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는 대개 오페라로 유명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콘서트에서 걸출한 역량을 보여주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실제로 대충 생각나는 대로만 써봐도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 푸치니,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등은 주요 활동 무대가 오페라였고, 오페라 외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탈리아 관현악단 중 오페라극장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콘서트 활동을 하는 악단을 대보라고 하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물론 오페라라고 해도 일단 관현악단이 수반되는 예술 장르인 만큼, 거기서도 관현악 활동을 하는 이들의 숫자는 꽤 많다. 그리고 그런 관현악 연주자들을 양성하고 합주 경험을 쌓게 하는 청소년 관현악단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걸 음반으로 입수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중고음반의 노다지로 여기는 회현지하상가의 미스티레코드가 이번에도 순기능을 해줬다.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피에솔레의 음악학교에서 후원하고 있는 청소년 관현악단이 이탈리아 청소년 관현악단(Orchestra Giovanile Italiana)인데, 이 악단이 1994~99년 동안 주세페 시노폴리의 지휘로 공연한 실황을 발췌 수록한 것이 저 CD다. 해설지에 따르면 수록곡 중에는 시노폴리가 그 때까지 전혀 녹음을 남기지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멘델스존: 서곡 '핑갈의 동굴' (1999.6.6 베네치아 팔라페니체)
쇤베르크: 다섯 개의 관현악곡 (1997.1.12 베로나 필하모닉 극장)
페트라시: 관현악 '단편' (1998.3.17 피렌체 시립극장)
리스트: 교향시 '오르페우스' (1994.11.25 페라라 시립극장)
리스트: 교향시 '타소. 비탄과 승리' (1997.1.12 베로나 필하모닉 극장)
비교적 친숙한 곡인 멘델스존과 리스트 사이에 쇤베르크와 페트라시를 끼워넣은 선곡인데, 개인적으로는 저렇게 끼워져 있는 현대음악의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프로 악단을 지휘한 것보다는 좀 떨어지겠지만, 자신이 작곡가이기도 했고 실바노 부소티와 브루노 마데르나 등 동향인 선배들의 현대음악 작품을 적극적으로 다룬 시노폴리가 청소년들을 이끌고 난해한 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진풍경으로 느껴진다.
다만 이것도 연주와 녹음 수준이 좀 들쭉날쭉한 것이 유감인데, 아무래도 애초에 음반으로 만드려고 기획한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실황 녹음들을 짜깁기하다 보니 각 곡마다 연주와 음향의 질이 고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합주력도 다소 엉성한 부분이 보인다고 생각되는데, 이것도 그냥 '이탈리아 악단은 좀 자유분방하다' 라고 생각하는 나의 편견일 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보다 청소년 관현악단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해 보이는 나라가 독일이다. 융에 도이체 필하모니를 비롯해 저 앨범에서 연주한 연방 청소년 관현악단(Bundesjugendorchester) 등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단체들도 있고, 대도시나 연방주 별로도 각 지자체가 운영하는 청소년 관현악단들이 운영되고 있다.
1969년에 결성된 연방 청소년 관현악단은 대략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거의 한 해마다 CD를 내놓고 있는데, 이번에 마찬가지로 미스티레코드에서 구입한 것도 1991~92년 사이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렘샤이트 아카데미에서 스튜디오 녹음한 음원들을 담고 있다. 지휘는 크리스토프 프리크(Christof Frick)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지휘자가 맡았는데, 슈만의 교향곡 3번 '라인', 라벨의 스페인 광시곡과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 중 일곱 베일의 춤이 차례대로 실려 있다.
원래 저 악단의 음반에는 기존 곡과 현대 곡이 비슷하게 섞여 있다고 하는데, 이 앨범의 경우에는 좀 예외적으로 기존 곡만 가지고 제작되었다. 가장 기대하고 들었던 곡은 슈만 교향곡이었는데, 단정하고 깔끔한 모양새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다소 패기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프로 악단이 해도 욕먹기 일쑤인 곡을 이 정도로 한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라벨의 두 곡은 좀 의외의 선곡이었는데, 악단과 작곡자의 국적 차이를 떠나 섬세한 표현력을 다듬기 위한 연습용 선곡으로 보였다. 물론 아직 특유의 미묘한 색채나 뉘앙스의 표현이 좀 부족해 투박하거나 단조롭게 들리는 대목도 없지는 않지만, 딱히 프랑스식 감성만을 우위에 놓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들을 만한 연주로 여겨진다.
마지막 곡으로는 슈트라우스의 작품 중 가장 뇌쇄적이고 동양적이라는 일곱 베일의 춤을 골랐는데, 관현악법의 대가가 쓴 이 곡도 아마 청소년 단원들이 이후 성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선곡이 아닐 까 생각된다. 라벨과 마찬가지로 아직 그 화려한 색채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곡이 요구하는 것이 뭔지는 어느 정도 알고 넘어가는 듯한 인상이다.
독일 악단이라길래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인 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덜 여문 연주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목관악기의 존재감이 팍 죽은 다소 탁한 녹음 상태 때문에 그런 인상이 짙어진 것 같다. 다만 기본기 측면에서는 이탈리아 악단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이들이 성인이 되어 악단원 활동을 할 때 이렇게 고른 까다로운 곡들이 활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겠구나 하고 납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CD 자체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교향곡 3번의 4-5악장과 스페인 광시곡 전곡을 한 트랙으로 묶어서 집어넣은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대목과 곡이 딱히 쭉 이어서 연주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CD들도 다 트랙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는 데 말이다. 그래서 임의로 WAV 편집 프로그램으로 나눠놓은 뒤 듣고 있다.
위의 두 음반과 다소 시간차를 두고 구입했지만, 역시 미스티레코드에서 발견해 구입한 것이 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4번 음반이다. 지금은 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럽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이 영국 지휘자 제임스 저드의 지휘로 1988년 8월 18일에 이탈리아 최북부 티롤 지방의 볼차노 성당에서 '볼차노 여름 음악제' 의 일환으로 참가한 공연의 실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처음 접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 하나고, 그 때문에 이 음반도 듣기 전에 꽤 기대를 많이 했다. 물론 기대도 하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편성과 복잡난해한 구조의 대곡을 과연 청소년 악단으로서 얼마나 잘 소화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물론 하룻 동안의 공연이라고 엄청난 실수가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고, 연주 자체도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녹음이 다 망쳐놓았다. 고음역은 비교적 명확하게 들리지만, 중음역에서부터 존재감이 죽기 시작하더니 저음역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콘트라베이스나 베이스드럼, 튜바 등 저음 악기들이 강하게 치고 들어가는 부분은 정말 어색하고, 1악장 후반에서 어지럽게 진행되는 현악기의 속주와 뒤이은 광포한 총주의 폭력성, 3악장 후반의 아이러니한 코랄 대목도 그냥 애들이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수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여타 누오바 에라 음반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인 녹음이 여기서도 크나큰 역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음악제 주최 측이든 악단과 지휘자든 상당히 공을 들인 공연이었겠지만, 이런 형편없는 음질의 음반으로는 그 당시의 연주가 어땠는지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다.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반은 이렇게 좀 복불복 격인 면이 강한데, 그래도 그 와중에 뭔가 건질 것은 있겠지 하고 복권 사는 심정으로 계속 음반을 구하는 중이다. 신보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끌고 있는 서동시집 관현악단이 2009년 BBC 프롬스에서 공연한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의 앨범이 좀 흥미가 당기는데, 언제 다른 음반과 함께 비용을 맞춰서 구입할 생각이다.
이제 남은 건 한국 재즈 관련 음반 세 종류인데, 한국 재즈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구입한 것도 꽤 오랜만이고 각자 쓸 이야기도 이것저것 있으니 다음에 계속 포스팅하려고 한다.