐 아니라 SP의 품질도 매우 좋지 않다.
심한 잡음이 거슬리는 건 둘째 치고, 1934년 무렵 개발된 신녹음 기술도 도입하지 못했는지 거의 전기 녹음 초반기를 연상케 한다. 주페 서곡과 마찬가지로 중간부 경과구가 수록 시간 때문에 삭제되어 있다. 연주도 좀 안습인데, 구티나는 현악 프레이징은 둘째 치고 관악기의 존재감이앗카링~공기가 된 게 가장 심각한 문제다.
-CD 3- (일본인 음악가 해외 녹음)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스페인 기상곡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관현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17055~7. 1931년 녹음)
후술할 4집의 베토벤 교향곡 1번과 함께 코노에가 해외에서 제작한 첫 녹음이자, 동시에 일본 지휘자가 해외 관현악단을 지휘해 취입한 첫 녹음으로 기록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독일 파를로폰 본사가 아닌 일본 지사의 단독 기획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아 있는 얼마 안되는 SP 음반도 모두 일본 지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전기 녹음 초창기의 것이라 소리가 다소 시끄럽고 건조하게 들리는데, 그래도 연주와 녹음 상태 모두 베토벤 교향곡보다 훨씬 낫다. 복각을 담당한 엔지니어인 아타라시 타다아츠가 해설서에 악장이 연주한 바이올린 독주의 음색이 좋다며 크레모나산 바이올린을 쓴 것 같다고 주절대고 있는데, 저 양반은 딱히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쓸데 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CD 4- (일본인 작품 1)
와타나베 우라토: 교향 모음곡 '야인'
도쿄 교향악단/만프레드 구를리트
(일본 빅터 A4313~4. 1941년 녹음)
까기 위해 들은 녹음. 제10회 일본 음악 콩쿠르 작곡 부문 1등상 수상작인 곡인데, 당시 시국이 시국이었던 탓에 일본 군국주의 이념의 진한 병맛이 녹아든 곡이기도 하다. 물론 표제에서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작곡자 자신의 곡 해설 중 3악장에서 '날이 잘 선 일본도로 일격에 적을 베는 모습을 표현했다' 는 언급을 했을 정도로 꼴통스러운 의도로 썼으니 더 이상의 실드질이 必要韓紙?
연주를 맡은 도쿄 교향악단은 현재 같은 이름을 쓰는 악단과 전혀 상관없는 단체로, 위에 쓴 주오 교향악단이 1941년 무렵 도쿄로 이사온 뒤 개칭한 것이다. 신교향악단이 1930년대 중반부터 로젠스톡의개갈굼집중적인 훈련을 받던 것과 비슷하게 이 악단도 독일에서 망명해온 유대계 지휘자인 만프레드 구를리트의 조교조련을 받고 있었다.
오키 마사오: 교향 모음곡 '다섯 개의 이야기'
콩세르 오브 관현악단/오키 마사오
(테이치쿠 80000. 녹음 연도 불명)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일본의 신진 작곡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제정한 바인가르트너 작곡상의 1937년도 수상작이다. 다만 완성된 것은 그보다 3년 전인 1934년이었고, 초연도 그 해 가을에 오키 자신이 지휘한 신교향악단이 행한 바 있었다. 작곡자 자신이 쓸데 없는 군국주의빠 해설로 능욕한 위의 곡과 달리 정치적 함의는 전혀 없는 곡이다.
녹음 연도가 불명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설서에는 1937년 바인가르트너상 수상을 전후해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원래 테이치쿠는 유행가 레코드를 주로 발매하던 회사였는데, 오키가 왜 굳이 여기서 녹음을 취입했는 지는 모르겠다. 프랑스어로 기입된 악단도 상설 악단이 아니라 이 녹음을 위해 급조한 악단이었다.
여담으로, 오키는 흔히 리버럴한 좌익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혼동하면 안되는 게, 일본의 좌익은 한국의 좌익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NL)처럼 상당히 일그러진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키가 그 좌익의 사고관으로 바라본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침탈당해 신음하고 있는 지역이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그 열강을 물리치고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결국 오키는 일본도 서구 열강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군국주의 국가였다는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본 정부의 선전에 넘어간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오키 자신의 한계에 그치지 않고, 현재 일본 좌익의 상황에도 별 변화 없이 반영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의 대담을 다룬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 보면, 극우와 극좌로 대별할 수 있는 '진영' 은 다를 지 몰라도 극단주의자들이 갖기 마련인 꼴통스러움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마모토 나오타다: 피아노와 관현악 '일본 환상곡'
후지타 하루코/주오 교향악단/야마모토 나오타다
(일본 빅터 A4145~6. 녹음 연도 불명)
1938~40년 사이 일본 방송 협회(현 NHK)가 현상 모집한 17곡의 관현악 작품들 중 한 곡으로, 음반까지 만들어진 것은 이 곡이 유일했다고 한다. 아마 곡에 사용된 주제들이 일본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민요 혹은 그에 준하는 곡들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나도 '사쿠라 사쿠라' 라던가 '황성의 달' 정도는 골라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녹음 연도가 불명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곡 연도(1940년)를 보면 아마 그 때를 전후해 녹음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야마모토는 작곡가 외에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고, 아들인 야마모토 나오즈미는 이후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로 성장했다.
후카이 시로: 교향 영상 '자바의 노래'
일본 교향악단/아사히나 타카시
(니치쿠 JW127~8. 1943년 녹음)
까기 위해 들은 녹음 2. 후카이는 이케노우치 토모지로 등과 함께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짙게 받은 부류에 속하는 작곡가였는데, 작곡 성향과 별개로 그도 역시 일본 군국주의를 치장하는 예술 생산에 동참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이 곡에서 당시 일본이 생각하는 이국 문화의 관점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쓰레기같은 식민 사관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제목 대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민요를 일본식 가락과 혼합해 만든 곡인데, 이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정치 선전과 무관치 않은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곡은 패전 후에도 일본에서 꾸준히 재연/재평가받고 있으며, 낙소스의 일본작곡가선집에도 포함되어 발매되고 있다.
녹음 자체만 따져 보면, 이 음반은 아사히나 타카시의 본격적인 첫 녹음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모교 교토대의 아마추어 관현악단과 취입한 교가 녹음이 사가반으로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 악단과 만든 첫 녹음은 이것이다. 일본 교향악단은 신교향악단이 태평양전쟁 발발 후 개칭한 악단 명칭이다.
하지만 원래 음반이 그런 지는 몰라도 피치가 엉망이라서, WAV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낙소스 음반의 피치에 가능한한 가까이 수정한 후 리핑했다. 일본 작곡가 작품들의 엉망인 피치 상태는 다른 곡에서도 계속 감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CD 5- (일본인 작품 2)
마치다 카쇼: 샤미센 협주곡 제1번
마치다 카쇼/신교향악단/시노하라 마사오
(일본 파를로폰 E10024~5. 1930년 녹음)
코토 주자 미야기 미치오와 함께 1920년대에 유행한 '신일본 음악' 의 주도자였던 인물이 샤미센 주자였던 마치다였는데, 전통 악기를 위한 곡도 남겼지만 이렇게 서양 관현악단과 전통 악기의 협연이라는 분야에서도 몇 편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이 곡의 악보는 1945년 5월에 있었던 도쿄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전후에도 오랫동안 장수한 마치다 자신도 악보를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녹음이 유일한 기록물이 되었다.
반주는 신교향악단이 담당했는데,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코노에가 아니라 오페라 반주 쪽에서 주로 활동하던 시노하라가 객원으로 지휘했다. 샤미센 독주에 과도한 음량이 집중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시기에 제작된 여타 파를로폰 녹음과 달리 비교적 깨끗한 소리를 들려준다.
CD에는 이 곡 다음으로 샤미센 협주곡 2번의 3악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녹음은 마치다 자신이 아닌 키네야 사키치라는 다른 샤미센 주자가 독주를 맡았고, 일본 빅터 소속의 녹음용 관현악단이 반주했다. 지휘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3악장만 녹음된 것인지 선행 두 악장까지 포함한 전곡이 녹음된 것인 지는 모르겠다.
-CD 6- (외국인 음악가 국내 녹음)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이노우에 소노코/일본 방송 교향악단/조셉 로젠스톡
(일본 콜럼비아 20013~5. 1939년 녹음)
이 1집 세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림스키-코르사코프 기상곡과 함께 관심을 유별나게 끈 녹음인데, 로젠스톡이 1945년 이전에 신교향악단-방송 출연 때는 일본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과 남긴 유일한 녹음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젠스톡의 일본 내 입지를 생각해 보면 왜 상업용 녹음을 포함한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 지 의아한데, 아마 로젠스톡 자신이 엄청난 완벽주의자라 악단 수준이 녹음을 제작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이 녹음은 상업용 음반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NHK 자료실에 방치되었다가 1986년 10월에 NHK의 음악 프로그램인 '시바타 미나오의 음악 노트' 에서 녹음 일부가 방송되면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전곡 녹음을 온전히 담은 이 세트가 나오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일본 방송 협회의 방송용 녹음 제작은 일본 콜럼비아에서 전담하고 있었다는데, 중일전쟁 발발 후 레코드 제작용 물자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상업용 음반은 개차반인 재질로 제작된 데 반해 방송용 레코드는 어느 정도 질좋은 원자재를 확보해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잡음을 거의 없애지 않은 마스터링으로 제작된 CD에서 그 질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연주 자체는 마치 토스카니니 Mk-II 마냥 엄정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데, 다만 피아노와 관현악의 균형이 좀 맞지 않는 대목이 있고 관악기도 멀리 물러앉아 연주하는 듯하게 녹음되었다. 로젠스톡이 이 녹음을 상업용 음반으로 발매하는 데 반대한 이유가 이 녹음 상태였다고 하는데, 다만 원판 폐기 같은 요청까지 하지는 않았는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세트인 4집의 경우에는 여타 세트와 달리 2차대전 후의 녹음이 여럿 포함되었는데, 다만 녹음 상태가 병맛인 경우가 꽤 많아서 듣는 동안 좀 신경질이 났다. 어쨌든 다음에 '게속'.
*All CD Images: ⓟ 2004 Rohm Music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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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1- (일본인 음악가 국내 녹음 1)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신교향악단/야마다 코사쿠
(일본 콜럼비아 55011~4. 1935년 녹음)
일본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남긴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다. 당시 신교향악단은 코노에 히데마로가 지나친 독선과 공금 유용 등의 문제로 쫓겨난 상태였고, 그에 따라 예전에 코노에와 맞짱뜨고 버로우탔던 야마다가 다시 악단과 관계를 회복한 뒤 상임 지휘자는 아니었어도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하고 있었다. 이 녹음 세션에서는 이 곡 외에도 슈베르트의 교향곡 8(7)번도 녹음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발매 상태다.
음질은 그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꽤 좋은 편인데, 다만 악단의 연주 수준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일단 코노에와 로젠스톡 사이의 과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물이기도 한데, 특히 관악 파트의 기량이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이하게 1악장의 반복은 그대로 살리고 있으면서 3악장 중간부의 반복을 생략하고 있고, 3악장과 4악장 사이 이행부의 경우 음반이 바뀌는 과정에서 너무 음량 차가 커서 좀 벙찐 인상도 있다.
프란츠 폰 주페: 오페레타 '시인과 농부' 서곡
신교향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2067 & 일본 콜럼비아 27928 (재발매). 1933년 녹음)
코노에 재임기의 신교향악단은 물론 말러 교향곡 4번의 세계 최초 녹음 같은 대규모 녹음 프로젝트도 진행했지만, 역시 그 당시 SP의 용량 문제와 악단의 미숙한 기량 때문에 주로 소품 녹음에 주력했다. 이 녹음은 코노에의 재임 후반기에 제작되었는데, 여타 녹음과 마찬가지로 수록 시간에 맞추기 위해 후반부에서 몇몇 대목이 생략되어 있다.
음질은 당시 일본 파를로폰의 여타 녹음들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경박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연주도 빈 음악의 우아함을 살리기에는 좀 떨어지는 편이다. 다만 이 녹음을 주시한 건, 초반부의 첼로 솔로를 당시 악단 수석 첼리스트였고 이후 지휘자로 전향한 사이토 히데오가 맡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포이어만의 제자로 촉망받는 첼리스트였지만 이상하게도 솔로 연주 녹음은 독주곡이나 협주곡을 포함해 거의 없는데, 그런 점에서 귀한 녹음으로 여겨진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 '예술가의 생애'
신교향악단/사이토 히데오
(일본 콜럼비아 29885. 1938년 녹음)
마찬가지로 소품 녹음이지만, 그래도 로젠스톡이 2년 전 전임 지휘자로 부임한 뒤 악단을 바짝 조이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기합이 들어간 모양새다. 사이토는 아직 수석 첼리스트 직함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악단의 부지휘자 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지휘자로 남긴 몇 안되는 녹음 중 하나다. 역시 많은 반복이 생략되어 있지만, 주페 서곡처럼 아예 한 대목이 통째로 생략된 부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극음악 '에그몬트' 서곡
주오 교향악단/하야카와 야자에몬
(센트럴 3517. 1936년 녹음)
지금은 도쿄에 거점을 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직계 전신이 저 주오 교향악단이었는데, 주오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본거지는 나고야였다. 이 녹음도 나고야의 로컬 음반사인 센트럴에서 제작했는데, 영세 업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녹음 뿐 아니라 SP의 품질도 매우 좋지 않다.
심한 잡음이 거슬리는 건 둘째 치고, 1934년 무렵 개발된 신녹음 기술도 도입하지 못했는지 거의 전기 녹음 초반기를 연상케 한다. 주페 서곡과 마찬가지로 중간부 경과구가 수록 시간 때문에 삭제되어 있다. 연주도 좀 안습인데, 구티나는 현악 프레이징은 둘째 치고 관악기의 존재감이
-CD 3- (일본인 음악가 해외 녹음)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스페인 기상곡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관현악단/코노에 히데마로
(일본 파를로폰 E17055~7. 1931년 녹음)
후술할 4집의 베토벤 교향곡 1번과 함께 코노에가 해외에서 제작한 첫 녹음이자, 동시에 일본 지휘자가 해외 관현악단을 지휘해 취입한 첫 녹음으로 기록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독일 파를로폰 본사가 아닌 일본 지사의 단독 기획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아 있는 얼마 안되는 SP 음반도 모두 일본 지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전기 녹음 초창기의 것이라 소리가 다소 시끄럽고 건조하게 들리는데, 그래도 연주와 녹음 상태 모두 베토벤 교향곡보다 훨씬 낫다. 복각을 담당한 엔지니어인 아타라시 타다아츠가 해설서에 악장이 연주한 바이올린 독주의 음색이 좋다며 크레모나산 바이올린을 쓴 것 같다고 주절대고 있는데, 저 양반은 딱히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렇게 쓸데 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CD 4- (일본인 작품 1)
와타나베 우라토: 교향 모음곡 '야인'
도쿄 교향악단/만프레드 구를리트
(일본 빅터 A4313~4. 1941년 녹음)
까기 위해 들은 녹음. 제10회 일본 음악 콩쿠르 작곡 부문 1등상 수상작인 곡인데, 당시 시국이 시국이었던 탓에 일본 군국주의 이념의 진한 병맛이 녹아든 곡이기도 하다. 물론 표제에서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작곡자 자신의 곡 해설 중 3악장에서 '날이 잘 선 일본도로 일격에 적을 베는 모습을 표현했다' 는 언급을 했을 정도로 꼴통스러운 의도로 썼으니 더 이상의 실드질이 必要韓紙?
연주를 맡은 도쿄 교향악단은 현재 같은 이름을 쓰는 악단과 전혀 상관없는 단체로, 위에 쓴 주오 교향악단이 1941년 무렵 도쿄로 이사온 뒤 개칭한 것이다. 신교향악단이 1930년대 중반부터 로젠스톡의
오키 마사오: 교향 모음곡 '다섯 개의 이야기'
콩세르 오브 관현악단/오키 마사오
(테이치쿠 80000. 녹음 연도 불명)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일본의 신진 작곡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제정한 바인가르트너 작곡상의 1937년도 수상작이다. 다만 완성된 것은 그보다 3년 전인 1934년이었고, 초연도 그 해 가을에 오키 자신이 지휘한 신교향악단이 행한 바 있었다. 작곡자 자신이 쓸데 없는 군국주의빠 해설로 능욕한 위의 곡과 달리 정치적 함의는 전혀 없는 곡이다.
녹음 연도가 불명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설서에는 1937년 바인가르트너상 수상을 전후해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원래 테이치쿠는 유행가 레코드를 주로 발매하던 회사였는데, 오키가 왜 굳이 여기서 녹음을 취입했는 지는 모르겠다. 프랑스어로 기입된 악단도 상설 악단이 아니라 이 녹음을 위해 급조한 악단이었다.
여담으로, 오키는 흔히 리버럴한 좌익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혼동하면 안되는 게, 일본의 좌익은 한국의 좌익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NL)처럼 상당히 일그러진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키가 그 좌익의 사고관으로 바라본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침탈당해 신음하고 있는 지역이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그 열강을 물리치고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결국 오키는 일본도 서구 열강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군국주의 국가였다는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본 정부의 선전에 넘어간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오키 자신의 한계에 그치지 않고, 현재 일본 좌익의 상황에도 별 변화 없이 반영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의 대담을 다룬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 보면, 극우와 극좌로 대별할 수 있는 '진영' 은 다를 지 몰라도 극단주의자들이 갖기 마련인 꼴통스러움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마모토 나오타다: 피아노와 관현악 '일본 환상곡'
후지타 하루코/주오 교향악단/야마모토 나오타다
(일본 빅터 A4145~6. 녹음 연도 불명)
1938~40년 사이 일본 방송 협회(현 NHK)가 현상 모집한 17곡의 관현악 작품들 중 한 곡으로, 음반까지 만들어진 것은 이 곡이 유일했다고 한다. 아마 곡에 사용된 주제들이 일본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민요 혹은 그에 준하는 곡들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나도 '사쿠라 사쿠라' 라던가 '황성의 달' 정도는 골라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녹음 연도가 불명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곡 연도(1940년)를 보면 아마 그 때를 전후해 녹음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야마모토는 작곡가 외에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고, 아들인 야마모토 나오즈미는 이후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로 성장했다.
후카이 시로: 교향 영상 '자바의 노래'
일본 교향악단/아사히나 타카시
(니치쿠 JW127~8. 1943년 녹음)
까기 위해 들은 녹음 2. 후카이는 이케노우치 토모지로 등과 함께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짙게 받은 부류에 속하는 작곡가였는데, 작곡 성향과 별개로 그도 역시 일본 군국주의를 치장하는 예술 생산에 동참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이 곡에서 당시 일본이 생각하는 이국 문화의 관점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쓰레기같은 식민 사관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제목 대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민요를 일본식 가락과 혼합해 만든 곡인데, 이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정치 선전과 무관치 않은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곡은 패전 후에도 일본에서 꾸준히 재연/재평가받고 있으며, 낙소스의 일본작곡가선집에도 포함되어 발매되고 있다.
녹음 자체만 따져 보면, 이 음반은 아사히나 타카시의 본격적인 첫 녹음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모교 교토대의 아마추어 관현악단과 취입한 교가 녹음이 사가반으로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 악단과 만든 첫 녹음은 이것이다. 일본 교향악단은 신교향악단이 태평양전쟁 발발 후 개칭한 악단 명칭이다.
하지만 원래 음반이 그런 지는 몰라도 피치가 엉망이라서, WAV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낙소스 음반의 피치에 가능한한 가까이 수정한 후 리핑했다. 일본 작곡가 작품들의 엉망인 피치 상태는 다른 곡에서도 계속 감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CD 5- (일본인 작품 2)
마치다 카쇼: 샤미센 협주곡 제1번
마치다 카쇼/신교향악단/시노하라 마사오
(일본 파를로폰 E10024~5. 1930년 녹음)
코토 주자 미야기 미치오와 함께 1920년대에 유행한 '신일본 음악' 의 주도자였던 인물이 샤미센 주자였던 마치다였는데, 전통 악기를 위한 곡도 남겼지만 이렇게 서양 관현악단과 전통 악기의 협연이라는 분야에서도 몇 편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이 곡의 악보는 1945년 5월에 있었던 도쿄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전후에도 오랫동안 장수한 마치다 자신도 악보를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녹음이 유일한 기록물이 되었다.
반주는 신교향악단이 담당했는데,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코노에가 아니라 오페라 반주 쪽에서 주로 활동하던 시노하라가 객원으로 지휘했다. 샤미센 독주에 과도한 음량이 집중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시기에 제작된 여타 파를로폰 녹음과 달리 비교적 깨끗한 소리를 들려준다.
CD에는 이 곡 다음으로 샤미센 협주곡 2번의 3악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녹음은 마치다 자신이 아닌 키네야 사키치라는 다른 샤미센 주자가 독주를 맡았고, 일본 빅터 소속의 녹음용 관현악단이 반주했다. 지휘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3악장만 녹음된 것인지 선행 두 악장까지 포함한 전곡이 녹음된 것인 지는 모르겠다.
-CD 6- (외국인 음악가 국내 녹음)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이노우에 소노코/일본 방송 교향악단/조셉 로젠스톡
(일본 콜럼비아 20013~5. 1939년 녹음)
이 1집 세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림스키-코르사코프 기상곡과 함께 관심을 유별나게 끈 녹음인데, 로젠스톡이 1945년 이전에 신교향악단-방송 출연 때는 일본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과 남긴 유일한 녹음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젠스톡의 일본 내 입지를 생각해 보면 왜 상업용 녹음을 포함한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 지 의아한데, 아마 로젠스톡 자신이 엄청난 완벽주의자라 악단 수준이 녹음을 제작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이 녹음은 상업용 음반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NHK 자료실에 방치되었다가 1986년 10월에 NHK의 음악 프로그램인 '시바타 미나오의 음악 노트' 에서 녹음 일부가 방송되면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전곡 녹음을 온전히 담은 이 세트가 나오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일본 방송 협회의 방송용 녹음 제작은 일본 콜럼비아에서 전담하고 있었다는데, 중일전쟁 발발 후 레코드 제작용 물자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상업용 음반은 개차반인 재질로 제작된 데 반해 방송용 레코드는 어느 정도 질좋은 원자재를 확보해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잡음을 거의 없애지 않은 마스터링으로 제작된 CD에서 그 질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연주 자체는 마치 토스카니니 Mk-II 마냥 엄정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데, 다만 피아노와 관현악의 균형이 좀 맞지 않는 대목이 있고 관악기도 멀리 물러앉아 연주하는 듯하게 녹음되었다. 로젠스톡이 이 녹음을 상업용 음반으로 발매하는 데 반대한 이유가 이 녹음 상태였다고 하는데, 다만 원판 폐기 같은 요청까지 하지는 않았는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세트인 4집의 경우에는 여타 세트와 달리 2차대전 후의 녹음이 여럿 포함되었는데, 다만 녹음 상태가 병맛인 경우가 꽤 많아서 듣는 동안 좀 신경질이 났다. 어쨌든 다음에 '게속'.
*All CD Images: ⓟ 2004 Rohm Music Foundation
Posted by 머나먼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