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저 악단의 악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쿠로야나기 모리츠나의 딸인 테츠코의 눈에 비친 로젠스톡은 '지휘봉만 잡으면 엄청 무서워지는 아저씨' 였던 것 같은데, 실제로 로젠스톡의 1930~40년대 이미지는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폭군형 지휘자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쿠타가와 야스시를 비롯해 전쟁 후 등장한 몇몇 신진 음악인들이 그의 가혹한 리허설 방식 때문에 관악기 주자들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저 시기 동안 악단의 합주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로젠스톡은 고향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 이력을 시작했고, 이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해 그 곳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프란츠 슈레커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아카데미 졸업 후 다름슈타트 국립극장에서 데뷰했고, 같은 극장과 비스바덴의 헤센 국립극장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를 역임한 뒤 1928년에 아르투르 보단츠키의 후임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메트에서는 평이 많이 안좋았는 지, 불과 여섯 번의 공연 뒤 다시 보단츠키에게 자리를 넘기고 독일로 돌아왔다.
1930년에는 만하임 국립극장의 음악 총감독(Generalmusikdirektor)에 부임했지만, 1933년에 히틀러를 수장으로 하는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해직당했다. 이후 나치의 관제 조직이었던 독일 유대인 문화연맹의 오페라 담당 지휘자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이 자리도 1936년에 내놓았다. 베를린 올림픽으로 일시적인 소강 상태를 보이던 나치의 유대인 박해는 올림픽 종료 후 다시 격화되었고, 토스카니니 등 지인들은 독일에 있지 말고 망명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그 와중에 코노에 히데마로의 독선에 반발해 자주 운영 악단으로 재출범한 도쿄의 신교향악단에서는 새로운 전임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마침 일본을 방문해 공연하고 있던 첼리스트 에마누엘 포이어만과, 로젠스톡 재임기에 유대인 문화연맹 관현악단 단원이었고 그보다 좀 더 일찍 일본에 이주해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빌리 프라이가 로젠스톡을 적임자로 추천했다. 로젠스톡은 프라이의 명의로 전달된 초청을 수락하고 1936년 8월에 일본에 도착해 신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부임 직후 로젠스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의 기본적인 레퍼토리 외에도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매우 생소했던 드뷔시와 라벨, 스트라빈스키, 버르토크, 프로코피에프, 베르크 등의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등 합주력 강화와 레퍼토리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몇몇 협연자와 빚어진 트러블 등 안좋은 일도 있었지만, 중일전쟁 개전 후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극우화와 함께 경직되고 있던 일본 음악계에서 이런 시도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이 때 로젠스톡이 남긴 녹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당시 악단의 활동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지난 번 끄적인 일본 SP 복각선집 1집에 수록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유일한 녹음으로 남아 있는데, 협주곡 녹음이고 또 기술적으로 제약이 있던 방송녹음이라 악단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로젠스톡 자신도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특히 1941년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로젠스톡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기서도 또 까이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은 반유대주의에서 한결 자유로웠기 때문에 대놓고 씹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독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로젠스톡도 친독 성향의 정치인이나 음악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악단 사무국장이었던 아리마 다이고로 등의 옹호파가 나선 덕에 계속 지휘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1944년 2월을 끝으로 결국 활동 중지를 당하고 카루이자와에 강제 이주당해 궁핍 속에서 남은 전쟁 기간을 보냈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약 두 달 지나서 로젠스톡은 일본 교향악단-신교향악단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개칭된 악단명-의 지휘대에 서면서 다시금 재건기의 악단을 조련했다.
다만 종전 직후의 재임은 겨우 1년 남짓으로 짧게 끝났는데, GHQ(주일 연합군 총사령부)의 음악 담당 장교로 파견된 피아니스트 호르헤 볼레가 뉴욕 시티 오페라의 지휘자 제의가 들어왔는데 가지 않겠냐고 권유해 1946년 10월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로젠스톡은 같은 해 지휘자로 부임한 뒤 1952년에는 같은 오페라단의 총감독이 되었고,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플랜드와 월튼, 버트로크, 아이넴 등 당대 작곡가의 최신작을 비롯해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으로 제롬 컨의 '쇼 보트' 등 뮤지컬까지 공연 목록에 올렸다.
하지만 이런 레퍼토리 선정이 상업적인 실패로 끝나면서 오페라단 운영진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1956년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전인 1951년에도 잠시 일본을 방문해 공연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NHK 교향악단으로 이름이 바뀐 옛 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다만 이 때도 재임 기간은 짧아서 1년 만에 오스트리아 지휘자 빌헬름 로이브너에게 직책을 물려주고 퇴임했고, 이후 1958~61년 동안 서독 쾰른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한 뒤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고정된 직책 없이 이런저런 오페라단과 관현악단에서 객원으로 출연하며 1970년대 후반에 사실상 은퇴할 때까지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
지휘 활동의 후반기였던 1970년대에 로젠스톡은 부정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는데, 1970년과 1972년, 그리고 1977년에 세 차례 내일해 NHK향을 객원 지휘했다. 마지막 방문이 된 1977년은 마침 악단의 창단 50주년이기도 해서, 로젠스톡은 2월 내내 일본에 머무르며 창단 기념 연주회와 두 차례의 정기 연주회를 비롯해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 당시의 실황 일부가 2011년에 일본의 킹 레코드를 통해 CD로 발매되었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러시아의 정서를 이해하려면 꼭 들어야 하는 교향곡' 으로 손꼽았다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과 보로딘의 교향곡 2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차이콥스키는 2월 4일, 보로딘은 2월 16일 실황이고 모두 도쿄 NHK홀에서 녹음되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녹음 상태는 상당히 좋은 편인데, 로젠스톡과 신교향악단-일본 교향악단-NHK 교향악단이 남긴 것 중에 아마 이것 만큼 품질 좋은 녹음은 없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다만 '로젠스톡=독재형 지휘자' 라는 이미지와 걸맞지 않게 두 곡의 연주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많이 부드러운 편이다. 1939년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녹음이나 1950년대에 남긴 베토벤 교향곡 3번의 단편-후술하겠지만,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볼 수 있다-등과 비교하면 더더욱 강경한 인상을 느낄 수 없는데, 아마 로젠스톡 자신이 80대의 고령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성마른 기질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악단의 기량도 크게 흠잡을 데는 없지만, 아무래도 소리가 좀 가볍다는 인상이 강해서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특성 때문에 로젠스톡이 1970년대에 방일해 공연한 실황은 좀 더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도 멘델스존의 서곡 '핑갈의 동굴' 의 1977년 실황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이 녹음은 아직까지도 무슨 음반으로 나왔는 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고, 1970년과 1972년의 방일 공연은 아직 녹음 여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악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지휘자 치고는 이렇게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이 좀 아쉬운데, 그나마 2012년 들어 낙소스 일본 지사인 낙소스 재팬에서 인터넷 스트리밍 전용으로 1940~80년대의 미발표 녹음들을 공개하고 있고 여기에도 로젠스톡이 지휘한 녹음이 몇 가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951년 6월 14-16일에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실황인데, 아직 테이프 녹음을 도입하지 못했는지 음질이 매우 좋지 않다. 게다가 2악장의 경우 무슨 이유인지 겨우 3분 남짓한 단편만이 녹음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모노 음원이기는 하지만 1956년에 녹음된 것은 테이프가 도입되어서 상당히 깨끗한 음질인데, 다만 이것도 테이프가 오래되었다 보니 곳곳에 드롭아웃 등으로 소리가 살짝 짤려나간 대목이 눈에 띈다. 11월 29-30일과 12월 1일에 히비야 공회당에서 녹음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발췌와 자세한 녹음월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과 파야의 발레 모음곡 '삼각 모자' 2번이 공개되어 있다. 다만 이것도 다른 곡은 제대로 다 들어 있으면서 봄의 제전이 발췌인 것이 매우 아쉽고, 삼각 모자의 경우 마지막 곡 전반부의 일부가 테이프 누실인지 뭔지 아예 건너뛰고 재생된다.
낙소스 재팬에서 공개한 것 중 가장 마지막 시기인 1957년의 녹음-녹음월일 불명의 방송녹음-인 버르토크의 단막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성' 은 좀 이색적인 물건인데, 연주 시작 전에 나오는 나레이션을 나가이 토모오가 일본어로 낭독하고 있다. 나카야마 테이이치(바리톤. 푸른 수염 영주)와 이토 쿄코(소프라노. 유디트)도 일본어로 번안한 악보를 사용해 노래했는데, 이 곡의 일본어 번안 녹음으로는 이게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아마 당시 일본 성악가들이 헝가리어 딕션에 익숙치 않았고, 또 그게 아니더라도 좀 생경한 곡이었던 만큼 자국어로 번안해 공연한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1920~4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 성악가들이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 칸초네 등을 녹음할 때는 대개 일본어로 번안해서 노래한 것을 볼 때, 그런 관행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까지 합쳐도 로젠스톡과 NHK향의 녹음은 결코 많은 게 아니고, 설렁 NHK향과 만든게 아니더라도 로젠스톡의 음반 목록은 매우 빈약하다. 일본에 가기 전에 만든 녹음도 1929년에 독일 오데온에서 취입한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3번과 교향곡 5번, 베를리오즈의 서곡 '로마의 사육제' 와 멘델스존의 서곡 '핑갈의 동굴' (이상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 연주), 1935년에 베를린 유대인 문화연맹의 자체 음반 레이블인 루크라폰에서 취입한 라트하우스의 모음곡 '우리엘 아코스타' 중 유대 춤곡과 모차르트의 세레나타 노투르나 중 1악장과 3악장 (이상 베를린 유대인 문화연맹 관현악단 연주) 정도 뿐이다.
오페라 전곡 녹음의 경우 1960년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객원 출연했을 때의 실황인 베르디의 '맥베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등이 남아 있지만, 모두 비공인 해적판이고 아직 정규반으로는 나오고 있지 않다.
그나마 해적판 음반이라도 나오는 1960년대 오페라 실황과 달리, 1920~30년대의 SP 녹음은 아직도 대부분 CD 복각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하다 못해 그렇게 로젠스톡을 스승으로 모시는 일본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없는데, 그나마 베토벤 교향곡의 경우 어느 네덜란드 블로거가 직접 복각한 파일을 다운받아 들어볼 수 있다. 클릭
그리고 좀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로젠스톡의 녹음은 한국에도 두 가지가 보존되어 있다. 로젠스톡은 1972년과 1977년에 방일했을 때 곁다리 격으로 한국을 방문해 국립교향악단-현 KBS 교향악단-을 모두 네 차례 객원 지휘했는데, 그 중 1977년 3월 8일과 3월 12일에 가진 공연의 실황이 녹음되어 있다. 2009년 12월에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 개관한 공연예술박물관의 1관에서 CD로 옮긴 것을 들어볼 수 있고, 인터넷에서도 공연예술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음향 자료는 물론이고 공연 프로그램과 사진 등의 시각 자료까지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국립극장에 직접 찾아가서 신청해 들어본 바로는 음질이 꽤 안좋아서, '이게 정말 1977년 녹음인가' 할 정도로 실소를 자아냈다. 사실 이건 국립극장 자료실에 보존되어 있는 것 뿐 아니라 예술의 전당에 입주해 있는 국립예술자료원의 공연 실황 자료들도 마찬가지라서, 한국의 공연 기록 보존 실태가 얼마나 열악했는 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물론 음질도 음질이지만, 연주 자체도 마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 들릴 정도로 상당히 어설퍼서 안습이다.
말미에 이야기가 좀 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국립극장 자료실에는 1973년 10월 장충동에 개관한 이래 극장에 상주하고 있거나 상주했던 국립 예술 단체들의 공연 실황을 담은 음향자료가 상당히 많이 보관되어 있다. 국립교향악단도 상주 단체였던 만큼 KBS로 이관되기 전의 정기연주회 자료는 웬만한 것을 다 들어볼 수 있는데, 다만 NHK가 녹음한 수준 만큼의 음질과 연주를 기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냥 보존되어 있는 것 자체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니까.
그리고 다음 음악잡설에는 즉흥적으로 생각난 이 주제 때문에 또 밀려난 독일 주문 CD들을 꼭 다루려고 한다. 어느 정도 동어반복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 CD를 입수함으로써 새롭게 얻거나 수정해야 할 정보도 있으니 따로 포스팅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